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86)화 (86/135)

86.

“그렇게 돈 받은 귀족들이 마가렛 편에 서서 달리아 안나 왕비를 왕궁에서 내몰려고 폐위 얘기도 하고.”

“예?”

“다들 딸 낳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정말 집요하게 괴롭혔다고 들었어요.”

뭐, 딱히 스텔라에게 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스텔라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스텔라는 그저 지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엮인, 그런 부가적인 사람이었다. 그도 달리아 안나 왕비를 괴롭히기 위해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적은 납품 건이었겠지.

“지젤 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귀족들이 안나 왕비가 마차 사고로 불우하게 죽고 장례식 끝나자마자 마가렛 님을 왕비로 추대했죠. 무슨 앓던 이 빠져서 속 시원한 사람들처럼 기뻐들 했다던데.”

“죄송한데, 제가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어요. 왜 그런 얘기를 저희 아버지와 연관 지으시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부친께서는 충실하게 마가렛 왕비의 징검다리 역할만 하셨답니다.”

식탁에 앉은 사람 중에 유일하게, 식사를 끝마친 지젤이 깔끔하게 접시를 비워내고는 와인을 한 입 머금었다. 포도주 특유의 떫은맛으로 입가심을 끝낸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얘기한 오해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 하는 거예요.”

“오해요?”

“스텔라가 계속 얘기했잖아요. 자작님이 이중장부를 써서 대규모로 사기를 치고 다닌다고.”

바르한 자작이 의자 등받이에 완전히 기대서는 지젤을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지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있는 바르한 자작을 보며 입가를 깔끔하게 닦아냈다.

“그게 오해라고. 스텔라, 이건 사기가 아니에요.”

지젤이 웃으며 스텔라의 손등을 토닥이자, 스텔라가 손을 휙 빼내고 몸을 움츠렸다.

“그냥 그때 다들 신나서 받은 달리아 안나 목숨값, 이자 좀 더 붙여서 다시 받아 오는 거예요.”

그렇게 계산하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 같네요. 지젤이 태연하게 하는 말에 스텔라는 넋이 나갔다.

“네?”

스텔라는 지젤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20년도 더 전에 죽은 왕비가 지금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아니, 지금 그럼 이중장부가 자작이 아니라 후작 부인이 꾸민 일이라고?

“지젤 님이 하신 일이에요? 전부? 왜요? 후작님이 제일 많은 돈을 투자하셨는데-”

“길고 복잡한 나만의 사정이 있죠. 다 설명하기는 좀 그래요. 스텔라는 일종의- 내 징검다리죠.”

지젤이 안타깝다는 듯 하는 말에 스텔라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잠깐만, 그럼 이게 내 남편이랑 후작 부인이랑!

“아니, 내 남편이랑 그럼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예요? 이게 대체 무슨-!”

“오스틴과 스텔라 같은 사이는 절대 아니니까, 그건 정말 걱정 안 해도 돼요.”

지젤이 적절한 예시를 들어주며 친절하게 설명하자, 바르한 자작이 과장되게 입꼬리를 축 끌어 내리고 동의했다.

“안타깝게도 사실이니. 속상해서 눈물이 찔끔 흐르네.”

손도 못 닿게 하시니. 바르한 자작이 눈가를 손수건으로 찍어내며 말했지만, 지젤이 능숙하게 헛소리를 잘라냈다.

“자작님, 하나도 안 귀여우니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여자들끼리 진지한 얘기 중이잖아요?”

그녀는 버릇없이 끼어든 바르한 자작을 따끔하게 혼냈다. 그게 기가 막혀서 거친 숨을 토해낸 스텔라는 곧 이성을 잃고 눈앞의 접시를 뒤집어엎었다. 와장창 소리와 동시에 주방장이 열심히 비늘을 벗겨내 정성 들여 구운 농어구이가 식탁을 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둘이서 지금까지 나 몰래, 계속 이런 작당을 해왔다고? 대체 언제부터?”

지젤은 그 질문은 좀 난감해서 입을 다물었다. 달리아 백작과 얘기해서 테오, 그러니까 지금의 바르한 자작, 작위 받게 하고 그다음 달에 결혼시켰는데. 결혼 전부터라고 하면 화내겠지? 양아들로 자작이 된 테오가 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배경이 될 수 있는 집안이 필요해서 고른 게 스텔라였다. 마가렛 왕비 즉위 이후부터 나름 잘나가는 상인 집안이니까.

“언제부터냐니까! 내 남편이랑 언제부터 놀아났냐고!”

스텔라가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지젤이 난처하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바르한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서 지젤의 옆까지 걸어오며 고개를 저었다.

“스텔라, 우리 사이에 정조와 의리 같은 단어는 꺼내지도 말자고. 네 애인이 그 화가만 있는 게 아니잖아, 결혼식 치르고 일주일 만에 저택에 남자 끌어들인 것도 알고 있어.”

“하, 진짜 기가 막혀서는. 지금 내가 애인 만드는 거랑 당신이 한 짓이랑 비교하는 거야? 이거 사기 결혼이야, 알아?”

“걱정 마, 곧 이혼해줄 거야.”

테오가 어깨를 으쓱이며 지젤의 어깨에 손을 얹었는데, 지젤이 그 손등을 아프게 꼬집었다. 어딜 슬쩍 손을 올려. 그러자, 바르한 자작이 아쉽게 손을 물렸다.

