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87)화 (87/135)

87.

“제가 그 소문 듣고 충격받아서 끼니를 걸렀습니다.”

엘로이 백작가에서부터 흘러나온 말 같던데. 입 안의 혀처럼 간사하게 구는 자작을 보며 지젤이 냉담하게 대답했다.

“소문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어. 황태자가 떠나면 일 시작할 거니까.”

“우리 후작 부인께서 소문에 대해 부정 안 하시는 걸 보니.”

테오가 원래도 짙은 쌍꺼풀이 더 진해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삐죽였다.

“진짠가 본데. 저 서운합니다? 후작님 다음은 저 아니었나요. 이럼 세 번째로 밀리는데.”

세 번째라니, 날 무슨 희대의 바람둥이쯤으로 보나. 지젤은 테오가 이러는 이유가 정말로 자신에게 어떤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테오는 명확하게 돈을 쫓는 사람이었고, 이런 식으로 말을 해서 사람을 현혹시키는 남자였다. 그게 매우 능숙해서, 그래서 선택한 남자였다. 그러니, 이런 말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지젤의 정색에 어깨를 으쓱인 그가 화제를 돌렸다.

“조지 콜튼 경이 너무 조용해서 알아보니, 엘로이 백작가에 여러 번 들렀더군요.”

“백작가에 가서 얻을 게 없을 텐데.”

지젤의 말에 테오가 고개를 까딱였다. 말 그대로 엘로이 백작가는 영양가가 없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가 지젤의 붉은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후작 견제하겠다고 달리아 백작 쪽에 사람이 몰리는 건 이해를 하는데, 엘로이 백작은 진짜 이상하단 말이죠.”

“달리아 백작은 황국에 적대적이니, 다른 세력을 만든다? 그것도 엘로이 백작가는 약하지. 가진 게 없잖아. 헤넌 공작이라면 모를까.”

지젤이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테오가 그녀의 오른손을 잡아 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방심한 지젤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춘 그가 속삭였다.

“하여튼, 제 쪽에서도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장갑 위에 입 맞췄다지만, 불필요한 행동에 언짢아진 지젤의 미간에 주름이 접혔다. 그걸 본 테오가 지젤에게 뜬금없는 당부를 했다.

“그 화가, 너무 예뻐하시면 안 됩니다.”

“불필요한 걱정 말고, 부지런히 움직여. 이중장부는 제발 침대 밑에 숨겨놓든가 하고.”

“불필요한 걱정이 아닙니다. 그림 그린다는 핑계로 어여쁘신 우리 지젤 님 얼굴 뚫어져라 볼 텐데. 당연히 불안하죠.”

“테오.”

재미도 없는 농담, 적당히 해. 지젤이 정말 못 말린다는 듯 그의 이름을 한 번 부르고 어깨에 걸쳐진 겉옷을 그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그걸 받아낸 테오에게서 등을 돌린 지젤이 발코니를 나서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림 그리는 놈, 어리다고 마냥 예뻐하시면 저 정말로 질투합니다.”

자작이 내뱉은 일종의 선전포고에 소름이 돋은 지젤은 작게 진저리를 쳤다. 정말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니, 면역이 없으면 견디기 힘들었다. 오스틴이 저거 반만큼만 해도 엘로이 백작 부인이 홀딱 넘어갈 텐데.

“자작님, 질투 같은 유치한 말씀 하지 마시고 긴장이나 좀 하세요.”

“질투가 얼마나 무섭고, 지저분한 감정인지 모르시니.”

사랑보다는 질투가 여러 사람 인생 꼬이게 만드는 원인인데. 테오가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지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우리 후작 부인께서 고생 좀 하시겠습니다.”

지젤은 그 시답지 않은 예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지젤은 테오와 그런 잡담 나눌 여력이 없었고, 고생하길 바라는 말투였기에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

이안은 지젤의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서는 숨을 들이마셨다. 주인의 부재로 빈 침대를 보자니,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자작가에 갔다던데 귀가가 너무 늦어졌다. 그때 마주쳤을 때 신전에서 죽여버릴걸. 신전의 분수대에 담가버렸다면 일이 쉬웠겠지만, 지나갔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다. 지젤이 들으면 질겁을 할 생각을 하며 이안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날 두고 어딜 다니는 걸까.”

지젤은 자신이 뭔가 엄청 타락하고, 음침하고 그런 줄 알지만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이안은 지젤보다 더 복잡하고 꼬인 내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은연중에 속내를 숨기고 이안의 눈치를 살피는 지젤과 마찬가지로 그도 그런 걸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기에 좋은 모습만 알게 하고 싶었다.

근데, 날 이렇게 불안하게 하고 괴롭게 하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차선을 선택해야 옳지 않을까. 그가 그렇게 앉아서 자신의 생각이 타당하다 결론 내리는데, 침실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문이 열렸다.

지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침실에 먼저 들어왔던 지젤이 이안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섰다. 기척도 없이 고요하게 그림자처럼 침대 옆에 앉은 이안의 검은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질거렸다.

“미아, 오늘은 그냥 혼자 쉬고 싶어.”

