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88)화 (88/135)

88.

지젤은 이안의 경고보다도, 사랑한다 고백해달라는 데 놀라서 숨을 헐떡였다. 덫에 걸린 토끼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지젤을 보면서, 이안의 기분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침묵이 깬 건 결국 이안이었다. 왜 이렇게 나를 불안하게 해.

“지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지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5년 전 결혼식 날 했던 것처럼, 거짓된 말을 꾸며서 이안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뼈에 사무치는 자괴감과 자책을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거울 보고 스스로를 원망하는 짓은 그만하고 싶었다. 근데, 내가 뭐라고 너한테 사랑을 고백한단 말이야. 그녀는 그럴 염치가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이안이 한숨 쉬며 말을 뱉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젤은 그가 자신을 지나쳐 나가버리길 원했다. 차라리 이대로 지긋지긋하다고 답답해서 더는 못하겠다고 등 돌려 떠나면 좋겠다는 이기심이 자라났다. 그럼 고고하게 턱을 치켜세우고 이안의 선택을 존중하는 척할 수 있었다. 근데 또 한편에서는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 번이라도 더 얼굴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이제 가면, 정말로 다시는 못 볼 테니까.

“그래.”

무겁게 닫혀있던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별것도 아닌 말이 지젤의 명치에 꽂혔다. 이안은 지젤의 동그랑 뒤통수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잘못하면 지젤을 붙잡고 소리 지를 것 같았다. 속에서 괴성을 지르며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한마디 해주는 게, 그게 어려운 일인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버티고 있는데. 그 한마디 해주고 먼저 손 뻗어 끌어안는 게, 그게 어렵냐고.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야? 여기 조금만 더 있으면 날카롭게 갈린 교활한 혀가 그녀를 상처 줄 것 같았다.

훌쩍.

본인이 지나치게 감정적인 걸 인정하고 날 밝으면 다시 얘기하자고 하려던 이안은 휙 몸을 돌렸다. 작은 소리에 화들짝 놀란 이안이 성큼 지젤에게 다가섰다.

“울어?”

아니, 안 울어. 그렇게 대답하려던 지젤의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모르는 척 그냥 나가지.

푸른 눈에서 뚝뚝 떨어진 눈물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이안이 자신에게 질렸다고 울기나 하는 본인이 추하다 못해 흉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주제에 어린애처럼 울기나 하니 얼마나 꼴이 보기가 싫을까. 왜 이안의 앞에만 서면 이렇게 사춘기 애처럼 굴게 될까.

“지젤.”

이안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지젤의 양 뺨을 꽉 잡고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지젤의 파란 눈에서 뚝뚝 떨어져 흐르는 눈물을 바라봤다. 뜨뜻미지근한 눈물이 이안의 손에 의해 살짝 눌린 지젤의 뺨을 타고 그의 손을 적셨다.

“놔.”

겨우 한마디 내뱉고 이안의 손을 떼어내려 했으나, 힘에 밀려 뜻대로 하지 못한 지젤의 숨이 더 거칠어졌다. 우는 게 분하고, 서러운지 이를 악물고 끅끅거리는 지젤을 보며 이안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지젤의 얼굴을 보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울컥했는지 지젤이 더 비통하게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넌 이 세상 제일가는 고집쟁이야.”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작게 저은 이안이 엄지로 꾹꾹 그녀의 눈가를 훔치며 속삭였다. 짓궂지만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근데 어쩌겠어. 네 이상한 아집마저도 난 좋아해.”

이안의 부드러운 손길이 이끄는 대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지젤은 더는 울지 않기 위해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눈물샘은 멈추지 않았고 삽시간에 이안의 옷은 축축이 젖어 들었다. 이쯤 되니 왜 우는지도 정확하게 정의하기 힘들었다.

“우리 울보.”

그녀를 꼭 끌어안은 이안이 다시 생각해도 웃긴지 대놓고 놀렸다. 지젤은 방금까지는 굳은 얼굴로 정색을 하다가 실실 웃고 있는 줏대 없는 이안을 노려봤다. 이게 이런 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지젤이 할 말을 찾기 위해 입을 삐죽이자 이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울려서 미안해, 불안해서.”

그래서 그냥 네 입으로 기다려달라고 말해주길 원했어. 말을 마친 그가 지젤의 이마에 입술을 문지르며 숨을 들이마셨다.

“우는 것도 예뻐서 큰일이네.”

겨우 이런 일로 놀라서 끙끙거리니,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이안처럼 사랑하는 사람한테 미움받는 걸 무서워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지젤은 자신을 사랑했다. 이상하지만 그럴듯한 결론을 내린 이안은 지젤의 얼굴 여기저기 입 맞추며, 점점 퉁퉁 부어오르는 그녀를 놀리느라 밤을 새워야 했다.

***

한센은 이쯤 되니 황국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황궁에서 들어온 소식통에 의하면 몇 년 전부터 황녀가 붉은 머리 여자를 데리고 다녔는데, 얼마 전 갑자기 도망쳤다고 했다. 정말로 남작의 딸이 살아있는 거라면 일이 다 꼬였다.

“이건 진짜 큰일이야.”

잘못하면 5년 전 사건이 완전히 드러나게 생겼다. 이제 정말로 완벽하게 왕궁을 손에 쥐셨는데, 그가 자신의 주군을 떠올리고는 굳게 결심했다.

“이렇게 되면 일단 황국으로 간다.”

이건 무조건 막아야 했다. 후작 부인은 이제 후작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예전에야 어리숙했지만, 지금은 사교계를 꽉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더는 예전처럼 묶어놓고 억압해서 휘두를 수도 없었다. 다행스럽게 아무것도 기억 못 해서 평화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망칠 수는 없었다. 빠르게 해결해야 했다. 국경을 향해 숲을 가로질러 가던 한센과 기사들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길의 반대편에서 노인 한 명이 곡물이 가득한 큰 마차를 끌고 오느라 길 전체를 막아서고 있었다. 기사 중에 한 명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차를 향해 걸어가 마부에게 손짓했다.

