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81)화 (81/135)

81.

“문제?”

그제야 엘레노어가 쪽지 내용을 확인하고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근데? 이게 뭐든. 감히 내 얼굴에 집어 던져? 엘레노어는 정말로 태어나서, 한 번을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꽃으로라도 맞아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

“이게 뭐라고, 네가 감히 나에게 모욕을 주고 있는 거지? 진정 죽고 싶은가 봐?”

“내 아내 뒷조사해서 어디다 쓰려는 건지, 궁금하지 않으나.”

엘레노어는 건방지게 이를 드러내 보이며 으르렁거리는 다이한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내 저택에서 사람을 죽여 나무에 매달아 놓으면 그건 문제가 됩니다.”

“저택에서 사람이 죽었다 한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며, 이깟 종이 따위가 어떤 증거가 된다고.”

엘레노어가 침대에서 서서히 일어서며 자신보다 훨씬 큰 다이한을 내려다보듯 고개를 기울였다.

“감히 나를 겁박해?”

“아니. 친절한 경고지.”

다이한이 연녹색 눈을 매섭게 뜨며 엘레노어를 내려다봤다. 다이한은 더는 놀아나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택에 시신이 나뒹굴도록 하는 남매가 지젤의 안전 따위를 생각할 리 없었다.

“마지막이니, 당신 동생 데리고 당장 떠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황녀가 분에 차서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다이한은 그녀의 분노에는 관심 없었기에, 그대로 등을 돌렸다. 처음 발견했다는 하녀도 조사해봐야 했다. 미아라는 그 하녀, 지젤에게 묘하게 애착을 가지기에 내버려뒀는데 지금은 골칫덩이였다.

“후작, 지금 만회할 수 없는 실수를 한 거야.”

내가 그래도 유일하게 나름의 중립적 위치를 고집하고 있는데. 이런 식의 무례와 홀대는 매우 불쾌하지. 엘레노어는 당장 다이한의 사지를 찢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눈썹을 까딱였다.

“날 적으로 돌리면 곤란한 건 자네야.”

다이한은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그대로 그곳을 벗어나려 했으나, 엘레노어가 말을 이었다. 그녀는 그의 약점을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후작 부인이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한다며?”

자기 부인이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 믿는 그를 괴롭히는 건 간단했다. 지젤은 그러는 척을 하고 있는 거니까. 엘레노어 특유의 날카롭고도 매서운 목소리가 다이한의 발목을 물어뜯었다. 다이한은 짙은 한숨을 한 번 내뱉고는 다시 뒤돌아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고는 건방진 황녀에게 친절하게 일러줬다.

“내 아내 거론해서,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게 좋을 텐데.”

“뒷조사. 그래, 내가 좀 궁금하지 뭐야? 사연 듣고 보니 애잔해서 마음이 찢어질 것 같던데.”

정확하게는 제인과 이안이 들쑤시고 다니는 거였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엘레노어는 이 건방진 후작을 무릎 꿇게 할 생각이었다.

“자네가 싫어서, 몇 번을 죽으려고 했던 여자가 지금은 저렇게 말을 잘 듣고 착하게 구니 얼마나 좋을까.”

눈을 찡긋거린 엘레노어가 이해한다는 듯 다이한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겉으로나마 참으로 단란하고 사랑 넘치는 부부니. 황태자가 기억도 못 하는 옛 추억을 빌미 삼아 옆에서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를 않지. 떠날 생각은커녕 밀어낼 생각만 하는 현명한 여자야.”

엘레노어가 구겨진 종이쪽지를 다이한의 얼굴에 집어 던지며 입을 열었다.

“근데, 만약에 말이지.”

다이한은 엘레노어가 무슨 말을 해도 귀담아듣지 않을 생각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죽은 동생이 살아 돌아오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에 다이한이 그대로 몸을 굳히고 바닥으로 추락한 종이 뭉치를 내려다봤다.

“몇 년 만에 살아 돌아온 동생이 네 남편이 날 불태워 죽이려 했다, 원통함을 담은 고백이라도 하면.”

엘레노어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후작을 향해 비소 지었다. 그녀는 지젤이 기억을 잃은 척하니 어쩌니 같은 가벼운 협박보다 더 잔인하고 날카로운 검을 골라 뽑아 들었다.

“그래도 널 안 떠날까?”

나 같으면, 치가 떨리고 분에 겨워서 당장에 황태자 따라 황국으로 가버릴 것 같은데.

“후작의 생각은 어떤가?”

다이한은 잠시, 그대로 잠시 엘레노어가 하는 소리가 대체 무슨 뜻인지 고민해야 했다. 살아있다고? 검은 머리 사내라는 말에 섣불리 미하엘이라 생각해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건 그의 불찰이었지만. 분명 그의 눈으로 남작과 그 딸의 시신을 확인했었다. 오랜 시간 불타서 의복이며 유품이 남은 게 없었지만, 애초에 저택에 남작과 딸이 있는 걸 확인하고 불태웠는데?

“아니지.”

엘레노어가 짝- 박수 치며 과장되게 탄식했다. 명백하게 다이한을 조롱하는 행동이었다.

“그럼 결론적으로 죽은 사람은 아비밖에 없으니. 네 죄가 덜어지는 건가?”

다이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의 죄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 지젤이 했던 원망과 짐작이 사실이 될 뿐이었다. 다만, 이걸 전부 알게 되면 지젤은 미련 없이 자신을 떠날 게 분명했다.

“살아있다고?”