지젤이 황급히 뒤따라 들어오는 미아를 밀어내며 미소 지었다. 미아가 엉겁결에 손에 쥐고 있던 촛불을 지젤에게 넘겨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그래도 제가 옷 갈아입는 걸 도와드려야-”

“아니, 너도 오늘 힘들었을 텐데 나 지금부터 혼자 쉴게. 나중에 부르면 와.”

놀란 미아를 힘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으며 지젤은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누가 봐도 이상하고 어색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지젤은 침실 문을 잠그고 잠시 기대서서 눈을 감았다. 대체 왜 여기 들어와 있는 걸까.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저렇게 태평하게 앉아있는 거야. 지젤이 미아에게 빼앗은 촛불을 들고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어두운 데서 왜-.”

지젤이 한마디 해줄 생각으로 그를 향해 발을 내딛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그대로 멈췄다. 무표정한 얼굴이 딱딱하다 못해 사나웠다.

“여기서 뭐 해?”

이안은 대답 없이 검은 눈으로 천천히 지젤을 훑었다. 그게 꼭 사냥감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포식자를 연상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는데?”

지젤이 재차 그에게 대답을 종용하자 이안은 천천히 다리를 꼬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자동적으로 지젤의 시선이 그의 기다란 다리로 향했다. 원래도 긴 다리가 교차된 탓인지 더 길어 보였다. 살짝 반짝이는 원단의 바지가 탄탄한 허벅지를 감싸고 있었다. 바지 위로는 살짝 흐물거리는 재질의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단추가 명치까지 풀어 헤쳐져 있었다. 그 사이로 엿보이는 가슴 근육을 보며 지젤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를 너무 노골적으로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뭐 하냐니까.”

지젤이 정색을 하고 다시 묻자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게 가까이 오라는 뜻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지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답해주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몹쓸 생각 하는 중.”

이안이 지젤의 아집을 눈치채고는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가 바닥에 깔려서, 지젤은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몹쓸 생각.”

“네가 알면 화낼 생각.”

이안이 웃지 않고 하는 말에 지젤이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안은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걸 왜 여기서 해?”

“네 침실이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건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야.”

이안은 언제나 그리했듯이 최대한 지젤의 물음에 성실히 답하려 애썼다. 그러나 평소처럼 완벽하게 본성을 숨기기는 힘들었다. 애증? 그딴 걸 지니고 있는 거라면, 그게 정리가 안 되는 거라면.

“나한테는 중요해. 네가 여기 있는 걸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지젤.”

이안이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는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듯한 손짓에 지젤의 말문이 턱 막혔다.

“나 지금 고민 중이야.”

그의 말에 지젤은 주먹을 꽉 쥐고 그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정색을 하고 앉아있는 이안이 무슨 말을 할지 너무 두려웠다. 평소라면 그녀가 싫다 해도 양팔 벌려 끌어안을 이안이 지젤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게 당연한데 속상해서 지젤은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이안의 앞에 선 지젤이 그런 그를 내려다봤다. 촛불의 주황빛에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따듯해 보였지만, 동시에 짙은 검은 그림자가 졌다. 신기하게도 어둠 속이라 이목구비가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손만 뻗으면 서로 닿을 정도의 거리였지만 둘 다 바라보기만 했다.

“나한테 아무 설명 안 해도 괜찮아.”

지젤은 단단히 마음의 각오를 하며 먼저 말을 꺼냈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냉담해지는 데 이유는 필요 없었다. 이안은 아무런 해명 없이 떠나가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네가 떠나는 데 이유를 만들 필요 없어.”

“하-.”

지젤의 오해에 이안은 속이 답답해졌다. 그가 피로한 듯 머리를 쓸어내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짐승처럼 그르렁거렸다.

“이미 충분히 화나있으니, 그딴 소리 하지도 마.”

“왜 화가 났는데?”

이안은 지젤의 물음에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유가 너무 많았다. 네가 후작에게 티끌만큼의 감정이라도 가지고 있을까 봐 불안해. 너의 지난 5년 동안 내가 없었으니까. 만약에 그녀가 후작이 말했던 것처럼 애증을 가지고 있다 한다면, 그는 지젤의 앞에서 후작의 살을 저며내 죽여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지젤의 푸른 눈을 보면서 이안은 궁금해졌다. 내가 그렇게 해도 넌 지금처럼 나를 애잔하게 바라볼까? 그래야 할 텐데. 네가 날 사랑해주지 않으면, 난 후작보다 더한 놈이 될 텐데.

“마땅히 할 말 없으면 네 침실로 돌아가.”

“사랑한다고 해줘.”

지젤은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잠깐 고민해야 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어서.”

이안이 여전히 웃지 않고 하는 말을 들은 지젤은 죄인이 되어 단두대 앞에 선 기분이 들었다. 지젤은 사랑한다고 할 수 없었다. 이안을 보내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말은 너무 이기적이었다. 그녀의 혀가 갈 길을 잃고 허공을 맴돌았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나쁜 생각들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게 달래줘.”

그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이안은 말없이 바닥만 보고 선 지젤을 차분하게 재촉했다. 그건 자칫 잘못하면 머릿속에 든 몹쓸 생각들을 몸소 행하겠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