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75)화 (75/135)

75.

지젤은 책을 한 손에 쥐고 고개를 기울였다. 다이한이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 이안은 떠날 테고 넌 징글맞게도 내 옆에 있을 사람이지. 의도가 뭘까. 내가 황태자랑 너무 친밀하다는 소문이 나서, 외도에 대해 경고하는 건가. 아니면, 이안이 그 평민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걸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일순 무표정했던 지젤이 눈까지 휘어 웃어 보이며 물었다. 다이한은 대답 없이 찻잔을 들어 남은 차를 한입에 털어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자가 찾는다니, 시간 내서 들르도록 해.”

왕좌의 공백을 길게 유지할 수 없기에, 결국 겨울 중에 왕자가 즉위하기로 결정 났다. 황국에서도 후작이 왕자의 뒤에 서는 걸 조건으로 허락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주 중으로 귀부인들이랑 또래 아이들 데리고 가기로 했어요. 걱정 마세요.”

여덟 살짜리가 왕이 된다는 이 기가 막힌 상황을 몇이나 받아들일까. 대놓고 황국의 꼭두각시로 써먹겠다는 소리니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지젤과 달리아 백작은 그때를 노리고 있었다. 사기꾼 자작의 사업이 망하고, 돈은 증발하고 서로 원망하고 책임을 물을 사람을 찾다가 균열이 일어나는 그 순간이 기회였다.

“저녁 늦게 오시나요?”

다이한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서재를 나섰고, 지젤은 책을 옆에 던져놓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난 떠나지 못할 사람이고.”

지젤이 씁쓸하게 중얼거리고는 이 모든 걸 외면하듯 눈을 감았다.

***

“아, 돈 없으면 나가! 분위기 흐려져!”

“아니, 내가 지금 당장 없을 뿐이지 갚는다니까요!”

샤론이 술집에서 쫓겨나며 악을 질렀지만, 상대는 그녀를 비웃었다.

“도박쟁이가 돈을 갚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후작 부인에 대한 험담을 대가로, 황국 기사단장이라는 제인에게 받은 마지막 금화까지 잃은 샤론은 뒷골목을 걸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 운 좋은 후작 부인은 어디서 떨어지고도 살아서 떵떵거리고 사는데! 후작저에서 하녀로 일하다 도망친 후로, 쉽게 돈 벌 수 있는 일이라며 도박장에 드나들게 된 그녀는 정상적인 사고가 힘들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하면, 만회할 수 있는데.”

어디 가서 하녀로 일해봤자 주급으로 금화 하나씩 던져주는 게 전부이니 의미 없었다. 그런 식이면 뼈 빠지게 일해도 겨우 밥이나 먹고 살다 죽을 게 뻔했다. 밑천만 있으면 얼마든지 불려낼 수 있는데, 어디서 돈을 구해야-.

“그거 들었는가?”

“뭐?”

목적지 없이 골목을 걷는데, 상점 앞 마부들이 마차에 짐을 실으며 떠드는 소리가 샤론을 사로잡았다.

“후작 부인이 누구랑 바람났다며.”

“아이고, 이 사람. 또 큰일 날 소리를 하네.”

“내가 백작가에서 일하는 친구한테 들었다니까 그러네. 엘로이 백작 부인이 직접 봤다고 그랬대. 남자가 후작저로 병문안인가 뭔가 가서.”

“가서?”

“그, 여튼 거시기 뭘 했데.”

마부는 같이 일한 지 오래된 동료의 터무니없는 소재 선정과 모자란 묘사력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 그러다 정말로 후작가에 끌려가서 피를 보게 될 거야. 나까지 끌어들이지 마.”

“뭐, 남자가 젊고 잘생겼다더구만. 후작 부인이 젊으니 그럴 수 있지.”

“후작님은 안 잘생겼나? 나중에 지하실 끌려가면, 내가 방금 후작님 잘생겼다 말한 걸 잊지 말라고.”

후작님 앞에서 꼭 얘기해야 한다고. 마부가 끄응 소리 내며 짐을 옮기는데 반대편에 선 남자가 답답해했다.

“아이고오! 자네가 어디 가서 말만 안 하면 안 끌려가!”

“후작 부인이 바람은 무슨. 어휴, 피바람 불 일 있나? 어어! 거기 똑바로 들어!”

마부들이 소란스럽게 사라지자 샤론은 방금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후작 부인이 바람을 피운다고?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샤론이 양 주먹을 꽉 쥐고 얼굴을 구겼다. 주위에 남자들 끼고 돈 펑펑 쓰는 것부터 내가 다 알아봤는데. 후작님이 체면 때문에 내 입을 막으려고 하신 건지. 여우 같은 년. 내 머리채를 잡고 때릴 때부터 표독스러운 걸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 황국 기사가 이 이야기도 비싸게 사지 않겠어?”

