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백작과 헤어진 지젤은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면무도회에서 쓸 드레스를 보러온 지젤은 의상실 제일 안쪽으로 자리 잡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옷이야 아무거나 입어도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후작 부인으로서 격식은 갖춰야 했다. 가면무도회 시즌이라 그런지, 서로가 어떤 옷과 가면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도록 테이블마다 붉은색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비앙카, 넌 나가 있다가 헤넌 공작 부인 오시면 모셔와.”
지젤의 말에 비앙카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붉은색 휘장을 들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앙카가 사라지고, 지젤은 자신의 뒤에 굳건히 버티고 선 기사들을 슬쩍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의상실에 따라 들어오다니, 이 정도면 감시였다.
“지젤 님, 봐두신 원단 있으실까요?”
지젤은 의상실에서 일하는 소년이 원단을 종류별로 붙여놓은 책을 무겁게 들고 오는 걸 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이제 갓 열여섯 살 혹은 열아홉 살쯤 돼 보였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을 보자, 미아가 떠올라 얕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만간 사고 칠 것 같은데, 어쩌지.
“뭐가 불편하실까요?”
“아니, 원단은 후작님과 같은-”
보통 가면무도회 때는 같은 색, 혹은 동일한 장식으로 부부임을 알렸다. 매년 했던 것처럼 같은 걸로 하려던 지젤은 이안을 떠올리고 입가를 가렸다. 지금도 이안 앞에서는 다이한의 옆에 서기가 껄끄러운데, 같은 옷을 입고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을까?
“후작님과 색을 맞추실 만한 원단을 몇 개 꺼내오겠습니다.”
지젤이 말을 하다 말았지만, 똑똑한 소년은 적당히 알아듣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걸 본 그녀의 하얀 미간이 구겨졌다. 정신 차려, 옷 색이 같은 게 창피해? 어쭙잖게 행동하면 안 돼.
그때, 누군가 서슴없이 두꺼운 휘장을 들춰내며 공간에 침범했다.
“넌 검은색이 잘 어울려.”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지젤의 옆에 털썩 앉고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지젤은 그의 허벅지를 감싸는 탄탄한 검은 바지를 내려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황태자라는 걸 대놓고 이야기하는 차림새는 아니었지만, 위아래 전부 검은색 정복을 입고 있는 그는 누가 봐도 고위층이었다. 단둘이 밀폐된 공간이라. 정말 밀회라도 즐긴다 오해받기 딱 좋았다.
“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안 바쁘세요?”
일이 없으시면, 어서 정리하시고 황국으로 가시죠. 당당하게 옆에 앉는 이안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안이 나른하게 미소 짓자, 붉은 입술이 호선을 긋고 하얀 뺨에 보조개가 푹 파였다. 지젤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의 오른손이 새삼 크고, 굵다는 생각을 했다. 흰 손등에서부터 손목을 타고 올라가는 푸른 핏줄이 괜시리 더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다.
“오늘 아침부터 한 번도 얼굴을 못 봤길래.”
내가 아침에 좀 바빴어.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붙은 잔머리를 정리했다. 유려한 손가락이 동그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밑으로 내려와 그녀의 코끝을 검지로 툭 간질였다.
“보고 싶어서 왔지.”
이안은 지젤이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걸 보며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점심은?”
지젤은 안 먹었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려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잔소리와 걱정 어린 눈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곧 공작 부인이 올 테니 가주세요.”
둘이 있으면 말이 나와요. 지젤의 냉랭한 말에 이안이 눈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웃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
“가세요.”
이쪽이 곤란해지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면 빨리 가라고. 지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노려보자, 그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손 한 번만 잡아줘, 그럼 갈게.”
지젤의 오른편에 앉은 이안이 그녀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손 한 번만 잡아주면 갈게. 이안이 내민 커다란 손바닥을 내려다본 지젤은 그게 별게 아니라 생각했고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문득 지젤은 너무 휩쓸린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요.”
반사적으로 손을 내어주려 했던 지젤이 몸을 굳히는 걸 본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지젤은 대답 없이 이안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공작 부인 온다며.”
이안이 인내심을 가지고 그런 지젤을 설득했다.
“난 괜찮지만, 네가 곤란하지 않겠어?”
못 이기는 척 한숨을 쉰 지젤이 그가 원하는 바를 들어줬다. 붉은색 실크 장갑을 끼고 있는 작은 손이 그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이안은 그런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 힘에 몸의 중심을 빼앗긴, 지젤의 푸른 눈이 커지는 걸 보면서 이안은 소리 내 웃었다.
“너-!”
순식간에 이안의 가슴팍에 안기게 된 지젤이 화를 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녀의 상체를 끌어와 품에 꼭 안은 그가 배부른 고양이처럼 미소 지었다. 그러나, 이안의 흉부에 얼굴이 짓눌린 지젤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휘장이 가려주고는 있지만, 누가 보면 어쩌려고?
