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91)화 (91/135)

91.

“야, 빨리 좀 움직여.”

뒤에서 상자를 나르던 남자가 그녀의 등을 툭 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로브가 당겨져 얼굴이 드러났다. 검은 로브가 벗겨지고, 사내처럼 짧게 자른 붉은 머리가 흐트러졌다. 일부러 거칠고 볼품없이 잘라낸 머리는 그녀의 의도대로 삐죽삐죽 멋이 없었다.

머리뿐만이 아니라 입고 있는 옷도 마찬가지였다. 붕대로 꽉 묶어놓은 가슴은 평평했다. 투박하고 질긴 원단의 검은 바지와 누리끼리한 셔츠가 천상 평민 남자처럼 보였다. 거기에 더해 덜 여성스러워 보이려고 오른쪽 눈썹을 살짝 그어내 스크래치를 만들어 껄렁해 보였다. 턱선이 좀 갸름하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체격이 좀 작은 사내처럼 보였다.

“거 조심 좀 하지?”

엘레노어가 자신을 치고 지나간 남자의 등을 팔꿈치로 쿡 찌르며 짜증 냈다.

“아, 그러니까 덥게 뭐 그런 걸 뒤집어쓰고 있어.”

“내 나름의 멋이야. 멋.”

천연덕스럽게 툴툴거린 그녀는 로브를 한쪽 바닥에 던져두고 상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상단 건물 앞에서 물건을 나르며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왕궁에 들어갈 제일 자연스러운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 본의 아니게 팔 근육만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자작님 나오시니 이거 먼저 치우게.”

건물에서 툭 튀어나온 노인네가 입구를 막고 있는 상자를 발로 툭 찼다. 이엘리야가 고개를 꾸벅이고 상자를 나르는 데 집중했다.

“그럼, 아버님. 스텔라 상태 보고 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자네가 고생이 많군. 들어가게.”

스텔라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시골로 요양 간 것을 전하기 위해, 그녀의 부친을 찾았던 바르한 자작은 그대로 건물을 나서다가 인상을 확 구겼다. 길이는 짧지만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한 여자가 상자를 끌어안고 지나치는 걸 본 그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지젤 님?”

반사적으로 지젤이라 생각해서 어깨를 잡아챘던 그는, 손목을 잡힌 소년이 인상을 확 찌푸리는 걸 보고 바로 사과했다.

“아, 내가 착각했군.”

소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제 갈 길을 찾아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빤히 보던 자작이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웃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별걸 다 닮았다 생각하니.”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진짜 중증인가? 그가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고민하며 마차에 오르는 동안, 이엘리야는 저건 뭐 하는 놈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뭔데 남의 언니 이름을 막 불러?

***

이엘리야를 찾으려고 하루에도 수도를 다섯 바퀴씩 돌고 있는 이안은 뻗어버린 엘레노어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제인도 어딘지 드물게 정색을 하고 입을 다물고 서있었고, 브루노는 도널드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징징거렸다. 그게 도널드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다는 이엘리야가 도널드를 살살 꼬셔서 다른 길로 졸졸 손잡고 사라졌을까 봐서였다.

지젤의 침실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은 이안이 다리를 꼰 채로 발을 까딱였다. 자정이 좀 넘은 어두운 복도에 촛불도 없이 버티고 서있던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복도 저 끝에서부터 그와 마찬가지로 촛불도 없이 걸어오는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말 외에는 떠오르는 문장이 딱히 없는데.”

다이한이 복도 끝에서부터 걸어오며 덤덤하게 하는 말에 이안은 고개를 까딱였다.

“이 밤중에 남의 침실 앞은 왜 알짱거리지?”

“내가 할 말을.”

다이한이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며 이안을 내려다봤다.

“황태자가 후작 부인 침실 앞에서 뭘 하는 걸까.”

“정신 나간 놈이 내 어여쁜 정인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지금처럼.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오는 못 배워먹은 놈이라. 이안이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목을 긁는 목소리로 씨근덕거렸다.

“이렇게 유난 떨면 떠나는 날 얼굴 보기 민망할 텐데, 얼굴이 두꺼워 상관없는 건가.”

즉위식이 정말 코앞이니, 황태자는 이제 정말 가야 했다. 아무리 버텨봤자 가면무도회가 끝나면 이안은 떠나야 했다. 다이한이 당연하게 그가 떠난다는 전제를 두고 한 얘기에 이안이 숨을 들이마셨다.

“우리 황녀님이 제 성질 다 못 부리고 드러누웠다던데.”

협박이 전혀 안 통해서 아주 분해 죽을 지경인 것 같더라고. 이안이 남의 일인 것처럼 덤덤하게 말을 하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와 또 이엘리야를 죽이려 하다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젤을 사랑한다면 용서를 빌고, 또 빌어야 하지 않나.

“미움받는 게 두렵지도 않은가?”

다이한은 차마 아니라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증으로라도 얽혀서 놓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지체 없이 그렇게 할 것이었다.

“우리 사이는 네가 끼어들 수 없어.”

네가 하는 사랑 놀음보다 더 어둡고, 짙고, 아파서. 그건 자의로 떨쳐낼 수가 없거든. 다이한의 연녹색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젤이 어떤 마음으로 내 곁에 남아있는지 너 따윈 감히 상상도 못 할 테니.”

다이한이 혐오스러워하는 이안을 보며 비소를 머금었다. 둘은 그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끔찍했고 악몽이었다. 다이한은 그대로 이안을 지나쳐 본인의 침실로 돌아갔고 이안은 석상처럼 굳어 앉아서 그 자리를 지켰다.