당장 목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정신이 팔린 그녀는 빠르게 황국기사단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저택 집무실에 앉아있던 다이한은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황태자를 보며 눈을 꾹 감았다. 인내심이 모자라 황태자를 죽여버릴 것 같았다. 요 며칠 동안 지젤이 황태자를 피하고 보지 않으려 한다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는데, 그는 그것조차 견디기 힘들었다. 지젤이 황태자를 의식하고 있다는 소리였기에.

“넌 마차 사고 배후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어.”

마부들 탓으로 돌려 다 죽여버렸지만, 네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 이안이 집무실 한쪽 의자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며 다이한을 쳐다봤다. 지금 목 졸라 죽이고 땅에 묻어버리면 안 되는 걸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빳빳하게 들고 있는 목 좀 부러트린다고 해서, 그런다고 해서 지젤이 날 미워할까? 많이 미워하지는 않을 텐데, 지젤은 날 사랑하니까 금방 용서해줄지 몰라.

“근데도 꼬리조차 잡지 않는 이유가.”

서로를 향한 살의와 적대감이 팽팽하게 흘렀다.

“대체 뭘까.”

대단하신 후작님께서, 마부 하나 관리를 못 해서 지젤을 위험하게 만드는 이유가 뭘까. 다이한은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테고, 그에게 이해를 구할 필요도 없었다. 조지 콜튼은 다이한이 처리할 몫이 아니었다.

“내 아내는 어차피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이한의 연녹색 눈은 이안의 매서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비난은 두렵지 않았다.

“앞으로도 떠올리지 못할 테니, 하루빨리 포기하고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안은 다이한이 정말 그렇게 믿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물어봤자 답을 듣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네까짓 게, 날 죽이기라도 하게?”

이안의 도발에 다이한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이안은 그런 다이한을 보며 비소를 머금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지만, 다이한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기적인 애새끼처럼 모래성 쌓아놓고, 네 좋을 대로 휘두르는 주제에.”

그 말에도 다이한은 화가 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이안이 후작저를 모래성이라 비유한 게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 후작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조금만 더 말을 섞으면 정말 피를 봐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황태자가 분노를 숨기지 않고 거친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가자, 다이한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지젤이 피곤한 얼굴로 정원을 가로질러 별채 쪽으로 향하는 걸 보며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다 가진 사람이, 하나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는 게.”

황태자는 그를 걱정해 여기까지 쫓아온 누이도 있었고, 돌아갈 황궁도 있었다. 황태자는 쉽게 사랑할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남자였다.

“그게 이기적인 겁니다.”

그에게는 정말 지젤 하나밖에 없었다.

***

후작저에 손님이 머문다는 건, 모두가 할 일이 늘어난다는 이야기였기에 미아는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입도 늘었고, 치워야 할 일도 많아져서 모두들 바빴다. 미아는 품에 빨랫감이 든 바구니를 끌어안고 정원 구석으로 향했다. 이거 널고, 침실 정리해야지. 근데, 우리 지젤 님이 다시 바빠지셔서 너무 걱정이야.

“그러다가 또 병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에휴, 우리 지젤 님.”

미아는 지젤이 지금의 삶을 최대한 즐기기를 바랐다. 지젤 님만 조용히 계시면, 후작은 화를 내지 않으니 안락하고 포근한 저택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사실, 5년째 임신 소식이 없는 후작 부인을 두고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오지 않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데려온다 하더라도, 어차피 정실부인은 지젤이니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제 의원도 죽었으니까, 정말 얌전히만 계시면 되는데.”

미아는 죽은 의원이 지젤의 불임을 모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의원과 다르게 노인은 지젤을 5년이 넘게 봤고, 꾸준히 진료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후작이 의원을 갑자기 저택으로 불렀을 때도, 혹시나 자신이 가져다준 피임약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올까 조마조마했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의원은 죽었으니까.

“미아!”

바구니를 사뿐히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빨랫줄을 꺼내던 미아는 자신을 부르는 여자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샤론?”

“쉿.”

로브를 뒤집어쓴 샤론이 검지를 손에 가져다 대며 미아를 수풀로 끌어당겼다. 그녀를 잡아채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샤론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다 낯선 얼굴이라 말을 못 붙였는데.”

“너 여기는 무슨 일이야? 어떻게 들어왔어?”

미아는 어느 날 샤론이 사라졌던 걸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입을 가볍게 놀리다 후작님께 쫓겨난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지, 완전 거지꼴이네.

“아니, 여기에 황국 사람들 와있다며. 내가 볼일이 있어. 이 쪽지 좀 전해줘.”

미아는 만만한데, 진짜 다행이다. 샤론이 작게 한숨을 쉬며 안도했다. 식재료 배달하는 마차에 몰래 숨어들기는 했지만, 저택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어서 난감하던 차였다. 미아는 샤론이 자신의 손에 쥐여준 종이 뭉치를 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게 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