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휙!
화살 하나가 다이한의 관자놀이 바로 옆을 지나 벽에 박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섬뜩할 법도 한데, 후작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걸 보면서 엘레노어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쓰리고 아픈 위장보다 머리를 뒤덮은 분노가 더 컸다.
“걔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말이지. 맹세하는데, 나는 후작 부인을 산 채로 곱게 다져서, 네 눈앞에서 개밥으로 던져줄 거야.”
엘레노어에게는 모든 문제의 중심인 후작 부인보다 이엘리야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정에 약한 사람은 아니지만, 제인에게 말했다시피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지젤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이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걸 빠르게 눈치챈 엘레노어가 눈썹을 까딱였다. 뭐가 어찌 되었든, 저 꼬인 놈의 약점은 결국 후작 부인이었다.
“기억 못 한다고 백치같이 앉아있는 후작 부인에게 가서 5년 전의 진실을 폭로하는 건 귀찮을 뿐,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아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누굴 죽이려 하는지 한마디만 해도. 엘레노어가 여전히 무표정한 다이한을 향해 이죽거렸다.
“지금은 나란히 앉아서 차라도 마시지만, 과연 모든 걸 다 듣고도 후작 부인이 네 옆에 있을까?”
엘레노어는 저번처럼 다이한의 가면이 깨지고 추악한 내면이 표정으로 드러나길 기다렸다. 이엘리야가 살아있다는 걸 알렸을 때처럼 무너지길 원했다. 그러나 다이한의 입가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하.”
“웃어?”
다이한이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기묘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고는 엘레노어를 바라봤다. 가소롭다는 듯 황녀를 바라보던 다이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제 약점이라도 되는 줄 아셨습니까?”
그걸 본 엘레노어는 복부가 찢어지는 통증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이쯤 되니, 원인이 스트레스인 게 분명했다. 제인은 답지 않게 비틀거리는 엘레노어의 상태를 확인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황국에 알아보니, 황태자는 즉위식 앞두고 정치에 관심도 없고. 황녀는 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고 술렁이던데.”
황태자 남매의 입지를 흔드는 건 복잡할 뿐 어려운 일 아니었다. 지금처럼 황태자가 한눈팔고 있다면 더욱.
“와중에 황국에 협조적인 저를 괴롭히겠다 선언하시는 겁니까.”
이유가 뭘까. 호사가들이 참으로 재밌어할 이야기라며, 다이한이 숨을 들이마셨다.
“조심하심이 좋으실 텐데. 소란 만드시면 욕심 많은 작은아버지께서 금방 치고 올라오실 테니. 게다가 저는 제가 대체 누굴 죽이려고 한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이한이 능숙하게 발뺌을 하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엘레노어 님.”
제인이 통증이 꽤 심한지, 이 악물고 버티고 선 엘레노어를 나직하게 불렀다. 그걸 본 다이한이 황녀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하게 흥분하신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얘기하시죠.”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제인은 후작에 대한 분노를 되새긴 엘레노어를 부축해서 뒤돌아섰다. 그리고 둘은 문 바로 옆에 기대서 있는 지젤을 발견했다. 소리 없이 조용히 서있던 지젤은 황녀와 황국 기사단장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그런 지젤을 보며 무언가 이야기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고, 제인도 못 본 척 그녀를 지나쳐갔다.
엘레노어의 협박을 맞받아친 다이한의 비웃음을 곱씹은 지젤은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였다. 누굴 죽이려 한다는 건지는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걸 눈치챈 지젤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다 알아도 못 떠날 것이라 자만하는 건가.”
아니면, 애초에-. 지젤은 석연치 않았던 후작의 행동들을 한 번씩 더 되새기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
엘레노어가 침대에 드러눕자, 기사들은 화병이라 생각했지만 제인의 생각은 좀 달랐다. 화내고 윽박지르는 게 삶인 황녀가 이 정도에 뻗을 리 없었다. 이엘리야를 쫓는 기사들을 더 충원시키고 그녀는 주방으로 향했다. 이엘리야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녀는 똑똑한 사람이니 생각 없이 황궁을 벗어나지는 않았으리라 믿음을 가졌다.
의원은 스트레스로 인한 통증이라 결론 내렸지만, 그녀는 찝찝했다. 오늘 황녀의 식단에서 평소와 달랐던 거라면, 아침에 먹은 차밖에 없었다. 제인은 자정이 좀 넘은 시각, 주방에 들어서며 새벽에 미아가 만지작거렸던 찻잎 통을 들었다.
“차를 잘 모르기는 하지만.”
티타임을 즐기는 취미가 없는 제인이 킁킁거렸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망설임 없이 통 안에 손을 넣고 한 줌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홍차 특유의 떫음과 향긋함이 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냥 홍차네. 그렇게 생각하고 통의 뚜껑을 닫던 제인은 알싸하고 씁쓸한 뒷맛을 느끼고 몸을 굳혔다. 잎을 머금었던 입 안의 감각이 둔해지고 혀가 아릿했다.