“어떤 마음으로 남아있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그걸 안다고? 침실 안쪽 문에 기대 서있던 지젤은 오늘 여러모로 쥐새끼처럼 엿듣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마음속 응어리에 이어진 도화선에 조용히 불이 붙었다.

***

평소처럼 서재에 앉아서 차를 나눠 마시면서 지젤은 일찍이 독서를 포기했다. 글씨가 눈에 안 들어와서 의미가 없었다. 다이한이 그런 지젤을 바라보다가 찻잔을 들고 고개를 돌렸다.

“오늘 어린아이들 몇 명 데리고, 왕자님 뵈러 가기로 했어요. 적적하고 우울하실까 봐요.”

“황국에서의 즉위식이 끝난 뒤, 조나단 님 즉위식을 할 것이니 알아둬.”

양위를 앞둔 황제가 황태자의 즉위식이 끝난 뒤에 하라며 날짜까지 정해줬다. 그 전까지는 지금처럼 후작을 중점으로 움직이게 될 것 같았다. 다이한의 말에 지젤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떠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늦어지네요. 아무래도 왕비님께서 살아계시니 일이 더 복잡하기는 하네요.”

다이한은 지젤의 말에 대답 없이 서신들을 살폈다. 지젤은 그런 그를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모처럼 하룻밤 자고 오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지젤의 외박 선언에 다이한이 손에 든 종이를 조용히 내려놓고는 고개를 돌렸다. 지젤의 얼굴을 훑어보는 그의 표정이 무표정했다. 지젤이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깜빡거렸다.

“요 근래 제가 정신이 없어서 소홀했더니, 조나단 님께서 많이 서운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다이한은 지젤의 말을 듣고도 잠시 동안 대답이 없다가 이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서신을 두어 장 들고 살피기 시작했다. 지젤은 그런 다이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는 어제 내가 여기 남아있는 마음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어. 그게 무슨 뜻이야. 속내를 읽기 힘든 연녹색 눈이 그녀의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후작님.”

지젤이 다이한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이한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게 한참 파란색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을 보기만 하던 그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게 손을 잡아달라는 뜻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챈 그는 잠시 주저했다. 그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지젤이 그런 다이한의 반응에 손을 물리려고 하자, 그가 주저 없이 덥석 그걸 잡아 쥐었다. 자신의 손이 투박하고 커다란 손에 꽉 붙잡힌 걸 내려다본 지젤이 입을 열었다.

“혹시 저한테 하실 말씀 없나요?”

뭐든. 그냥 후작의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어서 한 질문이었다. 지젤이 다이한의 표정 없는 얼굴을 계속 살피며 뭔가를 보려고 애썼다. 내가 손을 내밀면 순순히 잡는 이유라든가. 날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면-. 사실은 내가 기억을 잃지 않은 걸 알고 있다든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네 옆에 있는지 안다고 자만하는 이유가 뭘까.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지난 5년은 뭐였을까. 속죄? 기만? 우스웠나?

“없어.”

짧게 대답한 다이한이 지젤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아릴 정도로 잡힌 손을 보면서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절박함. 지젤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꿀꺽 삼켜내고 눈을 감았다.

***

아이들이 까르륵까르륵 떠들며 노는 소리를 들으며 지젤은 의자에 기대앉았다. 귀부인들이 곧 왕이 될 조나단의 친구를 만들어주겠다며, 본인 자녀들뿐만 아니라 친척까지 불러 모아 와서 응접실이 소란스러웠다. 지젤이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얕게 한숨을 토해냈다. 왜 여태 한 번도 오지 않았냐고 큰소리치는 조나단을 달래느라 진이 빠졌다.

“많이 피곤한가요?”

공작 부인 리안나가 묻는 말에 지젤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귀부인 중 한 명이 지젤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리안나를 거들었다.

“후작 부인께서 피곤하고 답답하신 모양인데, 정원으로 나갈 걸 그랬나요?”

“2층 응접실에서 내려다보는 가을 풍경이 예뻐서 올라왔는데, 괜히 그랬나 싶어요.”

“아니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지젤이 과하게 자신에게 달라붙는 귀부인들을 향해 적당히 미소 지었다. 엘로이 백작 부인은 이쪽을 힐끔 살피기만 할 뿐 평소와 다르게 말이 없었고, 지젤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저 여자 아니어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한데, 왜 저럴까. 다이한이 내가 기억을 잃은 척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면. 왜 속아줬을까.

“만지지 마! 내 새야!”

심란한 와중에 조나단이 빽! 소리 지르는 걸 들은 지젤이 휙 고개를 돌렸다. 새. 이안이 선물해줬다는 그 카나리아를 구경하려다 아이들끼리 싸움이라도 난 것 같았다.

삐이익! 삐익-!

아이들 손에 짓눌린 새가 비명을 지르며 파닥였다. 남자아이 하나와 조나단이 새를 중간에 두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시종 중에 하나가 말려보고자 했지만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었다. 조나단은 아이와 시종이 새를 제 손에서 빼앗아갈까 힘줘 당기고, 상대 아이는 새가 날아갈까 당황한 듯 양손으로 움켜쥐려 했다. 하얀 깃털을 가진 카나리아는 그 상황 속에서 본능적으로 날기 위해 날개를 퍼덕이며 바둥거렸다.

삐익! 삐이-익!

기어코 날개가 부러졌는지 새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지젤의 인내심도 그대로 찢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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