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후작님, 저쪽입니다.”
한센의 말에, 말을 타고 걷던 다이한이 고삐를 팽팽하게 당겼다. 그러자, 그가 타고 있던 백마가 거친 숨을 내뱉더니 걸음을 멈췄다.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 걷던 한센과 호위기사 두 명도 말을 멈췄다.
“호수 쪽 산을 타고 계속 늑대가 내려온다 합니다. 아마 겨울 다가와 먹을 걸 찾다가 여기까지 온 모양인데, 걱정들이 큰 듯합니다.”
간만에 틈을 내서 영지를 돌아보던 다이한은 한센이 손가락을 콕 짚어낸 곳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겨울에 저런 산을 드나들어야 하는 사람은 없으니 초입을 막아버리는 것도 방법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가축을 주로 기르는 영지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저긴 아예 막는 게 낫겠군.”
“네, 저도 울타리보다는 아예 돌을 빙 둘러 쌓아 막아버리는 게-”
휙-!
한센이 한참 옆에서 떠들고 있는데,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아온 화살이 다이한의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피하지 않았더라면 어깨에 박혔을 게 분명한 공격이었다.
“후작님!”
갑작스러운 공격에 한센이 소리치자, 덩달아 놀란 말들이 발을 굴렀다. 다이한은 침착하게 고삐를 당겨 말을 진정시키고는 화살이 날아온 쪽을 살폈다.
“이런.”
익숙한 목소리에 다이한과 한센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들이 살피고 있던 산의 초입, 그 비탈길을 가볍게 내려오던 이안이 혀를 찼다.
“안타깝게 빗나갔네.”
제인과 호위기사들이 그 뒤를 따라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꽤 먼 거리였는데도, 몸 쓰는 데엔 정말 재능 있는 황태자였다.
“시답지 않은 장난이 이리 과하니.”
다이한이 눈썹을 까딱이며 이안을 내려다보자, 이안이 뒤에 선 기사가 들고 있는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적의가 가득 담긴 위협적인 이안의 행동에도 다이한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수준이 딱 애새끼지 뭡니까.”
그 말에 이안은 손에 쥔 활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애들 장난이지. 이안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네 이빨을 다 뽑아버릴까도 고민해봤는데.”
다시는 개같은 짓거리 못 하게 말이지. 다이한의 비아냥거림을 무시한 이안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럼 지젤이 눈치챌 테니까 좀 참고.
“나중의 재미로 남겨놓으려고. 일단 네 어깨부터 아작 내고 마저 얘기할까?”
내가 지난밤부터 너무 오래 기다려서. 이안이 가볍게 손목을 풀며 하는 말에 다이한이 코웃음 쳤다.
“내 아내에게 들키는 게 무서우신 분이 검을 들고 위협을 하십니까?”
“설마, 후작이 뼈 몇 군데 으스러졌다고 쫄래쫄래 쫓아가서 고자질하지는 않겠지.”
한센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이안을 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도발이 돼서 피를 볼 것 같았다.
“애새끼가 아니고서야.”
이안이 아까 다이한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눈을 찡긋거렸다. 이안이 다이한의 앞에 당도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호위기사 두 명이 훌쩍 말에서 뛰어내려 다이한의 앞을 막았다.
“일단, 뒤로 물러나시-”
기사 중에 한 명이 검을 치켜세운 황태자를 향해 경고를 하려 했으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이안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팔을 휘둘러 단칼에 목을 베어버렸다. 동시에 남은 기사가 검을 뽑아 들기도 전에 그 명치께에 검을 쑤셔 넣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 말 그대로 깔끔했다.
“윽!”
제인은 너무 당연하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호위로서는 부적합한 태도였다. 그렇지만 흰 옷에 피가 튀면 곤란했다. 핏자국은 뜨거운 물에 오래 불려도, 잘 빠지지 않았다. 그녀의 걱정처럼 이안의 하얀 정복이 붉은 핏방울로 더럽혀졌다. 후작의 호위기사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후작님!”
한센이 말에서 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다이한을 부르는데, 다이한은 무표정하게 이안의 살생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사람을 베어내는 이안을 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곧 질투로 바뀌었다. 저 황태자나 나나 고장 난 건 똑같은데, 왜 난 아닐까.
“저하께서는 절 죽이지 못하십니다.”
다이한의 무덤덤한 말에 이안이 얼굴에 튄 피를 손으로 훑어내며 소리 내 웃었다.
“후작이라는 작자가 오만하게 과언만 일삼으니, 혀부터 베어내줘야 옳겠군.”
“하고자 하셨으면, 진작 그리하셨을 텐데 못 하시는 이유는.”
격분에 차서, 겁이라도 주려고 하는 이유. 다이한은 이안이 과하게 흥분한 이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거울을 보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제 아내 때문이겠죠.”
이안은 다이한의 무표정이 오만하게 느껴져서, 그 눈을 파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젤 다니엘은 남편이 황태자 손에 죽기를 원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이안이 이죽거리던 웃음을 지우고, 다이한을 올려다본 채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이안이 오른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해서, 사랑이라도 받는 것 같아?”
그의 말에 다이한은 고개를 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말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우드득 소리가 울렸다.
“애증도 사랑이라면.”
