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84)화 (84/135)

84.

도널드는 제인에게 비앙카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하지 못했다. 분명 이상한 하녀고. 정확하게는 하녀가 아닌 게 분명한, 하녀인 척하는 사람이지. 하여튼, 보고해야 하는 게 맞는데 그럼 제인의 성격상 비앙카를 납치해서 괴롭힐 게 뻔했다. 그건 뭐랄까. 양심에 좀 찔렸다. 상관의 변태적 성향을 어느 정도 아는 도널드가 잔디를 뽑으며 코를 훌쩍였다.

“도널드.”

누군가 쭈그리고 앉은 도널드의 등을 가볍게 걷어찼다.

“아!”

격하게 아픔을 표현하며 확 얼굴을 찡그린 도널드는 자신을 걷어찬 사람이 제인이라는 걸 확인하고 눈을 깔았다. 서러워라. 얻어맞고 항변도 못 하는 신세라니.

“상관이 불렀는데, 아?”

제인의 뒤에 선 기사 부르노는 동기인 도널드가 조금 불쌍했다. 휴가에 눈이 멀어서는.

“저는 지금 후작가 하인 아닙니까. 근데 막 발로 차시고-.”

도널드가 어설프게 항의했지만, 제인은 그따위 건 무참히 무시했다.

“걔. 걔 뭐야? 후작 부인 옆에 붙어있는 애.”

“누구요? 미아요? 걔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후작이 예전에 쫓겨난 분풀이로 자살했다-로 마무리한 것 같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괴이한 소문이 날 수 있는 일을 후작은 아주 깔끔하게 처리했다.

“도박 중독자가 돈 없는 처지를 비관했다. 이 정도로 해결했더라구요. 황국 기사단과 얽힌 얘기는 싹 지우고요.”

도널드의 열과 성을 다한 부연 설명에 제인은 짧게 혀를 찼다.

“말고. 쓸데없이 얼굴 예쁘게 생긴 놈.”

“놈이요?”

“하녀 말이야. 넌 왜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듣냐?”

제인의 핀잔에 도널드가 눈을 끔뻑거렸다. 비앙카? 걔를 왜?

“비앙카요? 그냥 하녀죠.”

“그냥 하녀라고?”

“예, 뭐.”

도널드가 목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제인이 한쪽 눈을 찡그리고 코웃음을 쳤다.

“한센이 기사들 데리고 사라졌고, 그 뒤에 하녀도 사라졌는데. 그냥 평범한 하녀다? 후작 부인 옆에 찰싹 붙어있던 애가 굉장히 절묘하게 없어졌는데?”

제인이 도널드의 머리를 한 손으로 꾹 잡아 누르며 하는 말에 그가 변명했다.

“그게-, 후작 부인이 옆에 두고 이것저것 일을 시키는 것 같기는 한데. 애가 좀 무뚝뚝하고 안 웃어서 그렇지. 가만 보면 주인도 잘 따르고, 의리 있고 착실해요.”

도널드가 줄줄 늘어놓는 말에 제인이 뒤에 선 부르노를 향해 눈썹을 까딱였다.

“도널드, 너 또 시작인 거지?”

그러자, 부르노가 제인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말이지, 도널드. 이성한테 너무 금방 호감을 가져. 너 처음 입단했을 때도 단장님 보고 한눈에 반해서 들어왔다고 했잖아. 물론, 하루 만에 그 사랑은 바스러졌지만-”

“야!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그리고 사랑 아니었거든?”

부르노가 뜬금없이 옛-날, 아주 옛날 얘기를 꺼내자 도널드가 발끈했다. 잊고 싶은 흑역사가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잔뜩 붉힌 도널드는 부르노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그래, 뭐- 그렇겠지.”

“그 태도는 뭐야? 진짜거든? 단장님께서 저런 가학적 성향을 가진 변태일 줄 몰랐을 때, 검술만 보고 좋아했던 거라고!”

“부르노, 그만 놀려.”

제인이 부르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거만하게 본인의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따지고 보면 도널드는 불가항력으로 나한테 당한 거야. 내 매력이 워낙 흘러넘치니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여튼, 둘이 좀 따라가.”

