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85)화 (85/135)

85.

저녁 식사 직전, 막 왕궁에서 돌아오는 다이한의 마차를 보면서 지젤은 자신의 마차에 올라탔다. 지젤은 바로 출발하지 않고 문을 열고 잠시 앉아있었다. 다이한에게 행선지를 알리고 출발할 생각이었다. 마차에 내린 다이한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고개를 까딱였다. 둘 사이에는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까딱이는 후작을 가만히 보던 지젤이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작 부인이 초대해서, 바르한 자작가에 좀 다녀오려고요.”

“왜. 내 얼굴 보고 밥 먹기 거북한가?”

간만에 듣는 비아냥거림에 지젤은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요.”

“아닌 사람이 저녁 식사 직전에 도망친다고.”

“도망이라뇨? 황태자 저하와 저를 엮는 추문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셨던 것 같은데 그만하세요. 요즘 대화를 자주 나누기는 하지만 전부 오해고, 어깨는 그저 멍든 것뿐이에요.”

지젤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을 하며,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넘겼다. 단순히 추문과 오해쯤으로 치부하는 지젤의 태도에 다이한의 연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걱정 마세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전 지젤 다니엘이잖아요?”

많은 의미가 포함된 말에 다이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지젤은 세심하게 그런 다이한을 살폈다. 이안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후작의 태도가 이상했다. 원래도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내가 기억을 못 하고 있다고 믿는 게 맞나? 갑자기 솟아오른 의심은 지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부터 한센 경이 안 보이던데 어디 보내셨나요?”

지젤의 질문에 다이한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네 여동생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면, 넌 뭐라고 할까. 지난 5년간 흐느낀 슬픔과 그리움 대신, 안도의 눈물을 흘릴까. 그리고 날 떠나겠지.

“황국에 일이 있어서 보냈으니, 돌아오는 데 오래 걸릴 텐데. 따로 시킬 일이 있나?”

다이한은 그녀가 자신을 끔찍하게 여기는 게 합당하다고 느꼈다. 이기적인 애새끼라는 이안의 비난도 겸허히 수긍할 수 있었다. 마땅히 비난받아야 옳았다.

“아니요, 안 보이기에 궁금해서 물어나 봤어요. 빨리 다녀올게요.”

지젤은 하인에게 눈짓하고 다이한에게서 시선을 떼내었다. 정말로 황국에 갔다면 비앙카도 되돌아오는 데 한참 걸리겠네. 괜히 보냈나 고민하던 그녀는 짧게 혀를 찼다. 이미 선택한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

“이 근방에서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 본 적 있나? 20대 초반, 그보다 어려 보일 수도 있고.”

“아니요, 수배범인가요?”

기사들에 의해 조용히 뒷문으로 불려 나온 국경 인근 여관 주인이 한센의 질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이라면, 후작 부인인데. 그는 그걸 물어보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살벌한 게 후작 부인을 찾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보게 되면 바로 알리도록.”

여관 주인은 한센이 후작가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이런 식으로 찾을 수는 있는 겁니까?”

“시끄러, 찾아서 이번엔 확실히 처리해야 한다. 후작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야.”

기사들 중 누군가 투덜거리는 말에 한센이 정색을 했다.

“황궁 소식통은 뭐라던가요? 진짜 살아서 황궁에 숨어있었대요?”

“아직 연락 없으니 기다려. 왕국에 없으면 황국까지도 넘어가야 하니까.”

나무 위에 올라타 앉은 비앙카는 아까부터 여자를 찾는 한센 무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여자를 찾아다닌다고? 후작이 어디서 사생아를 만든 건가. 붉은 머리. 후작 부인이 임신을 못 하니 비슷한 여자를 찾아서 일을 벌인 걸 수도 있었다. 후작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는 적어도 이혼을 하거나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할 생각은 없어 보이니까.

“저거 엘 님 이야기지?”

“붉은 머리 여자라면 그런 것 같아.”

한센 쪽을 보고 있던 비앙카는 나무 뒤에 숨어있는 도널드와 브루노를 보고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황국 기사단이 은신에 특출나게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싸우면 체격 차이와 검술에 밀려서 이쪽이 패배하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뒤에서 쫄쫄거리며 쫓아오는 덩치 큰 남자 둘을 보며 비앙카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둘은 나무 뒤에 가려지는 체격도 아니었다.

“일단, 단장님께 알려?”

나무 위의 비앙카가 그러거나 말거나, 짐짓 진지해진 도널드가 브루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랬다가 놓치면 낭패다. 따라가면서 상황을 더 지켜보자고.”

“우리 기사단 쪽에서 먼저 찾아야 할 텐데.”

중간에 낀 비앙카는 앞뒤 일행의 이야기를 조합해서, 붉은 머리 여자가 누구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도무지 답을 알 수가 없어서 일단, 뒤에 바보들을 조금 더 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

“지젤 님!”

후작 부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스텔라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스텔라를 보며 지젤이 사뿐히 마차에서 내렸다.

