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92)화 (92/135)

92.

“그만!”

지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명치에서부터 끓어오른 분노를 뱉어냈다. 이성을 잃은 듯 거칠게 소리친 후작 부인을 보고 모두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화들짝 놀란 시종과 남자아이가 새를 놓았지만 조나단은 새를 꽉 움켜쥐고 굳어버렸다. 어디에서도 큰소리 한 번 낸 적 없던 지젤이 누가 봐도 화를 내고 있어서 모두들 숨을 죽였다.

“왜-?”

조나단은 자신을 보며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다가오는 후작 부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게 뭐 있다고, 화를 내?

“놓으세요.”

지젤이 생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차갑게 내뱉는 말에 조나단은 고개를 저었다.

“내 껀데, 왜!”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손에 더 힘을 주는 조나단을 보며, 지젤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그러자 눈치 빠른 시종이 조나단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조나단 님. 날개가 부러진 것 같으니, 일단 이리 주세요. 이제 날아가지 못하니 놓으셔도 됩니다.”

“싫어! 내 카나리아인데, 왜 다들 빼앗아가려고 해? 내 꺼라고!”

지젤은 왕자에게 새를 선물로 준 이안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별것도 아닌 이 상황에 대해 예민하게 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다. 그녀가 조나단의 가는 손목을 꽉 움켜쥐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빼앗기는 게 싫어서 날개를 부러트리니 이제 속이 시원하신가요?”

“아파, 놔! 다니엘 부인 미워! 쟤가 먼저 허락 없이 만졌단 말이야!”

조나단이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지젤은 평소처럼 그랬냐며 토닥여줄 수가 없었다. 조나단은 아직도 새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 놓지 않고 있었다.

“자랑하고 싶어서 새장에서 꺼내신 건 조나단 님이시잖아요. 새가 아파하고 있으니까, 놓으세요.”

“아프게 하려고 한 거 아니야. 그냥 나는 날아갈까 봐-”

지젤은 놀란 조나단이 웅얼거리며 변명하는 걸 듣지 않고 아이의 손에서 새를 빼앗았다. 와중에도 새는 어떻게든 도망쳐보려고 부러지지 않은 날개로 퍼덕였다. 시종이 굳은 얼굴로 서있는 지젤에게 빠르게 사과했다.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왜? 왜 화를 내는 거야? 왜 갑자기 나 미워해?”

조나단이 지젤의 드레스 자락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지젤은 그런 조나단을 보지도 않고 답했다.

“말 못 하는 동물일지라도 다시는 이런 식으로 다루지 마세요.”

“싫어, 내 카나리아를 왜 내 마음대로 못 하는데?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조나단 님이 욕심부려서 새가 다쳤잖아요.”

지젤이 이를 악물고, 매섭게 조나단을 노려보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들 지젤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에 대해 수군거리다가, 문제의 새가 황태자가 준 선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황가에서 선물로 준 것이니 예민할 수도 있지.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태 제대로 놀아주지도 않았으면서, 나한테 막 화만 내고 미워!”

눈시울이 붉어진 조나단이 씩씩거리며 지젤에게 소리쳤다. 그럼에도 지젤이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하자, 아이가 주먹을 꽉 쥐고 지젤에게 휘둘렀다. 작은 손이 주먹 쥐어 봤자, 아프지 않을 게 뻔해서 지젤은 굳이 피하지 않았다. 동시에 누군가 지젤의 허리를 낚아채며 조나단을 밀어냈다.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했더니.”

짧게 혀를 찬 다이한이 얼굴을 확 찡그렸다. 황태자 때문에 후작 부부 사이가 멀어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일부러 시간 내 들른 그는 말없이 선 지젤의 얼굴부터 살폈다. 어린애들 모아놓고 앉아서 수다나 떨 거라 생각했는데 왕자랑 뭘 하는 건지.

“후작님.”

지젤이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손에 든 새를 내려다봤다. 아까처럼 격하게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도망치려고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게 소름이 끼쳐서 지젤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이한은 어딘지 감정이 격해 보이는 지젤의 얼굴을 살피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조나단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후작을 보고 우물쭈물했다. 아까부터 중간에 끼여있던 시종이 후작에게 짧게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새가 날아갈 뻔해서- 소란이 좀 있었습니다.”

다이한은 지젤의 손에 든 새와 상황을 쭉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원래 관상조는 날개깃을 짧게 잘라 관리하지 않나?”

그래야 멀리, 높게 날아가지 못할 테니. 다이한의 말에 지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죄송합니다. 미리 그렇게 하지 못한 저희 잘못입니다.”

주시면 저희가 다시 새장에 넣어두겠습니다. 시종이 지젤을 향해 손을 내미는데 지젤은 그에게 새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걸 가만 보던 다이한이 지젤의 어깨를 감싸 안고 몸을 돌렸다.

“잠깐 바람 좀 쐬지.”

지젤은 다이한이 이끄는 대로 응접실을 나섰다. 뒤에서 조나단이 작게 내 카나리아-. 라고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붙잡거나 떼를 쓰지는 않았다. 후작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살피는 귀족들을 무시하고, 1층을 지나 사람 없는 조용한 정원까지 걸었다. 그동안 지젤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새만 내려다봤다.

“그 새가 가지고 싶다면 가져.”

왕자에게는 새로운 새를 사다 줄 테니까. 다이한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지젤의 마음이 편한 대로 해주고 싶었다. 날개가 꺾인 채로 바동거리는 새를 왜 그렇게 꽉 쥐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필요하다면 가져야지. 그게 황태자가 준 선물일지라도.