“내가 후작과 우리의 공생관계를 존중해서 지난 5년 동안 입 다물고 있었을 뿐이지. 자네는 말 잘 듣는 개니까.”

물론, 후작 부인은 이걸 열심히 숨기고 있던 자신을 원망하겠지만 괜찮았다. 그 여자가 날 미워하는 게. 뭐? 해서 어떻게 할 건데? 엘레노어는 후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게 꽤 마음에 들어서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헌데, 이런 식으로 감사함은 둘째 치고 나에게 무례하게 굴면.”

다이한은 이명이 귀를 찢어서, 엘레노어의 다음 말들을 들을 수가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이엘리야가 왕국으로 돌아와서 모든 걸 알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게 되면, 지젤은 정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터였다.

“내가 기꺼이 자매의 상봉을 돕고, 5년 전 화재에 대해 조사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까? 그렇게 이안과 후작 부인이 황국으로 가는 데 협조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엘레노어는 상태가 좀 이상해 보이는 다이한을 슬쩍 훑어보고 코웃음 쳤다. 뭣도 아닌 새끼가. 마음 같아서는 정말 한 대 후려치고 싶지만, 아직은 필요한 남자니 업보로 쌓아두는 게 현명했다.

“그러니, 내게 나가라는 둥. 어쩌고 명령하지 말고 입 닥치고 있게.”

다이한은 황녀의 그 말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멀어졌다 생각했지만, 어느새 코앞에 닥친 진실이 슬금슬금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그 공포는 곧 조바심으로 바뀌어서 그를 잠식했다. 욕심의 대가를 치르겠다고 자만했으나, 그건 지젤이 옆에 있을 때 이야기였다. 그는 지젤이 자신을 두고 등 돌리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온 이안은 저택의 2층 복도를 걸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일이 계속 꼬이기만 하고, 진척이 없었다. 지젤은 고집스럽게 같이 떠나지 않을 것처럼 굴었고, 후작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엘레노어는 욕지거리를 해대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제인이 죽은 여자가 아마 자신을 찾아왔던 것 같다며, 제 불찰이라 고개 숙였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데려갈 수 있을까.”

착하게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그의 인내심은 그리 두텁지 못했다. 지젤이 원하는 게 후작의 몰락과 절망이라면, 그건 쉬웠다. 5년 전의 일들을 다 뒤집어놓고 증거든, 증인이든 만들어서 죄를 벌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이제 곧 황제가 될 테니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근데, 단순히 그게 다가 아니라면? 일차원적인 원망과 분노가 아니라.

“쉿.”

생각에 몰두하며 맨 끝 자신의 침실을 향해 걷던 이안은 자신의 입을 턱 막은 작은 손을 보고 작게 웃었다. 얇은 흰색 잠옷만 걸친 차림으로 선 지젤이 그의 웃음에 얼굴을 찡그렸다.

“왜 웃어?”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한 번 더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여태 자신을 기다리느라 숨어있었던 게 귀엽게 느껴졌다. 기둥 뒤에 숨어있던 지젤이 그런 이안을 이상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따라오라는 듯한 그녀의 행동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걸음을 옮겼다.

“이쪽.”

지젤은 제일 구석진 손님방의 문을 소리 없이 열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손님방 중에서도 제일 작아서 아예 사용하지 않는 방에 들어선 이안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작은 방은 창문이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거기에 촛불조차 없어 지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창문을 가려놓은 판자 사이로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의존해야 했다.

“어디든 좋기는 하지만, 이왕이면 로맨틱한 곳에서 하면 안 될까?”

여긴 복도보다 어둡고, 침대도 너무 작은데. 이안의 말에 지젤이 문을 조용히 닫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뭐라는 거야.

“뭐?”

“우리 밀회 말이야.”

밀회라니. 지젤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야. 저택 안에서 일체 신체접촉 안 할 거야. 물어볼 게 있어서 부른 거니까 괜한 소리 하지도 마.”

“저택 밖에서는?”

이안이 작게 소리 내 웃는데, 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뜬 그녀가 알 수 있는 건, 그의 붉은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긋고 있다는 정도였다. 푸른 달빛을 머금은 이안의 하얀 피부는 평소보다 더 하얗게 보여서 이질적이었다.

“시간 없으니까,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마.”

“응.”

이안이 의자에 얌전히 기대앉아서는 지젤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지젤이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자, 그가 처연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울상 지었다.

“오늘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는데,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침한 방으로 불러놓고. 손도 안 잡아 준다고?”

지젤은 이안의 입꼬리가 한없이 내려가는 걸 보면서 작게 한숨 쉬고는 그에게 다가섰다.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그러자, 이안이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제 무릎 위에 앉히고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순식간에 그의 허벅지에 올라앉아 그에게 등을 기대게 된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신을 봤다며, 놀라지는 않았고?”

무서웠을 텐데. 이안이 작게 속삭이며 그녀의 목에 입 맞추자, 반사적으로 그녀가 다이한에게 물어뜯겼던 어깨를 오른손으로 가렸다. 옷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걸 본 이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지젤은 그 표정을 보지 못하고 은밀하게 불러낸 목적을 꺼내 들었다.

“후작이 네가 그때 그 미하엘인 걸 아는 거지?”

기껏 불러놓고 한다는 이야기가 후작. 이안이 한숨 쉬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

“그럼, 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 그런 얘기를 한 거야? 후작이 뭔가 눈치챈 거지?”

지젤이 놀란 표정으로 아니, 정확하게는 절박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묻는 말에 이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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