“아니, 후작가 기사님들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말 좀 묻지. 혹시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여자를 못 봤나?”

“가만 보자-. 붉은 머리 여자라면. 오늘 새벽에 수도까지 태워다준 애 같은데.”

백발의 노인이 이마를 긁적이며 하는 말에 한센이 눈을 크게 뜨고 추궁했다.

“뭐라고? 언제쯤 지나갔다고?”

“로브 뒤집어쓴 젊은 여자가 태워다 줄 수 있냐고 묻길래, 가는 길이라 그러겠노라 했었죠. 고마움의 표시였는지, 마차에 금화 몇 개 두고 가서 기억합니다.”

노인이 천천히 품을 뒤적이며 금화를 하나 꺼내 보였다. 금화에 박힌 황가의 인장을 확인한 한센이 고함을 질렀다.

“정확하게 어디에 내려줬는가!”

“다니엘 후작님의 영지에 내려줬습니다.”

“어디로 간다고는 말 안 하고?”

“후작가로 간다고 하던 것 같은데, 자세히는 안 물어봤지 뭡니까. 아이고, 제가 수배범을 태워 나른 건가요?”

노인이 놀라서 파르르 손을 떨며 묻는 걸 무시한 한센이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동선을 보면 언니인 후작 부인을 만나러 가는 게 분명했다.

“영지로 돌아가서 샅샅이 뒤진다! 절대 저택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해!”

비앙카는 후작가의 기사들이 헐레벌떡 영지로 달리는 걸 보면서 잠깐 고민했다. 저 단순한 인간들을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저 수상한 마차 안을 뒤져야 하나. 잠깐 고민하던 비앙카는 지젤이 원한 게 한센의 목적이라는 걸 상기시키고 그들을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일단 뭘 찾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불쌍한 이엘리야 님!”

이엘리야의 꼬리가 잡혔다고 생각한 부르노가 절규하며 후작가의 기사를 쫓아 달리자, 도널드가 놀라서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 만류했다.

“브루노! 일단 단장님께 알려야 해. 저택으로 가봐.”

“그럼 넌?”

브루노가 사뭇 진지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도널드에게 묻자 그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들이 엘 님을 잡아내면 내가 바로 구출한다.”

기사도에 충실한 말을 들은 비앙카는 잠깐 힘이 빠져서 나무에 기대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뒤를 쫓던 거 아닌가? 저러면 나한테 들킨다는 생각을 못 하나? 아무래도 황국 기사단들 상태가 지능을 보고 뽑는 건 아닌 것 같았다.

***

해도 뜨기 전, 새벽부터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한 미아는 길게 하품했다. 집에 일이 생겨 급하게 떠났다던 비앙카는 3일째 돌아오지 않았다. 아예 안 들어오면 그 나름대로 괜찮았지만, 그래도 다정하고 연약한 지젤 님이 섭섭해하실 테니 적당할 때엔 돌아와야 했다. 그러고 보니 몇 살이더라? 가족관계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여튼, 정 없는 애라니까.”

“누가?”

퍼뜩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미아가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걸 잽싸게 잡아낸 제인이 미아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이 기사님이 말을 걸었나 싶었던 미아는 곧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은 그 뒤의 엘레노어라는 걸 깨달았다.

“아, 그- 황녀님.”

정확한 예법을 몰라서 우물쭈물하는 미아를 본 제인이 작게 속삭였다.

“적당히 허리 숙이시면 됩니다.”

“네, 네!”

꾸벅 각이 설 정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는 미아를 보며 엘레노어는 고개를 까딱였다. 너무 침대에 늘어져 쉬기만 해서 이젠 잠도 안 왔다. 진짜 황궁 가야 하는데 멍청이 동생을 보면 아직 먼 것 같았다.

“여기.”

제인이 친절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밀자 그걸 받아 든 미아가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아, 감사합니다.”

근데, 이 사람들이 우리 지젤 님 뒷조사하는 사람들 아닌가? 왜 새벽부터 주방에 온 거지. 미아의 찝찝해하는 태도와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피딱지를 확인한 제인도 한쪽 눈을 찡그렸다. 손의 상처 봐라, 범상치 않은데.

“차? 새벽부터 부부가 나란히 앉아서 차를 마시나? 단란하네.”

“아, 네. 이제 서재에 올려다 드리려구요.”

“무슨 홍차지? 헌데, 저거 저렇게 오래 열어두면 향이 다 날아갈 텐데.”

되게 독특한 향이네. 엘레노어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하는 말에 미아는 열어뒀던 찻잎 통을 급하게 닫았다. 황녀가 주방에 내려와서 왜 이런 지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곤란했다.

“원래 제가 하는 게 아니라, 잘 몰라서-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일은 아니지.”

잎을 취향대로 블렌딩한 건가? 잠깐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미아에게 손을 까딱였다.

“나도 한 잔 주지.”

“네?”

살짝 멍청한 하녀인 건가? 황궁이었다면 말귀도 못 알아듣냐고 한마디 했겠지만, 그래도 남의 집에서 그럴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참았다. 양심의 문제라기보다는 교양의 문제였다. 엘레노어가 찻잔을 눈짓하며 재차 같은 말을 반복했다.

“후작 부부가 마시는 차, 나도 달라고.”

“아, 네. 가져다드릴게요.”

미아는 엘레노어의 말에 순순히 찻잔 하나를 더 꺼냈다. 손님에게, 그것도 황녀에게 차 한잔 더 내어주는 건 큰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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