“데려가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조나단 님이 안 놓아주셔서, 날개가 부러졌어요.”

지젤의 말에 다이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접혔다. 날지 못하게 되어 안쓰러워하는 건가.

“원래 날기 위해 태어난 동물이니, 언젠가는 다시 날 수 있겠지.”

다이한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무거운 숨을 들이마셨다. 지젤의 기분이 잔뜩 가라앉은 게 느껴지는데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한센도 돌아오지 않는 마당에, 신경 써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적당히 하고 저택으로 돌아가.”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선 다이한은 지젤이 계획을 변경해서 저택으로 일찍 돌아올 것이라 결론지었다. 저렇게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왕자와 놀아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다이한의 넓은 등을 빤히 본 지젤은 머리가 지끈거려서 얕은 숨을 반복해서 들이마셨다. 날기 위해 태어난 새인 걸 알고 있으면서, 왜 날개깃을 잘라? 예민하게 굴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자기연민에 허덕이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지젤은 손안에서 파르르 떠는 새가 자신처럼 보여서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후작님.”

다이한이 지젤의 부름에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지젤을 마주 본 상태로 그녀의 다음 말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를 불러 세운 지젤은 서너 발자국 떨어져 있는 다이한의 연녹색 눈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에메랄드빛 눈이 햇살에 반짝였다. 그 순간 지젤은 이상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날개가 꺾인 새는.”

지젤이 움켜쥐고 있던 손을 펼치자, 새가 한쪽 날개로 버둥거리며 그대로 추락해 잔디 위를 뒹굴었다. 그러자, 무표정했던 다이한의 얼굴에 금이 갔다. 입 안의 혀를 짓씹는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지젤은 단순히 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막 깨달은 다이한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날 수가 없어요.”

날기 위해 태어났음에도. 잔디를 구르면서도 어떻게든 날아보려고 멀쩡한 한쪽 날개를 움직이는 가련한 하얀 새를 내려다본 다이한은 황급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는 본인이 도망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더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언제나 그렇듯 비겁한 선택이었다.

***

지젤은 분위기가 엉망일 게 분명할 응접실로 돌아가지 않고 새를 감싸 쥔 채 마차에 올라탔다. 후작저로 돌아가는 내내 그녀는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비를 보고 왔어야 하는 건데, 그래야 조지 콜튼이 뭘 꾸미는지도 알 수 있을 테고. 그녀는 그걸 후작저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젤 님.”

미아가 환하게 웃으며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그녀를 반겼지만, 지젤은 웃지 않았다. 미아를 향해 눈길도 주지 않고 계단을 오르던 지젤은 계단을 내려오던 이안과 마주쳤다. 이안이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들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뭐야?”

“새.”

지젤은 왜 어린아이한테 감당 못 할 선물을 줬냐고 쏘아붙이려다가 그만뒀다. 그걸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짧게 대답한 지젤은 그대로 그를 지나쳐, 서재로 향했다. 잠깐 멈춰있던 이안이 성큼 계단을 따라 올라오며 그녀의 뒤에 붙어 섰다.

“왜 또 나한테 화가 났을까.”

벌써 소식을 들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이안이 손에 든 종이를 흘끔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재에 도착한 지젤은 새를 책상 위에 조심히 내려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날개가 완전히 꺾였는데, 이게 붙을 수 있는 건가?

“이런.”

이안은 단숨에 지젤이 화가 난 이유를 알아챘다. 생각 없이 조나단에게 새를 선물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안이 지젤의 뒤에 서서는 손에 든 종이를 뒤로 슬쩍 숨기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반성 중이야, 내가 생각이 짧았으니 용서해.”

음울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까는 그를 보며, 지젤이 중얼거렸다.

“이제 이 새는 날지 못할 거야.”

그녀가 단정 지어 하는 말에, 이안은 눈을 찡그렸다.

“수의사에게 데려가도록 할게. 방법이 있겠지.”

이안은 지젤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걸 보고, 그녀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그는 능숙하게 내용 모를 종이를 들고 있는 오른팔은 등 뒤로 숨겼다. 그의 왼팔이 지젤의 허리에 감겼다. 지젤은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이안이 지젤의 뺨에 입 맞추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네 마음 불편하지 않게 최선을 다해보자.”

한쪽 날개가 멀쩡하니까, 괜찮을 거야. 이안이 작은 새를 손수건에 조심히 감아서, 서재 앞에 선 기사에게 손짓해 넘겼다. 지젤은 계속 말이 없었고, 이안은 본인이 혼날 일을 했으므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혼나는 김에 같이 혼나야겠다.”

지젤에게서 한 발 멀어진 이안이 책상 위에 종이를 펼쳐 보였다. 이안의 서명이 적힌 종이를 내려다본 지젤이 그걸 집어 들면서 눈썹을 찡그렸다. 검은 잉크로 적힌 글씨체가 그의 곧게 뻗은 손가락들만큼 유려했다.

“이게 뭔데?”

“구구절절 다 읽을 필요는 없고.”

그가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검지로 톡톡 중간쯤 적힌 문장을 짚었다. 첫 문장부터 읽어 내리던 지젤의 눈이 자연스레 그 밑으로 향했다.

[헬렌 미스틱 양에게 파혼을 통보하는 바이다.]

이안의 하얀 검지가 곧게 직선을 그으며 문제의 내용을 가리켰다. 지젤은 잠시 그대로 굳어있다가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입만 뻐끔거리던 그녀는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뭐?”

이안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악에 어린 얼굴로 서있는 지젤을 보며 곱게 눈을 휘어 웃어 보였다.

“나 파혼한다고.”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의 검은 눈이 은은한 광기로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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