“너무 예고도 없이 왔나요? 놀랐다면, 미안해요.”

“아니에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지금 서신을 쓰는 중이었어요.”

스텔라는 점점 커지는 이중장부 속 금액의 규모와 모여드는 투자자들에 불안했다. 지젤이 저택에 와서 자작과 오해를 풀겠다고 했지만 이건 오해가 아니었다. 그건 분명했다.

“지젤 님, 저 정말로 너무 무서워요. 엘로이 백작 부인이 친정 돈까지 끌고 와서 투자하는데-. 제 생각대로 남편이 사기를 치고 다니는 거라면, 나중에 제가 살해당할지도 몰라요.”

스텔라가 다급하게 식당으로 지젤을 안내하며 진저리를 쳤다. 후작이 큰돈을 투자하는 바람에 수도 내 온갖 귀족들이 모여 자작에게 투자 좀 할 수 있게 해달라 애원하는 지경까지 왔다.

“사기라뇨? 스텔라,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우리 아직 그렇게 단정 짓지 말아요. 그래도 남편이잖아요.”

지젤이 식당에 들어서며 푸른 눈을 깜빡이고는 그녀를 다독였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요.”

“지젤 님께서 꼭 해명해주셔야 해요.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고, 어떤 것도 연관돼 있지 않아요. 지젤 님이시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남편이라고 첫날밤 이후로는 같은 침대 써본 적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 남자 때문에 인생 망칠 수는 없어요.”

“일단, 차분하게 우리 식사하면서 대화로 풀어가요.”

“아니요, 지젤 님. 애초에 무역사업 자체가-.”

“이런, 후작 부인께서 오셨습니까?”

스텔라가 인자하게 미소 짓는 지젤에게 매달려서 자세히 설명하려는데 바르한 자작이 그들 뒤에서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스텔라가 지젤의 팔을 꽉 끌어안고 몸을 굳혔다.

“어쩌다 보니 오게 되었는데, 불편하시다면 죄송해요.”

“제가 후작 부인이 불편할 리가요.”

“다정도 하셔라.”

바르한 자작이 지젤에게 식탁에 앉을 것을 권하고, 지젤은 얼어붙은 스텔라를 식탁으로 이끌었다. 스텔라는 숨쉬기가 힘든지 헐떡이다가, 와인 한 잔을 원샷하고는 진정했다. 저녁 식사 자리치고는 기묘한 분위기였다. 바르한 자작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후작 부인과 그 옆에 앉은 스텔라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저택에 들이신 화가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죠?”

바르한 자작이 지젤에게 웃으며 묻자,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스틴이라고 우리 자작 부인께서도 잘 아는 화가랍니다.”

“네? 제가요?”

“아닌가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요.”

익숙한 이름에 화들짝 놀란 스텔라가 바로 시치미를 뗐다. 그런 그녀를 보며 지젤이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즐거워서 웃는 사람 같았다.

“내가 착각했나 보네요. 그건 그렇고, 자작님께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죠?”

지젤이 스텔라를 은근하게 재촉하듯 묻는 말에 바르한 자작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에게? 무슨 이야기?”

스텔라는 궁지에 몰린 쥐가 된 기분이 들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분위기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무언가 지젤이 갑자기 자신의 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젤이 그런 스텔라를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 그건 밥 먹고 해도 되는 얘기니까.”

지젤이 말을 끝내자마자 사용인들이 식기와 음식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지젤이 식기를 들었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왕궁에 들어가는 물건 대부분을 스텔라 아버님께서 넣으시죠?”

“아, 네.”

스텔라가 억지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농어구이를 썰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사업이 예전만큼 잘나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명성은 여전했다. 왕궁에 들어가는 일부 품목을 독점으로 납품하고 있어서, 수도 내에서는 꽤 유명한 상인 중 한 명이었다.

“달리아 안나 왕비가 죽고 난 다음부터 물건을 넣기 시작하셨다죠.”

지젤이 바삭하게 구워진 농어를 한입 크기로 썰어내며 하는 말에 스텔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어머, 모르셨구나.”

스텔라의 무던한 반응에 지젤이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친께서 마가렛 왕비의 충실한 종, 조지 콜튼 경에게 돈 받은 것도 모르시겠네요?”

“네?”

아버지가 돈을 받다니? 스텔라는 어이가 없어서 식기를 내려놓았고, 바르한 자작은 흥미로워서 식사를 중단했다. 지젤이 그런 둘을 번갈아 보면서 깔끔하게 자른 생선구이를 입에 넣고 씹었다.

“아, 부친께서 챙기신 건 아니에요. 뭐 하러 왕비가 그깟 상인한테 돈을 주겠어요? 받은 돈 이리저리 굴려서, 깨끗하게 만든 다음에 귀족들에게 뒷돈을 많이 찔러주셨더라구요.”

그러고는 왕궁 물건 납품 건을 받아내셨죠. 지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있는 스텔라가 불쌍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젤의 관점에서는 불쌍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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