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74)화 (74/135)

74.

지젤이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더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넌 약혼녀가 있는데 난 네 옆에 다른 여자가 서있는 걸 볼 수 없는, 이기적인 심보를 가진 사람이라 안 돼.”

“그건 꽤 마음에 드네.”

나도 그렇거든.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웃으며 지젤의 팔꿈치에서 어깨까지 천천히 쓸어 올렸다.

“미리 고백하건대, 아까 그 자작인지 뭔지 죽으면 나야.”

지젤은 이안의 당당한 살인 예고는 가볍게 무시했다.

“파혼하면 안 되는 상황이던데. 귀족들을 다 적으로 돌리려고? 진짜 바보야?”

“내가 네 앞에서 바보가 되는 건 맞지만, 실제로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아.”

이혼녀를 데리고 가서 황후 삼겠다는 생각 자체가 글러 먹었거든. 지젤이 주먹을 꽉 쥐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데 어느새 지젤의 바로 뒤에 자리 잡은 이안이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리고 또.”

“해야 할 일이 있어.”

이안이 지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로브를 부드러운 손길로 벗겨내며 소곤거렸다.

“착하고 얌전하게 기다릴게.”

네가 하고 싶은 일, 미련 없이 다 마무리하고 나한테 집중할 수 있도록. 얼마나 걸리든 기다릴게. 지젤은 이안의 속삭임이 피부를 간질인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몸을 움찔 떨었다.

“나 꽤 잘해. 기다리는 일.”

이안이 지젤의 목덜미를 가리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왼쪽 어깨를 타고 흘렀다. 지젤은 뒤에 붙어 서있는 이안의 숨결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숨을 크게 쉴 수가 없었다.

“그다음은.”

그녀의 하얀 목을 내려다보는 이안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시선이 노골적으로 피부에 닿아서 지젤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제대로 닿지도 않고 있는데 그가 간질이는 것 같았다.

“봐.”

없잖아. 이안이 지젤에게 일러주듯 다정하게 말하고는 고개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입 맞췄다.

“전부 별거 아니라니까.”

너랑 나만 있으면. 그의 속삭임에 그대로 넘어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어서 지젤은 입을 열었다.

“나 불임이야.”

다시 한번 더 지젤의 목덜미에 입 맞추려던 이안이 그대로 굳어 들었다. 그걸 뒤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어서 지젤은 숨을 멈췄다. 절로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변명해야 할까,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내가 복수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인 걸 알면 정말 정이 떨어질지도 몰라. 기다렸던 일인데 동시에 두려웠다. 곧 그건 원망이 되었다. 그래서 가라고 했잖아.

“제가 우리 황태자 저하 덜 민망하게 해드릴게요.”

불임인 황후? 그건 명백한 이혼이자 폐위 사유였다. 지젤이 떨리는 숨을 애써 태연하게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차마 뒤돌아서 이안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잘못하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고 지금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요. 그러니 이쯤하고 돌아가주세요.”

조금 더 자연스럽게 하고 싶었지만, 혀가 평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연극 대사처럼 딱딱하게 흘러나와 허공에 흩어졌다. 이안 앞에만 서면 스무 살 어린애처럼 표정 관리조차 못 하는 게 한심했다. 이안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지젤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기에 애꿎은 혀만 짓씹었다.

“지젤.”

아까하고는 다르게 이안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지젤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뒤돌아섰다. 감당할 수 있었다. 바라던 일이었고 괜찮았다. 반대로 생각해도 지젤은 이안과 끝까지 가지 못했을 거였다.

그렇게 이안을 마주한 지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안이 슬픔이 가득한 검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이리 와.”

그가 눈만 깜빡이고 굳어 서있는 지젤을 품에 안고 애달픈 한숨을 내뱉었다. 지젤은 울지 않기 위해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혀에 걸리는 말들을 삼켜냈다.

“괜찮아.”

이안이 지젤을 꽉 끌어안고 그녀의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지젤은 자신의 허리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체온이 너무 무서웠다. 이런 맹목적인 애정에 익숙해질까 무서웠다. 네 빈자리는 너무 클 텐데.

“동정해?”

“아니, 내가 아파서 그래.”

“함부로 위로하지 마.”

난 지금 네 체온조차 안락하다 느끼지 못하고 겁부터 먹어. 지젤이 끝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는 걸 들은 이안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네가 날 위로해주는 거야.”

이안이 정말 숨결처럼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이럴 때마다 난 내가 싫어지거든.”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네가 아파하는데, 난 모르는 것들투성이야. 이안의 고백에 지젤은 그게 그의 탓이 아니라 이야기하려다가 그만뒀다.

“네가 정리될 때까지, 다 끝낼 때까지 옆에서 기다릴게.”

이안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하는 말에도 지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 끝낸 후에는, 정말로 이안의 옆에 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자신의 품에서 말없이 바스락거리는 지젤을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

나름 화가인 오스틴은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뭐 후작 부인이 앉아있어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텐데, 그녀는 항상 바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원에서 의자 끌어놓고 잠깐 앉아있다가 간 게 전부였다.

