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78)화 (78/135)

78.

“우리 둘째 바보. 엘 찾았니?”

눈을 감고 정원에 앉은 엘레노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물었다. 명색이 후작이란 인간의 정원이 칙칙하다 못해 음산했다. 미적 감각이 아예 없는 건가.

“아니요.”

제인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의도적으로 울상 지었다.

“오다가 길 잃으신 게 확실합니다. 지금쯤이면 도착하시고도 남았어야 하는데요.”

“그렇겠지, 애가 어디 먼 길 다녀 봤어야 지도라도 똑바로 보지. 세상 험한 줄 모르는 멍청이.”

툴툴거린 것과는 다르게 걱정이 되는지 입을 샐쭉거리는 엘레노어를 보며, 제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후작 부인께 알려야 하지 않나요?”

“왜.”

황녀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제인이 고개를 들고 입술을 오므렸다. 가족이니까, 당연히 알려야죠?

“애초에 이안 님께서 오신 이유도, 분위기 보고 은밀하게나마 살아있다고 전하기 위함 아닌가요?”

제인은 황녀가 여태 이안이 왕국에 가지 못하도록 하고, 동시에 엘을 감시하고 있던 걸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좀 국정이 안정되고, 이안이 결혼하기 전 미련 털러 가는 것 같으니 허락해준 거지. 원래라면 머리채를 끌어다 황궁에 박아뒀을 사람이지.

“5년 전에도 말했지만. 후작이 다루기 까다롭기는 해도 우리가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크게 우리 뜻 거스르지 않고 꼬박꼬박 조공이며, 전쟁이며 협조할 사람인데. 왜?”

그래서 저 불쌍한 후작 부인한테 얘기 안 해준다고? 제인은 이쯤 되니 새삼 엘레노어에게 정이 떨어졌다.

“옛날 일이라지만, 그것도 꽤나 정통성 있는 남작가를 불태운 범인이 후작이라고 들쑤셔놓으면 그 역할을 누가 대신하지? 그 이유가 뭐였든, 다들 받아들이기 힘들어할걸? 그럼 일에 지장이 생겨. 왕비도 죽은 마당에. 여덟 살짜리 왕자는 조금만 겁줘도 징징 울고 자빠질 텐데.”

“왕비님 아직은 안 죽었습니다.”

“어쨌든,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

엘레노어가 제인의 지적을 가볍게 넘기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와보니 상황도 이상하게 돌아가고, 후작 부부도 마냥 단란한 것 같지 않으니. 엘 얘기는 하지 않고 돌아가는 걸로 해. 일이 꼬이면 골치 아파.”

“그거 이안 님이 동의하세요?”

“그 부분에 대해서 불필요한 언쟁이 좀 있기는 했지.”

그렇지만 멍청한 남동생은 후작 부인을 유리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여겼고, 엘레노어는 그걸 잘 이용하는 못된 누나였다.

“엘이 지금 행방불명인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냐. 후작 부인 몸도 약한데 충격받아 죽을지 모르니, 안정될 시간을 주라고 달래놓았지. 이제 제인 경만 입조심하면 되겠네.”

엘, 빨리 잡아서 황국에 미리 데려다 놓고. 제인이 그 여유로운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근질거리는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 님, 혹시 양심이라는 걸 가지고는 계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닌가 봐요. 제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내가 유일한 목격자이자, 생존자인 엘을 죽였니? 예뻐해주고, 공부시켜주고 데리고 다니면서 막냇동생처럼 대우해줬잖아? 걔가 황궁을 못 나갈 뿐이지, 밥을 굶어 아니면 구박받기를 해?”

네가 말한 양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니까 잘해준 거지. 엘레노어가 눈썹을 까딱이며 하는 말에 제인은 질문을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인간성이 있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제인은 혼자 생각을 정리하다 끄응 앓았다.

“솔직히 5년 동안 군말 없이 황국에 머문 이유가, 후작이 아버지인 남작을 죽인 걸 그- 지젤 님이 묵인하시는 줄 알아서잖아요. 저 그게 좀 양심에 찔려요.”

황녀님과 다르게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라 좀 많이 찔려요. 정말로 제인은 그 부분이 찝찝했다.

“엘 님이, 제 손수건에 자수도 놓아주시고. 여하튼 유일하게 사람 취급 해주신 분이라서 더 그런가 봐요.”

평소에 두 남매분들이 잘해주셨다면, 또 모르는 일이지만. 그 살얼음판에서 유일하게 다정다감하신 분이이니까요. 제인의 말에 엘레노어가 깊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일이 더럽게 꼬여서는. 죽이려면 깔끔하게 진짜로 다 죽여버리든가 했어야지.”

제인은 엘레노어의 말에 가만히 생각하다가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후작이 개새끼네요.”

“멍청한 새끼지.”

엘레노어 황녀와 제인 경은 동시에 후작을 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은 조금 달라도 결론적으로 참 잘 맞는 사람들이었다.