“예? 무엇이 흘러요?”

“뭐가 불가항력이요?”

부르노와 도널드가 뒤에 명령보다는 앞의 내용에 식겁해서 제인에게 되물었다.

“하녀가 한센 경을 따라간 건지, 그러면 한센은 뭐 하는지. 아니더라도 하녀가 어딜 가는 건지 확인하고 와.”

제인이 정색을 하고 하는 말에 부르노가 꾸벅 고개를 숙이는데, 도널드가 난감하다는 듯 잔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집사님이 이거 잔디 다 뽑아놓고 오랬는데요. 여기다 나무 심기로 하셨거든요.”

뭐든 주어진 일을 착실하게 해내는 도널드가 곤란하다는 듯 잔디를 내려다봤다. 쓸데없이 성실한 도널드를 본 부르노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제인이 퍽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까딱이며 탄식했다.

“아-, 우리 도널드가 잔디 뽑으셔야 하는구나?”

“예, 억!”

제인이 도널드의 발목을 뻑 소리 나게 걷어찼다. 도널드가 절로 비명이 튀어나오는 통증에 몸을 구부리며 콩콩 뛰는데, 제인이 거만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네 상관이 누구야. 네 첫사랑인 나지?”

“첫사랑 아닙니다!”

한 번 더 코웃음을 친 제인이 강하게 부정하는 도널드의 머리채를 확 움켜쥐었다.

“진짜 가학적 변태가 뭔지 보여주기 전에, 빨리 움직여.”

제인이 살벌한 표정으로 음산하게 하는 말에 놀란 도널드와 부르노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그 꼴을 보면서 제인은 나른하게 한숨 쉬었다. 아까부터 밥도 안 먹고, 뭔가 고민하는 황태자 꼴이 심상치 않았다.

***

서재에 앉아서 한참 지도를 보던 지젤은 해가 지기 전에 별채로 향했다. 오스틴은 기쁘게 그녀를 맞이했고 정원이 아닌, 해가 들어오는 창가 앞으로 장소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손을 이렇게 얹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의자에 앉아 몸을 옆으로 틀고 있던 지젤의 입매가 어그러졌다. 아까부터 은근히 만지작거리는 게 기분이 더러웠다. 오스틴이 서슴없이 지젤의 오른손을 잡아 그녀의 허벅지에 얹으며 씨익 웃어 보였다. 슬쩍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오스틴을 보며 지젤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깜짝 놀란 오스틴은 조금 더 대담하게 움직였다.

“어깨는 이렇게 조금만 더-”

오스틴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힘줘 잡자 지젤이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숨소리가 너무 잘 들려서 불쾌하니 뒤로 물러서주면 고맙겠는데.”

“네?”

“아까부터 자네가 얼굴을 들이대니, 숨결이 닿아서 기분이 더럽다고 했어.”

“아, 죄송합니다.”

나름 미모로 잘 먹히는 얼굴이라 이런저런 각도로 틀어 보였던 오스틴이 멋쩍게 뒤로 물러섰다. 무안하게 저렇게까지 얘기할 일인가. 독설가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오스틴이 당황해서 팔뚝을 긁적이는데, 지젤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미소를 머금었다.

“자작 부인은 그런 걸 꽤나 좋아했나 봐. 취향 독특하네.”

“예?”

난데없는 말에 오스틴이 놀라서 눈을 껌뻑거리는데, 지젤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림 말고 다른 일도 재능이 있는 것 같더라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오스틴은 지젤의 말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걸 싫어했다. 만약에 여기서 바르한 자작 부인이랑 엮였다는 걸 인정하면, 후작 부인은 이쪽을 내칠 게 분명했다. 고귀하신 분들은, 남들이 먹다 남은 걸 먹지 않는다. 굳이 그게 아니어도 배 불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외모 때문에 종종 오해받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전 화가입니다.”

“외모?”

이안과 다이한 정도는 되어야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눈이 꽤나 높아진 지젤이 보기에 오스틴은 평범하게 생겼다. 눈, 코, 입 잘 달린 젊은 청년 정도? 그러니까 그냥 평범한 사람, 그 이상이 아니었다.

