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82)화 (82/135)

82.

이안은 목구멍에 튀어나오는 가시 돋친 말들을 억지로 삼켜냈다. 그러고는 최대한 미소 지으며 지젤에게 설명했다.

“후작이 나한테 네가 날 기억 못 하니 떠나라고 했던 걸 생각해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또?”

이안은 지젤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내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시궁창에서 뒹굴면 이런 기분일까. 지젤이 노심초사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기분이 더러웠다.

“또 무슨 말을 했는데?”

지젤이 다급하게 그를 재촉하는 걸 보면서, 이안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엘리야가 대체 어디 있을까. 이엘리야를 하루빨리 찾아서, 과거에 미련 버리고 황국 가서 단란하게 살자고 하면 따라올 것 같았다. 지젤은 지쳤고, 휴식이 필요하니 꼭 안아주면서 설득하면 따라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이엘리야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이야기하자니, 놀라기만 놀라고 거짓말쟁이 취급할 것 같은데.

“이안.”

지젤의 재촉에 이안은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 안 했는데, 후작은 네가 나 기억하는지 몰라. 얘기하는 걸 보면 그래.”

이안의 한숨 섞인 대답에 지젤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럼, 그냥 추문의 상대가 하필 이안이라 예민하게 구는 건가? 옛날 얘기까지 하자니 후작 본인이 불리하니 들추지 않는 거고. 그래서 변명조차 듣지 않겠다고 하는 건가.

“근데, 그게 중요해?”

“응.”

“왜?”

당연히 중요하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제 와 신뢰를 잃으면 여태까지 해왔던 일들이 다 무너질지 모르니까. 지젤은 그걸 입 밖으로 꺼내 설명하려다가 관뒀다. 그래봤자, 황국으로 가자는 얘기만 할 게 뻔했다.

“넌 몰라도 괜찮아.”

지젤의 말에 이안이 가만히 뭔가 생각하다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래, 그럼.”

누가 봐도 심술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속삭였다.

“공평하게, 나도 비밀 만들면 되지.”

“무슨 비밀?”

“비밀을 말해주면, 그게 비밀인가.”

“유치해라.”

지젤은 어린애처럼 말씨름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허리에 감긴 그의 굵은 팔을 툭툭 쳤다.

“이제 가자.”

“매정도 해라. 네 용건만 끝나면 다야?”

“응.”

지젤이 눈썹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이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말캉한 살덩이를 아프지 않게 깨문 이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얄미워.

“읏!”

어딜 물어? 놀란 몸을 움츠리며 인상을 확 찌푸렸다.

“개야? 왜 다들-.”

나를 물어뜯는 거야? 지젤이 뒷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상했다. 아까 다이한이 화를 내며 어깨를 물어뜯었을 때는 좀 통쾌했는데, 지금은 불안했다. 이안이 어깨를 보게 되면 어쩌지. 보고 실망하고, 진저리를 치면 어쩌지. 그게 당연한 일인데, 그녀는 그걸 보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건지, 대뜸 이안이 그녀를 위로했다.

“뭘? 놔, 이제 자러 갈 거야.”

이안은 퉁명스럽게 말하는 지젤의 귓바퀴를 핥아 내리고는 뺨에 짧게 키스했다. 도장을 꾹 찍어내듯 입 맞춘 그가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고정시킨 뒤 왼손을 움직였다.

“하지 마.”

“미안, 잠깐만.”

“하지 말라고!”

지젤이 바둥거리는데,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그녀의 어깨를 가리고 있던 실크 잠옷을 끌어 내렸다. 하얀 피부에 선명히 남은 잇자국과 멍을 확인한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뜻 모를 침묵이 무겁게 지젤의 숨통을 죄어왔다. 지젤이 이를 악물고 이안을 원망했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했잖아.”

맹세하건대 이안은 지금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지금 누워서 처주무시고 계실 후작님 목을 비틀어놓고 싶을 뿐이었다. 정말 단 1분이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진심으로 온 마음 다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누구는 아까워서 잡는 것도 조심하는데, 이 개새끼가. 누구는 깨질까 봐 조심조심 손에 쥐고 있기도 무서운데. 애초에 말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지젤이 허락만 한다면 그는 당장에 다이한의 대가리를 깨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안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후작의 죽음이 지금 당장 필요한 합당한 이유를 5개쯤 정리하고 있었다.

“보니까, 속이 시원해?”

날카롭게 쏘아붙인 지젤이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지젤은 이안이 그걸 보고 연상시킬 일들이 수치스러웠다. 이안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자신을 노려보는 지젤을 마주 봤다. 지젤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그는 자신의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내가 미안.”

그가 사과하며 그녀의 어깨 위에 입 맞췄다. 그게 지젤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스스로가 구질구질했다. 구차하게 네가 안 떠난다는 핑계로 너한테 안겨 있으니,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일까.

“네가 뭐가 미안해? 네가 왜 사과해?”

“네가 싫다고 했는데 욕심내서 확인했잖아.”

그의 정중한 사과에 속이 메스꺼워진 지젤이 일어서려고 했으나, 이안은 놓아주지 않았다.

“지젤, 나한테 숨기지 마, 응?”

이안의 낮은 목소리가 유난히 더 낮게 들렸다. 이안이 그런 지젤의 등에 톡 이마를 기대고 고해성사하듯 고백했다.

“네가 나한테서 숨기면 아닌 거 아는데, 네가 그 새끼 감싸는 것처럼 보여.”

그가 이를 악물고 있는 표정과 상반되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이안은 지금 지젤이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젤을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 새끼 죽일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아니야, 그래서 그러는 건 아니야.”

지젤이 허리에 감긴 이안의 팔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게 아니었다. 지젤이 숨기고 싶은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멍청하게 거기까지도 생각 못 했다. 그걸 알면서도 튀어나온 질투는 비열한 말을 쏟아냈다.