***

리안나는 가면을 결정하고도 표정이 어색한 지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지. 평소라면, 계속 미소 짓고 있을 텐데. 내가 좀 늦었다고 그걸로 화낼 사람도 아니고. 리안나가 잠깐 고민하다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황태자랑 바람났다든가 하는 소문 때문에 후작이랑 다투기라도 했나? 공작 부인인 그녀가 보기에는 그냥 권력을 실어주기 위한 하나의 쇼였다. 황태자가 후작가를 그만큼 신뢰한다-. 이런 느낌의 정치적 행위인데, 후작 부인이 너무 젊어서 그런 소문이 나는 것 같았다.

“지젤 님, 제가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어떤 이야기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지젤이 리안나를 마주 봤다. 워낙 동안이라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제 곧 마흔이 다 되어가는 공작 부인은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놀랍게도 저 연애결혼이랍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지젤이 흥미롭다는 듯 리안나를 보며 고개를 기울이자, 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 열렬했는데, 아마 다들 모를걸요. 저희 공작님 지금은 저한테 관심 없잖아요. 지금은 정말로 공작 부인일 뿐이죠.”

절대 재밌거나, 즐거운 이야기가 아닌데. 지젤은 리안나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의도가 뭔지 궁금해서 눈을 깜빡였다.

“제 친정이 황국에 있잖아요? 약혼자도 원래는 황국 남작가의 차남이었어요. 근데 공작님이 우연히 절 보고 좋다고 쫓아다니셔서는. 저도 저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공작님이 좋았죠.”

눈만 마주쳐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그게 그렇게 좋더라구요. 리안나가 웃으며 하는 말에 지젤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럼 파혼하시고, 공작님과 만나셨던 건가요?”

“스무 살 떼쟁이들을 어떤 부모가 이기나요. 저희 부모님 반대가 심했는데 결국엔 너희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어요.”

딸을 연고도 없는 왕국에 보내기 싫어하셨거든요. 리안나가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허락받고 바로 결혼식 올리고, 딱 2년 동안 행복했어요.”

지금 우리 아들 임신하기 전까지. 리안나의 부연 설명에 지젤은 쉽게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다른 상대를 찾는 건 더럽고 불결하지만, 흔한 얘기였다.

“지금은 해탈했지만, 나도 처음엔 악을 질렀어요. 근데 그게 의미가 없는 게-. 다른 걸 다 떠나서 공작이 날 보는 표정이, 눈빛이 달라졌더라구요.”

사실 알겠지만, 조용히 받아들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하죠. 공작 부인은 사랑해주는 남편을 잃었으니, 품격이라도 지키는 게 옳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는 계속, 계속 처음 듣는 여자 이름들이 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어요. 우리 공작님, 사랑을 또 어찌나 열렬하게 하시는지. 아, 이번 나탈리는 오래 갔죠? 알고 보면 나탈리가 진정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젤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함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배려임을 아는 리안나는 미소 지었다.

“그게 그렇게 기한이 정해져 있는 감정인 줄 알았더라면, 여기 오는 선택을 안 했겠죠. 다시 돌아간다면 전 황국으로 갈 거예요.”

“지금은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지금 돌아가면, 전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되겠죠. 여기 있어야, 사랑하는 내 아들, 차기 공작의 어미라도 되지 않겠어요?”

리안나가 눈을 찡긋거리며 하는 말에 지젤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말이 잘못하면, 무례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지젤은 궁금했다.

“공작님께서 정말 사랑을 하신 걸까요?”

예상 못 했던 지젤의 물음에 리안나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리안나가 결혼 후 내내 던졌던 질문이었다. 날 사랑한 건 맞아? 사랑해서 결혼하자 한 게 아니야? 그리고 공작은 말이 없었다. 그는 항상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본인도 본인 잘못을 안다는 듯 등을 돌려 도망치고는 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리안나는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때는. 그 순간은 사랑했겠죠.”

리안나가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아쉬움으로 남겨뒀어야 했다는 후회만 가득했다.

“그러고 보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아닐까요.”

감정은 금방 변질되고, 사람은 상황에 따라 바뀌니. 리안나의 말에 지젤은 어떤 참담함을 느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잠깐 바닥만 내려다보던 지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인정했다. 이안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건, 미화된 감정이었다.

“그러네요. 서글프게도 그게 맞는 것 같네요.”

리안나는 지젤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걸 처음 봐서, 조금 놀랐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그녀를 위로했다.

“지젤 님은 충분히 사랑받고 계시니, 너무 우울해하지 마세요.”

“제가요?”

“주제넘은 소리지만 내가 옆에서 요 몇 년 동안 봤는데, 후작님은 지젤 님을 정말 아끼세요.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겠어요?”

리안나는 지젤과 후작 사이의 불화가 있다면 하루빨리 해결하기를 바랐다. 후작은 정말로 자신의 아내를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

“후작님이요?”

지젤의 오른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걸 보고, 지젤이 후작과 싸운 게 확실하다 생각한 리안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옆에서 보면, 부러울 정도로 변함이 없잖아요.”

“그랬나요?”

“그럼요. 매사 지젤 님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시니 모두가 아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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