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76)화 (76/135)

76.

“주근깨 아가씨, 그냥 좀 언니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샤론은 미아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문맹이라는 걸 기억하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녀는 미아가 그사이에 지젤에게 글을 배웠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네가 지젤 님에 관해 무슨 할 말이 있는데?”

여기 후작 부인에 관해 할 말이 있다는 게 뭐야? 미아가 종이 쪼가리를 펼쳐서 내용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너 글도 배웠어? 그 여자한테 예쁨 좀 받나 봐? 전달만 해줘. 여기 숨어 있을게.”

미아가 표정 없는 얼굴로 빤히 샤론을 보다가 물었다.

“정확하게 누구한테 전달해야 하는데?”

“기사들 중에 높아 보이는 여자. 그 여자한테 저번에 산에서 봤던 샤론이 보자고 전해.”

“왜?”

“아, 이 언니 하는 일에 토 달지 말고 해.”

샤론이 미아의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안에 든 건과일 몇 개를 꺼내 들었다. 미아가 간식을 앞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넌 아직도 이런 하녀복이나 입고 뭐 하냐.”

샤론이 거들먹거리는 걸 보면서, 미아는 수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얼른 가서 전해줘. 나도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단 말이야.”

“이거 하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야.”

미아는 빨래 위에 얹어 놓았던 빨랫줄을 손에 들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손을 움직였다.

“샤론, 요즘 뭐 하고 살아?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 거야?”

“큰- 돈 벌 일이 있어. 야, 근데 넌 억울하지도 않아? 그렇게 뼈 빠지게 옷 빨고 널고. 누구는 시집 잘 가서 편하게 시켜먹기나 하고. 별것도 아닌 계집애가.”

샤론이 투덜투덜하는 사이, 가는 밧줄이 미아의 손가락에 감겼다. 빨래를 널기 위해 고정시킨 막대에 줄을 걸기 위해 그걸 천천히 풀어내는 미아를 보며 샤론이 진저리를 쳤다. 그렇게 평생 하층민으로 살아라.

“왜 매번 그런 식으로 얘기해. 지젤 님이 얼마나 다정하시고 안쓰러운 분인데.”

“너 니네 죽은 언니 때문에 계속 감싸고도는데, 진짜 기가 막힌 얘기 하나 해줄까?”

샤론은 단순하게 미아가 후작 부인에게 실망하는 게 보고 싶었다.

“어떤 얘기?”

“그 우아한 후작 부인 바람났다잖아! 내가 그 얘기 하러 온 거야.”

“바람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샤론, 너 또 이상한 말을 하네.”

우리 지젤 님이? 미아가 샤론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자, 샤론이 그녀를 비웃었다.

“에고, 우리 순진한 미아. 네 주인이 그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도 적당히 비싼 물건 챙겨서 나올 생각이나 해.”

글을 배울 정도면, 귀금속도 가까이에서 만질 수 있겠네. 샤론이 아까 둘이 숨었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고개를 내저었다.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이번엔 저택 내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빼도 박도 못할 텐데. 후작이 가만있겠어?”

미아는 가만히 굳어 서서 눈을 깜빡였다.

“황국 사람들이 뭔지 모르지만, 후작 부인 뒤 캐고 다닌다던데. 후작 부부 망신 제대로 당해보는 거지.”

미아는 샤론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멍청하고 배운 거 없는 계집이라 윗분들 일은 잘 모르지만. 저게 소문일 뿐이라도, 황국 사람들 입으로 전해 들으면 후작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겠지? 지금도 조금만 화가 나면 지젤 님에게 폭력적으로 구시는데. 정말 또 때릴지도 몰라. 예전처럼 반복되는 건가?

“지젤 님은 이상해.”

“그지? 옆에서 보니까 이상하지? 거봐.”

샤론이 아까 미아에게서 강탈한 건과일을 입에 넣고 씹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저택에 가만히 앉아만 계시면, 후작님이 화를 내시지도 않고. 그럼 다 행복할 텐데, 계속 뭔가 다른 생각을 하시고.”

미아는 하루 종일 굶었던 사론이 과일을 먹는 데 집중하는 사이 빨랫줄을 팽팽하게 잡고 수풀 쪽으로 걸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저기 다니시는 걸 보면 너무 불안해. 난 지젤 님이 후작님 심기를 거슬러서, 예전처럼 큰일들이 생길까 봐 무서워. 저택에 가만히 계시면 되는데, 그러지 않으시니까 이런 소문도 생기고.”

순응.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태생부터 다르게 살아와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미아는 살을 파고드는 가는 밧줄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비앙카가 건방지기는 하지만, 감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단란하고 조용하게, 지젤 님이 후작님과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이 평화를 유지하면서.

“그 평화를 깨는, 너 같은 사람들이. 지젤 님이 난 너무 무서워.”

“뭐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샤론이 얼굴을 확 구기고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미아가 그녀의 등을 걷어차고 발로 밟아 눌렀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가는 줄이 그녀의 목에 걸렸다.

안 돼.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숨이 막혀와서 샤론은 미아의 손목을 긁어내렸다. 미아는 양손에 힘을 꽉 주고, 이를 악물었다. 구토가 일었지만, 미아는 마땅히 본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아는 샤론이 더 이상 버둥거리지 않을 때까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날 여동생처럼 챙겨주시는 지젤 님과 나이를 먹고, 우리 서로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면 좋겠는데. 곧 홀로 남게 된 미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건 정원사가 정원을 파헤치는 두더지를 잡는 거랑 비슷했다.