“이거-”
“여기서 뭐 하세요?”
차는 잘 모르지만, 독에 대해서는 좀 아는 제인의 얼굴이 구겨짐과 동시에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젤 님.”
“늦은 시간에, 차라도 한잔하시게요?”
지젤이 싱긋 웃으며 제인에게 묻는데, 제인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제인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병든 병아리처럼 골골대는 이유가 이거였다니. 이걸 아침마다 후작하고 나눠 마셨다고? 제인은 순진한 얼굴로 잠옷을 입고 서있는 지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지젤 님, 이건.”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끼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엘레노어가 오늘 하루 종일 괴로워했던 것과 지젤이 항상 식사를 제대로 못 하고 남기는 걸 떠올린 제인이 기가 찬다는 듯 숨을 토해냈다.
“역시, 제인 경이시네요.”
지젤이 씁쓸하게 웃으며 칭찬으로 그녀를 추켜세웠다. 제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든 걸 보면서 지젤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여자였다. 비앙카였다면 적당히 다른 홍차를 내줬을 텐데, 미아는 달라는 대로 똑같은 차를 내준 모양이었다. 엘레노어가 아파서 의원을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젤은 주방을 지키고 서있어야 했다. 혹시나 누가 찻잎을 의심할까 봐.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비밀로 해주세요.”
“어떻게 하시려고 이럽니까.”
소량 섭취했을 뿐인데도 혀의 움직임이 굳어 드는 게 느껴질 정도로 독한 독초였다. 물론, 물에 타서 희석해 먹으면 이 정도는 아니겠지만. 몸에 축적되는 게 분명했다.
“황태자, 황국에 데려가셔야 하잖아요.”
“그건.”
“저는 황국에 갈 생각이 없고, 이안은 황국에 가야 하잖아요.”
“죽으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지젤은 제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후작과는 다르게 중화시키는 해독제를 매일 섭취했으니, 아마 후작보다는 오래 살지도 몰랐다. 죽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지만, 일이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서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안과 다시 재회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젤 님, 이런 식으로 끝내실 일이 아닙니다. 이거 계속 마시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감추거나, 변명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할게요.”
지젤은 그 누구에게도 이런 식의 방법이 정당하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 번만 모르는 척해주세요.”
“지젤 님, 차라리 같이 황국으로 가시죠. 이건-, 이건 너무.”
제인이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는데 지젤은 옅게 미소 지었다.
“이기적인 거 알지만, 난 이안한테 모질게 꺼지라 할 수가 없어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인 걸 알아서,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아요. 걔는 책임감도 강하고 마음도 여려서, 이런 걸 알게 되면 더 안 가려고 할 거예요.”
누가요? 누가 마음이 여려요? 당신 속고 있는 거야. 당황한 제인이 지젤을 설득하기 위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엘리야가 살아있다고 얘기하자. 황녀님께는 몇 대 맞으면 되니까. 근데, 그럼 이안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럼 지금 황태자 깨워서 지젤에게 얘기하라고 소리치면.
“제인.”
지젤이 복잡한 심정을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그녀를 불렀다.
“황국으로 가시죠. 입궁하지 않으셔도 방법이 있을 겁니다. 황태자 저하 좀 설득하셔서 일단, 즉위식 지나고 결혼시키시고-”
“제가 황국으로 가면 일이 더 엉망으로 될 거라는 걸, 존재만으로도 이안에게 큰 흠이 될 거라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이안의 성격을 아시잖아요. 제인은 문득, 자신이 엘레노어에게 인간성이 부족하다 비난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저 불임이에요.”
지젤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중얼거린 말에 제인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녀는 정말로 이제 다시는 엘레노어에게 양심을 운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젤은 제인이 그렇게 조용히 찻잎이 든 통을 제자리로 돌려 놓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지젤이 웃는 걸 보면서, 제인은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제인이 그녀의 감사 인사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제인은 지젤을 마주하고 있는 게 창피해서 차마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
로브를 쓴 이엘리야는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며 품 안에 든 은화를 얼추 계산해봤다. 황국에서 넘어오는 길에 가진 돈의 절반을 미리 은화로 바꿔왔다. 그녀는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금화를 여기저기 뿌려대며 자신의 위치를 밝힐 생각이 없었다.
“이봐! 도널드! 왔으면 이것 좀 거들어!”
“예-.”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무거운 상자를 이리저리 나르는데, 자연스럽게 합류한 그녀가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뭐 이리 많아요? 아-, 괜히 한다고 했네.”
“무슨 소리야? 왕궁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물자는 우리 상단에서 넣으니 이 정도 물량은 당연하지. 자네, 어디서 왔다고 했더라?”
“아벨린에서요.”
당당하게 고향을 밝힌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