“그러면 정말 무슨 내연남이라도 된 것 같아서. 후작한테 밀려난 것 같아서 기분 더러워져.”

내연남. 지젤은 갑자기 나탈리가 생각나서 작게 탄식했다. 솔직하게 욕망을 쫓는 나탈리랑 내가 뭐가 다를까? 지젤은 자신이 이안을 망치고 있다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복수를 집어치우고 널 따라갈 용기도 없는, 가치 없는 사람이야. 지난 5년간 갉아먹어 남아있지 않은 자존감은 또 그녀를 손쉽게 자학으로 내몰았다.

“하나만 대답해.”

이안은 문득 아니라고 대답해주지 않는 지젤을 보며 불안해졌다. 후작을 단순히 미워하는 게 아니라, 애증이라면?

“네 인생의 불청객은 내가 아니야.”

“이안.”

지젤이 그의 이름을 한숨처럼 내뱉고 눈을 감았다.

“맞아?”

불안해, 대답해줘. 이안의 말에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지젤의 인생에 불청객이 될 수 없었다. 한때 지젤의 전부였고, 유일한 연인이었다. 그때 이안은 그녀의 미래였으며, 행복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보내줘야 공평했다. 지젤은 이안의 행복이 될 수 없었다.

“절대 아니야.”

지젤의 말에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 그거면 괜찮아. 참아볼게. 버틸 수 있어. 질투와 분노에 마음이 저며지는 통증을 무시한 이안이 그녀의 뺨에 연신 입 맞췄다. 지젤은 말없이 그런 이안을 받아줬다.

***

창고 구석에서 벽을 보고 앉은 미아는 코를 훌쩍이며 퉁퉁 부은 눈으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억울해.”

내 딴에는 희생한 건데,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갇혀있어야 한다니. 후작님은 무섭게 쏘아붙이기만 하시고, 창고에서 한 발도 못 나가게 했다. 무엇보다 지젤이 한 번도 보러 오지 않는다는 게, 그게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그녀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지젤 님, 흐엉-.”

할 게 많은데, 지젤 님 드레스 중에 레이스 뜯어진 게 몇 벌 있었다. 그것도 다듬고 창틀도 닦아야 하고 날씨 더 추워지기 전에 커튼도 세탁해야 하는데, 언제 나갈 수 있는 거지. 요리사의 막내 보조도 주방에 들어온 쥐를 잡으면 칭찬을 받는데, 나는 왜 벌을 받을까.

“미아.”

그녀가 엉엉 우는 사이에 소리 없이 들어선 지젤이 미아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지젤 님!”

무릎 꿇고 앉아있던 미아가 와락 지젤의 허리를 끌어안고 크게 소리 내 울었다.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지젤이 미아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울고 있어?”

“억울해요, 지젤 님. 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지젤 님도 절 보러 안 오시고-”

“쉿, 후작님 몰래 온 거야. 조용히 해야 해.”

“네.”

미아가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지젤은 그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작게 웃었다. 이럴 때만 말을 잘 들었다.

“너도 놀랐지? 어쩌다가 발견한 거야?”

“빨래를 널려고 간 건데, 갑자기-. 잘 모르겠어요.”

미아가 울상 짓자, 지젤이 그 표정을 가만 살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놀랐겠네, 손 다쳤다며?”

“조금요. 근데 괜찮아요.”

지젤의 걱정 어린 질문에 미아가 휙 앞치마 밑으로 손을 숨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봐, 보고 의원이라도 부르게.”

“아니에요, 제가 죽은 줄 모르고 놀라서 끌어 내리려다가 조금 쓸렸어요.”

지젤은 미아가 도리질하는 걸 가볍게 무시하고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미아가 어쩔 수 없이 양손을 지젤에게 내밀자 그녀가 다정하게 그 손을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엄지와 검지 사이가 쓸렸다기보다는 파여 있었다. 지젤은 비앙카가 말한 이상한 점들에 대해 고민하며 잠시 침묵했다. 미아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인가?

“지젤 님, 저 정말 괜찮아요. 나가게 해주세요.”

“많이 다쳤잖아. 손가락도 전체적으로 퉁퉁 부어있네. 의원을 불러줄게.”

“아니에요, 세상 어느 후작가가 하녀가 다쳤다고 의원을 부르나요. 이런 건 차가운 물에 냉찜질하면 금방 나아요.”

“그럼, 약초라도 바를 수 있게 집사에게 말해 놓을게.”

지젤이 미소를 잃지 않고 미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나가려는 듯 굴자 미아는 다급해졌다. 미아가 지젤의 드레스 끝자락을 꼭 쥐고 고개를 기울였다.

“저 진짜 할 일 많은데, 얼마나 여기 더 있어야 해요?”

“하루 이틀이면 될 것 같으니, 이 김에 푹 쉰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지젤 님 식사며, 드레스랑 침실 정리도 해드려야 하는걸요? 저 없으면 또 식사 대충 하시고, 잠도 제때 안 주무실 거잖아요.”

미아가 걱정을 가득 담아 지젤을 올려다보자, 지젤이 입을 작게 벌린 채로 눈을 깜빡였다.

“지젤 님, 날씨 추워지는데 답답하다고 창문 열고 주무시지 마세요. 그런 걸 제가 옆에서 챙겨드려야 하는데, 비앙카는 무심해서 그런 걸 안 챙기잖아요.”

“미아.”

잠시 그대로 서있던 지젤이 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미소 지었다.

“일단, 쉬어.”

끼니랑 약초 챙기라 할 테니까. 깔끔하게 대답한 지젤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고를 벗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숨겨진 원한 관계라도 있지 않은 이상 미아가 그 여자를 죽일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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