“놔.”
지젤이 불만을 표하며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후려쳤지만, 이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놓아주지 않았다.
“아파, 때리지 마.”
지젤은 그에게 모난 말 한마디 해주려다가 입을 닫았다. 귓가에 울리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그럴 수가 없었다. 쿵쿵- 울리는 소리와 짙은 사향 냄새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큰일이네.”
이안이 품에 안긴 지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어그러트렸다. 왜 넌 매일, 조금씩 더 예뻐질까. 이안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입술을 빤히 바라봤다. 여태 지켜본 결과 지젤은 중요한 자리가 아니고서는 화장을 옅게 했다. 그렇지만, 입술은 항상 색이 짙었다. 촌스럽지 않게, 그러나 미소가 돋보이도록.
“어쩌지.”
“뭐가?”
“가둬놓고 나만 보고 싶다.”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네. 지젤이 콧잔등이 구겨질 정도로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했다. 이안이 그런 지젤의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미리 사과할게, 미안.”
“뭘?”
무슨 사고라도 친 거야? 지젤이 본능적으로 그를 의심하는데 이안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화장 망가져서 화낼까 봐.”
“내 얼굴이 왜?”
방금 전에 거울 확인하고 마차에서 내렸는걸? 지젤이 조금 놀라서 거울을 찾기 위해 이안을 밀어내는데,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지젤을 더 잡아당긴 이안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이제.”
뭐. 이다음에 뭘 하려고 또 저렇게 여우처럼 웃는 거야? 이안의 숨결이 피부에 닿는 게 소름 끼쳐서 몸이 움찔 떨렸다.
“입술 번질 거라.”
말을 끝낸 이안이 고개를 틀어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입 맞췄다. 여린 점막에 닿는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에 지젤이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밀어내야 하는데, 진짜 미친 짓인데. 지젤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만 했다.
간교한 마음은 입 안으로 파고드는 침입자를 밀어내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 뜨거웠고, 다정하고 달콤했다. 이안이 키스를 못했더라면 밀어낼 수 있었을까? 아니, 근데 왜 잘하지? 그걸 따질 처지는 아니지만. 수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능숙한 키스를 하는 거라면, 그리 달게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튄 지젤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그러자 이안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입술을 맞대고 있어서,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긋는 게 느껴졌다. 지젤이 순순히 입을 열어주자, 조금 놀랐던 이안은 처음으로 입 맞추는 중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눈을 반쯤 뜬 이안은 지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옷이 다 구겨질 정도로 어깨를 부여잡고 그에게 집중하는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다, 뭔가 불만이라도 생긴 듯 구겨지는 미간이 귀엽다 못해 깜찍했다. 곧 지젤이 이안의 혀를 아프지 않게, 그러나 불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강도로 깨물었다.
“아.”
물었어? 그가 아릿한 느낌에 탄식을 내뱉자, 지젤이 고개를 뒤로 빼냈다. 그녀가 잔뜩 번진 입술을 장갑 낀 손으로 닦아내는데,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갑자기 심술이실까.”
지젤의 화장 탓인지, 아니면 입맞춤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원래 그렇게 붉은색인지. 이안의 입술이 반들거렸다. 그게 민망해서 지젤은 고개를 휙 돌렸다.
“비켜.”
그녀의 말에 이안이 난감하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파.”
이안이 지젤에게 물린 혀를 입 밖으로 꺼내 보이자, 지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술만큼이나 붉은 살덩이가 쓸모없이 요망했다.
“비켜, 진짜 공작 부인 올 거야.”
“안 돼.”
“진짜 물어뜯기 전에 비키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지젤이 이를 아득 물고 마지막 경고를 하자, 이안은 특유의 음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지젤을 꼭 끌어안고 고백했다.
“어차피 나 지금 못 일어나.”
그러니까,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이안의 말에 지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못-”
왜 일어나지 못하냐고 물으려던 지젤의 얼굴이 확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밑에. 그 생리적 반응 때문에 못 일어서는구나. 그녀는 의식적으로 눈을 위로 올렸다. 절대 밑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행동이었다. 이안이 그런 지젤의 목에 연신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러게, 왜 깨물고 그래.”
진짜 얼굴만 보러 온 건데, 다른 것도 하고 싶잖아. 이안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귀까지 빨갛게 변하는 지젤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검정으로 해.”
이안의 말에 일부러 입을 삐죽이고 있던 지젤이 깊고도 길게 한숨 쉬었다.
“응? 나랑 똑같은 색으로 해.”
이안이 그녀의 어깨를 물고 잘근거리며 조르자, 지젤은 그가 커다란 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앉아있던 지젤은 문득 이안과 결혼했더라면, 이게 일상이 되지 않을까 싶어졌다. 그럼, 행복했을 텐데. 그러나 그런 희망적인 상상은 곧 바스러졌다. 이름만 귀족인 스무 살 시골 소녀가 황궁에서 살아남았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