***

“황태자가 계속 머무는 동안에는 우리 쪽 귀족들을 움직이기 어려울 겁니다.”

달리아 백작이 주름진 얼굴에 근심을 가득 담고 한숨을 쉬며, 등 돌리고 앉아있는 지젤에게 말했다. 각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일행이 아닌 것처럼 대화를 섞는 게 익숙했다. 디저트 가게에 앉아 여유롭게 비앙카가 포크로 찍어주는 케이크를 받아먹은 그녀가 동의했다.

“어차피 즉위식도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 더 기다리죠. 조지 콜튼 탈탈 털어서, 황국 출신 왕비가 왕을 죽였다는 걸 실토하게 하면 일은 쉬워요.”

가게 앞 마차에 서있는 기사들을 보며 달리아 백작이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황국 기사단이라니, 감시라도 당하시는 겁니까?”

지젤은 이안과 자신의 관계를 백작이 모른다는 걸 깨닫고,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둘 사이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쓰게 웃고 말았다.

“가게가 작으니 나가 있으라고 했어요. 케이크 하나도 마음대로 못 먹냐고 소리 질러야 했지만 말이죠.”

“황족이 오래 머물수록 우린 불리합니다.”

“큰 걱정 마세요. 황태자는 즉위식 때문이라도 떠날 테고, 황국이 기어코 늙은 왕까지 죽였다는 걸 알리면. 판도를 뒤엎을 수 있어요.”

“가뜩이나 늘어나는 세금이, 황국에 보내는 조공 때문이라 불만이 피어오르고 있으니 황국에 대한 적대감이 커질 겁니다.”

장작이 모아지고 있으니, 누군가 나서서 횃불만 던지면 되는 일이었다. 황국 내부 상황도 이리저리 복잡해 보이니, 작은 왕국에 무관심할 수도. 지젤이 입 안에 퍼지는 단맛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했다.

친황국파를 몰아낸다고 해도, 황국에 어느 정도는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면 굳이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황녀의 성격상 크게 틀어지지만 않으면, 그런 피곤한 일을 할 것 같지 않았다. 지젤은 잠깐 고민하다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달리아 안나 왕비 일도 진상을 밝힐 수 있으면 좋겠지만-”

차마 엄마라는 호칭이 안 나와서 말을 하면서, 백작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오래된 일이니 되었습니다.”

그의 칼 같은 말에 지젤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왕비가 똑같은 수법으로 모녀를 죽이려 했지만, 그걸 공론화할 방법이 없었다. 지젤은 붉은 드레스에 맞춰 목에 건 루비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는.”

“누워있어도 다 들을 수 있다니, 조금 더 보고 적절할 때에 제가 처리할게요.”

백작이 다 비운 찻잔을 내려놓고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지젤이 앉은 테이블을 자연스럽게 스치듯 지나가다가, 지젤의 목에 걸린 루비를 보고 그대로 멈췄다.

“그거.”

지젤은 여태 잘하다가 갑자기 아는 척을 하는 백작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지젤의 얼굴이 일그러진 걸 보면서도 다급하게 그녀의 목에 걸린 루비를 확인했다.

“그 목걸이 어디서 난 겁니까?”

주위 테이블에 앉아있던 귀족들 모두가 지젤을 바라봤다. 지젤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이러는 거야.

“이번에 우연하게 들인 목걸이인데-, 백작님께서 보석에 관심이 많으신 줄 몰랐네요. 좋은 보석인가요?”

정확하게는 나탈리인지, 뭔지 하는 여자 때문에 산 목걸이였지만. 지젤이 태연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다들 지젤의 목에 걸린 보석을 흘끔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남들이 엿들어도 이상하지 않도록 그녀가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기려 했다. 그런데도 백작은 눈을 과하게 깜빡이며 미간을 구겼다.

“남작에게 받은 게 아니고?”

남작이 주거나, 남작저에 있을 때. 결혼하기 전에 가져온 물건이 아니고? 달리아 백작은 딸의 유품 중 유일하게 찾지 못했던 루비 목걸이를 떠올리며 손을 떨었다.

“아.”

백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젤에게 묻자, 지젤은 작게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여동생인 이엘리야가 아버지께 받은 목걸이가 하나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 루비가 아니고 다른 거였나. 멍청한 언니는 이제 동생 얼굴도 흐릿했다. 지젤이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이건 제가 이번에 산 목걸이예요.”

그제야 지젤의 목에 걸린 루비를 자세히 본 백작은 백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언뜻 보고 깜짝 놀랐지만, 딸에게 줬던 목걸이와는 커팅이나 색이 달랐다. 놀란 마음 감추지 못하고 동요했던 그는 이내 정중하게 사과했다.

“이런, 노인네가 예의가 없었군요. 너무 아름다워서 여쭤봤습니다.”

“괜찮습니다.”

지젤이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케이크를 먹는 것에 집중했다. 가게를 나오면서 백작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지젤이 자신의 손녀라는 증거를 찾으려고 집중하다 보니 별게 다 눈에 들어온다며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은 후작 부인에게 그 목걸이에 대해 알릴 생각이 없었다. 후작 부인은 필요하다면 그 목걸이를 만들어올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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