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최대한 조용하게 여기서 처리하고 간다.”
한센이 낡고 오래된 여관 2층에 올라서며 하는 말에 기사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가 영지 외곽부터 이 잡듯 뒤집어 겨우 찾아냈다. 여관 주인의 말에 의하면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가 홀로 와서 금화로 계산했다고 한다. 이엘리야가 분명하다는 확신에 한센은 손을 까딱였다. 그의 손짓에 기사 여섯 명이 빠르게 움직였다.
쾅-!
나무문을 발로 걷어차고 방으로 들어간 한센과 기사들이 침대에서 자고 있던 여자를 끌어 내렸다.
“꺄아!”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붉은색인 긴 머리를 보면서 한센은 얼굴을 구겼다. 이렇게 눈으로 보니 5년 전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게 실감이 되었다. 후작이 한심하다 욕을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기사 두 명이 붙어서 여자의 사지를 바닥에 짓눌러 고정시키고 입을 틀어막았다. 난데없이 습격당한 여자가 바둥거렸지만, 입을 막고 있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개인적인 원한은 없습니다.”
한센이 되도 않은 말을 그럴듯하게 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여자의 상반신을 누르고 있던 남자가 단검을 꺼내 들었다.
“사, 살려주세요!”
“이엘리야 님!”
순간, 도널드가 야생 곰처럼 포효하며 방 안에 난입했다. 도널드는 기사들에게 깔려있는 이엘리야를 발견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잘하는 일을 하기 위해 허리춤의 검을 뽑아냈다. 어딘지 맹하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무슨-”
한센이 본능적으로 비켜서는데, 오른손에 장검을 쥔 도널드는 그보다 빨랐다. 날카로운 검날이 단숨에 한센의 오른팔을 베어냈다.
“한센 님!”
한센이 주춤거리며 흐트러지는 사이, 다른 기사가 도널드에게 달려들었다. 도널드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바로 몸을 돌려 팔을 휘둘렀다. 너무 빨라서, 그걸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당한 기사가 피가 울컥 흐르는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잡아!”
척 봐도 보통이 아닌 놈이었다. 이엘리야를 붙잡고 있던 기사들도 도널드에게 달려들었다. 도널드는 당황하거나 주춤하는 기색도 없이 날아들어 오는 검을 받아쳐 냈다. 챙- 쇠붙이끼리 부딪쳐 나는 기이하게 맑은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수적으로 불리하다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도널드는 기세에서조차 밀리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기가 죽은 기사들이 주춤거렸다.
“여자부터 죽여!”
마음이 급해진 기사 중 하나가 소리쳤다. 우드득, 가볍게 목을 푼 도널드가 몸을 낮추고 눈을 희번덕였다.
“어딜.”
도널드의 검이 방금 소리친 기사의 왼쪽 어깨부터 얼굴까지 그어냈다. 기사가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는데, 도널드는 차분하게 한센을 주시했다. 여기서 제일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인 것 같았지만, 오른팔에 상처를 입혔으니 생각보다 할 만할지도 몰랐다. 다수를 상대할 때는 정확하게 급소를 베어내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발목을 끊어야 했다. 괜히 휘말려서 검을 깊게 집어넣으면, 그다음이 난처해진다. 빨리 끝내야겠네.
자만이 아니라 제인 밑에서 구르다 보면 여섯 명 정도야, 혼자 가볍게 상대할 수 있었다. 단시간에 끝내고 이엘리야를 데리고 가야 했기 때문에 도널드는 신속하게 발을 움직였다. 몸을 낮춰 이엘리야 쪽으로 향하며, 또 한 명의 무릎 안쪽을 끊어낸 그가 숨을 가다듬었다. 세 명.
“윽!”
빠른 속도로 검을 맞받아치며 힘으로 밀어내는 도널드를 본 한센은 다급해졌다. 한센이 단검을 잡고 도널드보다 더 빠르게 여자에게 달려들자, 도널드의 얼굴에 낭패가 스쳤다. 동시에 기사 한 명이 도널드에게 달려들었다. 그걸 검으로 받아내며 도널드가 급하게 소리쳤다.
“이엘리야 님!”
“엎드려!”
와장창-!
2층 창문을 깨고 굴러들어온 비앙카가 한센을 발로 걷어찼다. 꽤 큰 타격음과 함께 한센이 벽에 처박혔다. 머리를 세게 처박은 한센은 어이없게도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창문으로 요란하게 뛰어든 붉은 단발머리의 얼굴을 확인한 도널드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끔뻑였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비앙카?”
비앙카가 슬쩍 도널드를 살피고는 바닥에 움츠리고 있는 여자를 가볍게 들쳐 멨다. 그러고는 도널드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수고해.”
개싸움은 체질이 아니라. 덤덤하게 중얼거린 비앙카는 피가 잔뜩 튄 얼굴로 시골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도널드를 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응?”
도널드는 비앙카의 차림새가 살짝 가슴이 드러나는 베이지색 셔츠인 걸 확인하고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가슴이- 평평하네. 꼭 나처럼. 도널드가 비앙카의 가슴을 한 번, 자신의 가슴을 한 번 내려다보고 가만 서있다가 뭔가 깨닫고 입을 떡 벌렸다.
“너-!”
