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다이한은 제대로 그녀를 가진 적이 없었기에, 소유물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못했다. 그가 매서운 연녹색 눈으로 집요하게 지젤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이내 그녀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반항의 의미로 이를 악물고 있던 지젤은 어쩔 수 없이 입술을 열어줬다. 우악스럽게 잡힌 손목이 뒤틀릴 것같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그 틈을 파고들며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젤은 아픔을 동반해야만, 그를 받아들였다. 이러면서, 내 소유이기 때문이냐고? 그는 그녀가 원하는 말을 알고 있었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 말을 들은 지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내가 너를 애타게 원한다, 그리 고백하면 뭔가 달라지나?
입 안을 유린하는 거칠고 자비 없는 그 행위가 길어질수록 지젤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걸 알면서도 다이한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갈급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입맞춤이었다.
“후작님!”
한센 경이 쾅쾅- 침실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다이한이 멈칫하는 순간, 지젤이 고개를 휙 옆으로 빼냈다. 그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사람처럼 호흡을 가다듬는 지젤을 보며 다이한은 쓰게 웃었다. 전의를 상실했는지 축 늘어진 지젤을 그는 기꺼이 만끽했다.
“후작님! 나와보셔야 합니다!”
한센이 다급하게 그를 부르자, 지젤이 문을 향해 눈짓했다. 그럼에도 다이한은 멈추지 않고, 그녀의 턱에 입 맞추고는 그 밑으로 내려갔다. 목에 닿는 그의 체온이 뜨거워서, 지젤은 몸을 움츠렸다.
보통의 한센 경이라면, 후작을 저렇게 무례하게 노크하며 부르지 않을 텐데. 그것도 침실에 들어와 있는데 말이지. 다이한의 분노를 그저 받아내기로 한 지젤이 인형처럼 누워서 생각했다. 또 왕궁에 무슨 일이 있나?
“어딜 봐.”
한센이 소리 지르는 게 이상한지, 지젤이 미간을 구기고 문을 바라보자 그가 그걸 제지했다.
“나한테 집중해.”
지젤의 푸른 눈에 오롯하게 담기고 싶은 모순적인 독점욕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다이한은 이 탐욕을 달랠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힘으로 억눌러서라도 품 안에 끌어안고 있으면, 그렇게라도 쥐고 있으면 숨통이 트였다. 비겁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다이한 님!”
한센이 발을 동동거리며 그를 불렀지만, 다이한은 지젤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여린 살을 한입에 베어 물듯 이를 세워 잇자국을 남겼다.
“후작님!”
한센이 결국 허락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가 놀라서 굳어 들었다. 등받이에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눕혀진 후작 부인 위로 후작이 올라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인지한 한센이 황급히 문을 반쯤 닫았다. 다이한은 그런 한센을 보지도 않고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
“후작님, 지금 말씀드려야 하는 일입니다.”
한센이 드물게 물러나지 않고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들어오지 말고 말해.”
지젤은 자신을 꽉 끌어안고 한숨을 토해내는 후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정원에-”
한센이 심약한 지젤의 앞에서 이런 걸 말해도 되나 고민돼서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사람이 목매달아 죽어있습니다.”
드물게 지젤과 다이한이 동시에 놀라서 서로를 바라봤다. 다이한이 기묘한 표정으로 지젤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젤은 지젤 나름대로 그 시선이 당황스러워서 눈을 끔뻑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안 했는데, 후작이 힐난하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어서 억울했기 때문이었다. 왜 날 그렇게 봐? 지젤이 되레 의아하다는 듯 후작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다이한은 아무 말 없이 한센을 따라 그대로 먼저 침실을 나가버렸다.
***
“그럼, 저택 사람도 아니야?”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시신 주위에서 얼쩡거리다 쫓겨난 사용인들이 저택으로 들어서며 수군거렸다.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선 지젤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정원으로 향했다. 누가, 대체 왜. 그것도 정원에서 죽었다는 건지. 잰걸음으로 저택을 나선 지젤은 잠깐 고민하다가 비앙카에게 물었다.
“후작님이.”
“네.”
사람이 죽었다는데, 날 그런 표정으로 보는 이유가 뭐지? 지젤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후작은 방금 황태자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알아서 화를 냈다. 근데 이유는 듣고 싶지 않다고? 원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정말로 그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후작이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믿고 있는 게 맞나? 이안이 미하엘과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아서 저러는 건가?
“지젤 님?”
“아니, 이건 나중에. 일단 대체 누가 죽었나 확인해보고.”
지젤이 일단 급한 일부터 해결하기 위해 정원 구석을 향해 걸었다. 문제의 장소에 도착하자, 집사와 하인 몇 명이 수풀 사이에 시신을 끌어내고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수습하고 있는 분위기에 지젤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무 앞에 선 다이한이 무표정하게 시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이는데, 지젤이 바로 그 옆에 서서 얼굴을 찌푸렸다. 천으로 몸 전체를 가려놓아서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갈색 긴 머리가 천 밖으로 흘러나와 있었다. 여자?