말을 마친 다이한은 이안을 쳐다도 보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이한의 말이 놀라서 히이잉 소리를 내며 빠르게 떠나가는데도, 이안은 눈만 깜빡였다. 불안이 현실화되는 절망이 그의 머리를 집어삼켰다. 개소리 말라고 입을 찢어야 했는데, 바로 그러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제인은 말없이 서있는 주군을 보며, 분명 도망친 건 후작인데 황태자가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오래 살고 싶으면, 오늘 하루 종일 말조심해야겠다 다짐했다.
“이랴!”
조금 늦게 상황을 눈치챈 한센이 다급하게 다이한의 뒤를 쫓아 말을 몰며, 혹시나 황태자 무리가 쫓아올까 연신 뒤돌아봤다. 다이한을 따라잡은 한센이 그의 옆에 자리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황태자라지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했다. 대놓고 후작을 죽이려 하다니, 미친놈도 아니고 이건 패악질 그 자체였다.
“남작가의 화재에서 죽은 건 남작밖에 없는 것 같으니, 제대로 다시 마무리해.”
다이한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는 말에 한센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분명 확인했습니다. 물론, 그 평민이야 어쩌다 죽은 놈이지만 그 외의 실수는 없었습니다.”
“황녀 말이 이엘리야가 살아있다더군.”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이엘리야가 누군지 잠깐 고민하던 한센은 그게 지젤의 여동생이라는 걸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남작가의 영애 말입니까?”
어떻게, 왜? 살아있을 리가 없었다. 붉은 머리 딸이 남작과 함께 저택에 들어가는 걸 확인했고, 모든 통로를 다 틀어막은 채로 불을 냈으니 죽었을 게 분명했다.
“확실한 겁니까? 평민이야 저희가 오해했다지만, 분명 확인을 했-”
“마지막 기회를 주지. 이번엔 확실하게.”
다이한은 한센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답지 않게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한센에게 맡겼더니 일이 엉망이었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긴 본인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는 예전과 다른 선택을 할 생각이 없었다.
“황궁이든, 어디든 찾아내 죽여.”
후작은 그녀가 여동생의 손을 잡고 평온과 행복을 찾아, 자신을 떠나는 걸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
비앙카가 서재에 앉아서 책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젤의 옆에 섰다. 지젤은 그런 비앙카를 쳐다보지 않고 역사책에 붙은 지도를 펼쳤다.
“평생 걸어도 다 가보지 못할, 이 넓은 땅덩이에서 왜 하필 후작과 엮였을까.”
후작이 전쟁에서 죽었더라면 많이 달라졌겠지. 아닌가? 이안과도 결국엔 안 좋게 끝났으려나. 비앙카는 한숨을 쉬며 지도를 내려다보는 지젤을 슬쩍 살피고 창가에 몸을 기대섰다. 역시 뭔가 이상했다. 점심이 지났는데도 한센 경과 기사 몇 명이 보이지 않았다.
“한센 경이 정예 기사들 몇몇을 데리고 사라졌는데,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왕궁에 간 건 아니고?”
“확인은 해볼 텐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침에 후작님과 영지를 돌아보고는 저택에 왔다가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급하게 채비해서 떠나는 것 같은데, 기사들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면 멀리 가는 분위기더군요.”
지젤이 푸른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삐죽였다. 어린 왕자에게 무거운 왕관을 어떻게 씌워야 잡음이 덜할지. 그 고민만으로도 바쁠 사람이 제일 가까이하는 충신을 어디다 써먹으려고?
“따라갈 수 있겠어?”
“몇 시간 안 지났으니 지금 가면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다만, 새벽까지 돌아오지 못할 거리를 가는 거라면.”
새벽에 후작과 지젤이 나눠 마실 차를 만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지젤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용량이 갑자기 줄면, 후작이 눈치챌지도 몰라. 네가 안 돌아오면 미아에게 부탁할게. 홍차에 섞어놓고 가.”
“그렇게 하면, 치사량 이상을 드시게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말씀드렸지만 미아는.”
비앙카가 상처가 난 손을 지젤에게 내보였다. 뼈마디가 굵은 엄지와 검지 사이에 푹 파인 상처가 미아의 것과 비슷했다. 지젤의 눈앞에서 무언가의 목을 조르듯 얇은 빨랫줄을 팽팽하게 감아 보였던 비앙카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일러줬다.
“단순히 시체를 끌어 내리기만 한 게 절대 아니니까, 가까이하지 마세요.”
너무 위험해요. 비앙카의 경고에 지젤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며 미소 지었다. 지젤과는 색이 좀 다른 붉은 머리카락이 힘없이 흐트러졌다.
“내가 언제는 그런 걸 무서워했니?”
“지젤 님.”
“괜찮으니, 어서 가.”
비앙카는 여유롭게 다시 지도를 눈에 담는 지젤을 내려다봤다. 가련하고 애잔한 사람. 비앙카는 항상 지젤이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동시에 자기희생을 기반으로 한 맹목적인 욕망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받은 만큼 돌려주기 위해, 기꺼이 진흙탕에 몸을 내던지는 사람.
비앙카의 형은 돈만 받고 끝내면 되는 일에 너무 몰두한 그를 걱정했지만, 그는 아직 후작 부인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이 사람의 끝이 어떨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