“뭐, 이혼? 지금 둘 다 나랑 장난해? 뒷돈이 어쩌고, 그게 다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

지젤은 스텔라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굳이 이유를 찾자면. 달리아 안나 왕비 죽이는 데 일조한 부친 덕분에 잘 먹고 잘 산 거 정도? 근데, 세상사 다 이런 식으로 돌고 도는 게 아니겠어요?”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었다. 할 말을 잃은 스텔라가 지젤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지젤이 계속 붙어 서는 바르한 자작을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걱정 마요, 스텔라. 조용히 얌전하게 시골 내려가서 입 닫고, 눈 감고 살면 빠르면 올해 안에 이혼해줄 거예요. 남들이 스텔라가 아닌 바르한 자작님께 손가락질할 이유로 말이죠.”

자작이 파산하기 전에 이혼하면 법적으로 스텔라가 그 돈들을 갚을 이유가 없어진다. 좀 난처해지기는 하겠지만, 그건 자작에게 투자했던 수도 내 귀족들 대부분이 난처할 테니 크게 문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지젤의 계획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이혼한 뒤 파산, 그다음 자작을 깨끗하게 죽은 사람으로 만들면 돈과 사람은 증발하고 혼란만 남는다. 후작 부인인 자신도 큰 피해자니, 아무도 지젤을 의심하지 않을 테고.

“근데, 가볍게 입 놀리고. 지금처럼 나한테 소리 지르고 아까울 정도로 맛있는 농어구이 집어 던지면.”

지젤이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눈썹을 까딱였다.

“난잡한 사생활 까발려서 재혼은커녕 사교계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해줄게요. 확신하건대, 많이 창피할 거예요. 아무도 스텔라와 티타임을 가지지 않으려 할 테고. 요즘 다들 제 눈치 많이 보는 거 알고 있죠?”

잔인한 방법을 택하자면, 스텔라가 허튼소리를 하고 다니면 단숨에 정신병자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장부야 숨기고 다시 만들면 되고. 그다음에 스텔라를 정신병원에 넣어두면 되는 일이었다. 사실, 일은 그게 깔끔하지만 스텔라에게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은 지젤이 다시 옅게마나 미소 지었다. 바르한 자작이 옆에서 지젤을 거들었다.

“정말로, 스텔라. 자길 위해 하는 말이니 조용히 입 닫고 시골 가 있어. 애인 데리고 쉬고 있으라고.”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 이런 걸까. 다리에 힘이 풀린 스텔라가 비틀거리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대체 어쩌자고. 어떻게 하려고 이런-”

“스텔라, 내가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다 설명한 걸 들었으면 그걸 궁금해하면 안 되죠.”

지젤이 애잔한 표정으로 스텔라를 내려다보며 젊은 화가에게 했듯 친절하게 설명했다.

“너한테 중요한 건 내가 이다음에 어떤 걸 할지가 아니라. 내가 모든 걸 알게 된 너한테 어디까지 무슨 짓을 할지. 그게 중요한 거지.”

협박도 이렇게 고상하고 친절하게 할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우아하게 설명하는 지젤을 보며 스텔라는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

혼절한 스텔라를 자작이 2층 침실로 옮기는 동안, 지젤은 1층 발코니에 서서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공기가 유난히 시렸다. 그 뒤에 선 자작가의 하녀가 지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젤이 품에서 금화가 두둑하게 든 주머니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후작저에서 일하다가 지젤의 소개로 자작가로 옮긴 하녀였다. 지젤이 그런 하녀를 향해 미소 지으며 당부했다.

“루나, 스텔라 잘 감시해.”

“네, 신경 쓸게요. 지젤 님께서 우리 딸 약값 대주시는 거, 저희 아들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젤은 루나의 말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 지젤이 그녀에게 받고 싶은 건 감사가 아니었다. 눈치 빠른 루나는 지젤이 불편해한다는 걸 알고는 한 번 더 고개를 꾸벅 숙이고 2층으로 사라졌다.

“절 너무 오래간만에 찾아주셔서, 새삼 가슴이 벅차네요.”

“우리 자작님이 똑똑한 자작 부인께 이중장부를 들켜서 말이지. 서랍에 넣어두는 건 할 줄 알고, 숨겨놓는 건 할 줄 몰라?”

지젤의 비아냥거림에도 그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언제 이혼하나요?”

바르한 자작, 그러니까 테오가 어느새 발코니에 들어서며 물었다.

“조금만 더 끌어모아. 줬던 목록 외에 투자하겠다는 귀족들은 다 거절하고. 그때 돈 받았던 인간들만 걸러내서 뜯어내야 해.”

“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야 항상 지젤 님 말씀 잘 듣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뻐하시잖아요?”

지젤은 능글맞은 남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닌가? 말 잘 들어서가 아니라 잘생겨서입니까?”

아까 낮에 본 오스틴과 마찬가지로 지젤은 자작이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갈색 머리카락에 흑갈색 눈이 지극히 평범했다. 물론,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잘생겼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스텔라 신경 써서 살펴. 직접 시골 별장에 데려다놓고, 감시 잘하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건 그렇고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밤바람 차가운데, 드레스가 얇으시네요. 테오가 겉옷을 벗어 지젤의 어깨를 덮어주며 말을 이었다.

“황태자랑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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