“어떻게 된 일이죠?”
지젤의 질문에 다이한은 미간을 확 구기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지젤이 시신을 보기 위해 한발 더 딛자 그가 그녀의 오른팔을 확 잡아당겼다.
“겁 없이 함부로 가까이 가지 마.”
시체가 부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죽은 여자인지 정확하게 모르니 병이 옮을지도 몰랐다. 지젤은 병약했고, 그는 항상 그걸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후작님, 정확하지는 않지만 샤론 같습니다.”
행색도 지저분하고, 너무 말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것 같았다. 집사가 긴가민가하면서 다이한에게 하는 말에 그는 눈썹을 까딱였다.
“누구?”
“그-. 몇 년 전에 도망쳤던 하녀 말입니다. 야반도주했지 않습니까.”
“아, 그때.”
지젤이 다이한 대신 탄식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눈썹을 어그러트렸다. 샤론. 이유는 정확하게 못 들었었지만, 후작의 심기를 거슬러 외곽 별장으로 보내려고 한다 했었지. 하여튼, 그 머리채 잡혔던 여자애가 왜 하필 여기 와서 목을 매달아 죽었을까. 무슨 억울함이 있어서?
“누가 제일 먼저 발견했지?”
다이한의 물음에 한센이 급하게 대답했다.
“미아입니다.”
“미아가?”
지젤이 놀라서 한센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빨래를 널다가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나무에 뭐가 매달려있길래 가까이 갔다가 사람인 걸 확인하고, 놀라서 급하게 끌어 내렸다고 합니다. 손을 다쳤다고 해서 일단 저택 안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한센의 설명에 비앙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를 올려다봤다. 목매단 시신을 보통 혼자 끌어 내리나? 그것도 겁쟁이 미아가? 비앙카가 나뭇가지를 유심히 살피며 고개를 기울였다. 자국이 좀 남아있기는 하지만, 저 정도 굵기의 나뭇가지에 목매달아 질식사할 정도면 보통은 부러지지.
“미아에게 가봐야겠네요.”
지젤이 급하게 몸을 돌려 저택으로 가려는데, 다이한이 그런 지젤의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조사를 끝내기 전까지는 만나지 마.”
“손을 다쳤다니까 그것만 확인할게요.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아끼는 아이인지.”
“같은 말 두 번 반복하게 하지 마.”
항상 말하잖아. 그녀의 부탁을 일축한 다이한이 집사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후작 부인 놀라신 것 같으니, 침실로 모셔.”
다이한의 단호한 태도에 비앙카는 후작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걸 알아챘다. 미아의 이야기는 그럴듯했지만 조잡했다. 따지고 보면 석연치 않았다.
“후작님! 이 여자, 쪽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쪽지?”
하인이 죽은 샤론의 옷 주머니를 뒤적이다 찾아낸 종이를 후작에게 내밀었다. 후작은 구겨진 종이 쪼가리를 펼쳐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종이를 꽉 움켜쥐고 손을 바르르 떨었다.
[황국에서 오신 기사님께. 후작 부인에 관해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걸 옆에서 본 지젤은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전에 일하던 하녀한테 뭔가 듣고 싶었나? 더 드릴 말씀이 있다는 건, 이미 이야기한 게 있다는 뜻이었다. 황국 기사단이 뒷조사를 안 하리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건 너무 노골적이네. 이안일까, 아니면 엘레노어일까.
“내가 잘나신 황녀 좀 뵈어야겠으니, 후작 부인 안으로 모셔.”
다이한이 집사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하는 말에 지젤은 순순히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게 황녀이든, 황태자든. 저런 식으로 들쑤시고 다니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스치듯 본 다이한의 표정이 살벌한 걸 확인한 그녀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 소란을 핑계로 드디어 이안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침실에 누워서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을 즐기고 있던 엘레노어는 이렇게 쉬는 게 얼마 만인가 고민했다. 황궁에서는 항상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는데, 조용한 침실에서 혼자 누워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눈을 희번덕이며 여기저기 나다니는 이안 쫓아다니기를 포기하니, 마음도 좀 편했다. 후작 부인 눈치를 봐서라도 큰 사고 안 칠 테니 괜찮지.
“과일이나 좀 가져다달라 할까.”
누워있으니 입이 심심하네. 그녀가 길게 하품을 하고 입을 닫음과 동시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예고도 없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엘레노어는 말 그대로 무례하게 침실에 들어선 후작과 후작가의 기사들에 의해 밀려나 있는 호위기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무슨 무례지?”
다이한은 팔자 좋게 누워서 인상을 찌푸리는 엘레노어의 얼굴에 쪽지를 집어 던졌다.
“하.”
얼굴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든 엘레노어가 기가 막히다는 듯 숨을 토해내고 눈을 희번덕였다.
“네가 죽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오늘 당장 떠나신다면 문제 만들지 않겠습니다.”
다이한이 매서운 눈으로 엘레노어를 내려다보며 잇새로 말을 짓씹어내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