“보시다시피, 꽤 예쁜 얼굴이라서요.”

지젤은 뻔뻔한 오스틴이 꽤 마음에 들었다. 똑똑하고, 어느 정도 허세도 있고, 여자들이 흥미를 보일 법했다. 자신을 그림으로 남겨줄 남자.

“그럼 바꿔 말하지. 오스틴, 네 예쁜 얼굴 좀 이용해볼까 하는데.”

오스틴은 노골적으로 구는 후작 부인을 보며 거만하게 미소 지었다. 뭐, 결국엔 목적은 하나인가? 후작이 무섭기는 하지만, 후작 부인 총애를 받을 수 있다면 감수할 만했다.

“어디에 쓰시려고요?”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게 깔아오는 게, 제법 괜찮았다. 지젤이 보석상에서 보석을 고르듯 꼼꼼하게 오스틴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고독하고 가난한 예술가 청년. 귀부인들이 좋아하지.”

지젤이 마음에 든다는 듯 오스틴을 보며 미소 지었다.

“네?”

“내가 이상한 소문 내는 쥐새끼 하나를 찾았거든. 사교계에서 아직도 나를 적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는데. 의외기도 하고, 괜히 거슬리기도 하고 말이지.”

황태자랑 자신을 엮어서 계속 추문을 만들어내는 귀부인 약점 정도는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오스틴은 그 약점 자체가 되어줄 남자였다.

“그 예쁜 얼굴로 엘로이 백작 부인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 캐내오면.”

“캐내오면?”

오스틴이 눈을 반짝이자, 지젤이 소리 내 웃었다. 욕망에 솔직한 사람은 다루기 편했다.

“왕궁에서 왕자님 그림을 그리게 해주지. 역사에 이름 남길 기회를 주는 거야.”

엘로이 백작은 야망과 욕심으로 가득하지만, 가진 게 없어서 빌빌거리는 남자였다. 백작 부인이 가볍고 즉흥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쉽게 말을 흘리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다. 근데, 갑자기 황태자와 나를 엮어서 소문을 낸다? 이유 없이는 절대 안 그러지. 단순한 가십을 넘어서 후작 부인 이미지를 흠집 내, 후작의 권위를 떨어트릴 생각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가볍게 소문을 만들지 않을 여자였다.

“제가 원래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지만, 말씀하신 대로 움직이면.”

오스틴이 사르르 녹아내릴 것처럼 웃어 보이며 지젤의 손등을 검지로 훑었다. 왕궁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니.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했다. 다만, 조금 더 욕심이 났다. 후작 부인은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사람이었다.

“별도로 칭찬도 해주십니까?”

남자들이란. 조금만 웃어주면 좋아하는 줄 알지. 오스틴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젤은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 남자를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지젤이 오스틴의 손등을 찰싹 소리 나게 내려치고는 경고했다.

“그딴 식으로 어쭙잖게 굴면, 이 별채 밑에 파묻힐 텐데.”

그런 되도 않은 방식으로 백작 부인 꼬드기려다 실패하면 곤란해. 다정한 살인 예고에 오스틴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지젤이 그런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 남편의 부친이 자네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아주지.”

“그걸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오스틴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지젤이 능숙하게 손을 까딱였다. 내려다보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앉아.”

그게 의자에 앉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함인 걸 바로 깨달은 오스틴이 그대로 지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평민 출신인 그는 후작 부인 앞에 무릎 꿇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걸 보며 지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이용해 먹기 좋을 것 같았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네 빚에 대해 아느냐가 아니야. 내가 너한테 뭘 해줄지가 중요한 거지. 네가 살면서 화가로 왕궁에 들어갈 기회가 또 있을까?”

지젤의 통 큰 제안에 오스틴의 광대가 절로 올라가고 얼굴에 웃음이 만연해졌다.

“할게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백작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심심하고 권태로워하는 중년 여성을 살살 달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젤이 하는 게 사교계 기 싸움 정도라고 생각한 오스틴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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