도널드가 놀라서 소리치는데, 남은 기사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걸 받아치면서도 도널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렇게 하녀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으니까, 좀 예쁘장할 뿐 남자라는 티가 확 났다. 그래서? 그래서! 옷도 헐렁헐렁하게 입고 다니고! 목소리도 보통 여자들보다 좀 굵직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여서!
“너!”
비앙카는 그런 도널드에게는 더 이상 눈길 주지 않고, 여자를 잘 안아 들고 훌쩍 2층 창문 밖을 뛰어내렸다.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1층에 착지한 비앙카가 숲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머리도 붉은색이고, 눈도 파란색이기는 하지만 안 닮은 것 같은데.
“그래서 당신이 여동생이라고?”
비앙카가 자신의 어깨를 꼭 붙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저 위에 모인 조합을 보면, 황태자도 후작도 네가 살아있다는 걸 안다는 건데.
“다들 유독 그 여자한테만 잔인하지.”
그렇게 대우해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 비앙카는 쉽게 지젤을 떠날 수가 없었다. 비앙카가 깊게 한숨을 쉼과 동시에 툭- 바닥에 붉은 뭉치가 떨어졌다. 정확하게는 여자의 머리에 얹어져 있던 붉은색 가발이 떨어졌다. 그걸 본 비앙카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그냥 부탁받은 거예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먹고살기 힘들어서 하겠다고 한 거지 수배된 줄 몰랐어요!”
금화를 많이 주기는 했지만, 험한 일은 아니라고 했는데-. 푸른 눈의 금발 여자가 서러움에 울음을 터트렸다. 그걸 보면서 비앙카는 이엘리야와 지젤이 자매는 맞구나 싶어졌다. 당했네.
***
오늘 왜 이러지? 엘레노어는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지끈거려서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이를 악물었다. 생전 이렇게 아픈 적이 없었는데, 숨 쉬는 게 힘들 정도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제인이 그런 엘레노어의 등을 토닥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신 게 아닐까요?”
“의원이든, 신관이든 빨리 데려와.”
엘레노어가 웩-. 아침 먹은 걸 다 게워낼 듯 구역질을 했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위장이 뒤집어지는 걸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염병할 왕국. 거지 같은 후작. 멍청한 동생.
“아무래도 황국에서 항상 드시던 음식들이 아니라 그런가 봅니다.”
“그럼, 멍청하게 같은 말을 두 번 반복시키는 하녀들이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내겠어?”
언제는 음식 멀쩡하다고 유난 떨지 말라고 이안을 면박 줬던 엘레노어가 으르렁거리며 제인에게 화를 냈다.
“제가 주방을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제인이 주방을 다 뒤져서 쥐라도 나오면, 그걸 후작의 음식에 썰어 넣겠다고 장담했다. 반은 엘레노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농담이었고, 반은 진심이었다.
“엘레노어 님!”
우당탕. 브루노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급하게 들어오다가 굴러 넘어지는 걸 보면서 엘레노어는 눈을 감았다. 내 스트레스의 원인? 너무 많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이 멍청한-”
제인이 엘레노어 대신 브루노에게 화를 내는데, 브루노가 다급하게 무릎으로 기어서 엘레노어의 앞으로 가며 소리쳤다.
“후작의 기사들이 이엘리야 님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뭐?”
“도널드가 기사들 뒤를 따르기는 했지만, 상황이 긴박합니다. 후작이 이엘리야 님을 처리하려는 것 같습니다.”
의아한 듯 되물었던 엘레노어의 표정이 삽시간에 흉흉하게 변하는 걸 보며, 제인은 몸을 움츠렸다. 오늘 아마 황녀가 후작 얼굴에 토할 것 같았다.
***
집무실에 앉아있던 다이한은 노크 없이 문이 열리는 걸 보며, 당연히 지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젤이 아닌 엘레노어가 들어서는 걸 보며 그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한숨?”
활을 든 엘레노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고는 제인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제인이 화살이 가득 든 화살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황가의 인장이 새겨진 금화살 하나를 집어 든 엘레노어가 분노를 좀 삭여보려는 듯 오른 눈썹을 긁적이며 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 그녀는 능숙하게 활에 화살을 끼워내고 이를 아득 물었다.
“이 미친 새끼가.”
휙-!
순식간에, 다이한의 양손이 올려진 책상 위로 화살이 박혀 들었다. 다이한은 대뜸 와서 화살을 쏘고 있는 황녀가 미친년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그러는 황녀께서는 본인이 멀쩡하시다 자부하십니까.”
다이한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숨을 내뱉었다.
“제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의 덤덤한 비아냥거림에 엘레노어는 화살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곱게 말로만 하니 못 알아듣는 놈, 어디 한 군데 바람구멍 뚫리면 꼬리를 내리겠지.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인 줄 모르고 실언한 건 내 인정하지.”
후작이 이엘리야를 위협한다? 엘레노어는 안일하게도 그렇게까지는 생각 못 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보기에 후작은 이안처럼 지젤을 사랑했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니까 이안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니까.
“내가 너무 상식의 범주 안에서 생각을 해서.”
엘레노어는 지금 후작을 죽여버리면 뒷일이 얼마나 엉망이 될지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 예뻐하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그러지 않을 거라 판단한 건 내 실수지.”
다이한은 그녀의 오류를 정정해주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지젤은 다이한을 위해서 이 저택에 존재했다. 다이한이 아무리 지젤을 위해 행동해도, 그건 지젤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모든 건 다 다이한, 스스로를 위한 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