“아니, 이건 뭐 그냥 놀고먹으라는 건가.”

오스틴이 투덜거리며 하녀들이 주고 간 포도를 씹어 먹었다. 별채가 꽤나 크고 쾌적해서 오래 머물수록 좋기는 한데, 그래도 어느 정도 일은 해야 할 거 아니야. 양심에 찔린다기보다는 후작이 무서웠던 오스틴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나는 일하고 싶은데 후작 부인께서 너무 바쁘십니다-. 이런 티는 내야겠지? 집사에게 이야기해보기 위해 별채를 나서는데 누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으악!”

“다물어!”

오스틴은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고 입을 틀어막은 사람이 로브를 뒤집어쓴 걸 보고 인상을 구겼다. 그러고는 이내 그 인물이 바르한 자작 부인인 스텔라라는 걸 깨달았다.

“놀랐잖습니까! 뭐 하는 거예요?”

“그건 내가 물어야지! 네가 대체 여기 왜 있는 거야!”

스텔라는 정말로 당장 정신 줄 놓고 돌아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이라는 놈은 상류층 귀족들 상대로 사기나 치고 다녀서, 당장 목숨이 남아나질 않게 생겼고. 유일하게 그녀를 구해내줄 것 같은 후작 부인의 저택에는 애인이 들어앉았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전에 여기서 일했던 하녀가 도와줘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 대체 누구 앞길 망치려고 여기 있는 거야?”

오스틴은 자신에게 따지고 드는 스텔라는 보며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왕궁 사교 모임에 다니는 여자라기에 어느 정도 돈을 쓸 줄 알았는데 헛짚었었다. 스텔라는 선물을 사주기는커녕 선물을 해달라고 조르는 여자였고, 오스틴은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그녀를 멀리했다. 종종 만나서 몸을 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애인도 아닌데.

“무슨 내가 당신 앞길을 망쳐요.”

“아무리 그래도 불륜인데! 네가 여기 들어와있다가 그걸 후작 부인이 알게 되면 내가 사교계에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녀!”

암묵적으로 애인을 만든다지만, 대놓고 드러낼 수 있는 건 헤넌 공작 같은 사람들만 가능했다. 지위가 높고, 재력이 넘치며, 고위층 가문 출신인 남성. 그 정도는 되어야 능력 되시니 그럴 만하다 웃어넘겼다. 그리고, 공작의 상대인 나탈리는 예쁘기로 손꼽히는 여자였다. 이런 가난하고, 내세울 것 없는 화가가 아니었다.

“네가 황태자 저하도 아니고, 들통나면 내가 창피해서 어떻게 다니냐고!”

스텔라는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오스틴을 계속 만날 생각이었기 때문에, 오스틴이 후작저에서 나오길 바랐다.

“황태자 저하?”

“다들 눈치 보느라 쉬쉬하지만, 소문이 파다해. 즉위식 전에 잠깐 들른 황태자가 후작 부인만 보면 눈에서 꿀을 뚝뚝 떨구거든. 대체 어디가 그렇게 예쁜 건지. 깡말라서 목소리도 듣기 싫은데.”

그래도 황태자 애인이라니. 그 정도는 되어야, 소문이 나도 안 창피하지. 스텔라가 손톱을 잘근거리며 하는 말에 오스틴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목소리는 좀 듣기 싫던데, 묘하게 시선을 끄는 외모지.”

“뭐? 너 진짜! 후작 부인은 너 거들떠도 안 볼걸? 얼마나 눈이 높은 여자인데. 빨리 그림인지 뭔지 대강 끝내고 여기서 나올 생각이나 해.”

오스틴은 스텔라의 징징거리는 소리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저택 2층 출입도 못 하게 하면서 후작이 하도 감싸고돌던데. 집사가 3번이나 강조해서 함부로 별채를 벗어나지 말라 경고했었단 말이지.

“우아한 척, 고귀한 척 다 하길래-.”

어느 정도 포기했었는데. 잘하면 뭐 하나는 얻어먹을 수 있겠네. 오스틴이 자신의 가슴팍을 후려치며 내 말 안 듣냐고 성내는 스텔라의 등을 대강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지젤은 여느 때처럼 다이한과 서재에 마주 앉았다. 이안은 바쁜지 보이지 않았고, 그녀도 굳이 그가 뭘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니, 궁금하지만 물어보거나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안에게 자신의 속을 다 끄집어내 보여준 것 같지만, 사실 한참 더 남았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썩어서 악취가 흐르는 인간이었다. 적어도 지젤은 본인을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다이한이 그걸 매 순간 상기시켜줬다. 가족을 죽인 남자의 아내로 살고 있다는 건 그런 거였다.

“그림은.”

생각에 빠져있던 지젤은 다이한의 말에 의무적으로 대답했다.

“바빠서 신경 못 썼는데, 오늘부터는 잠깐씩이라도 별채에 가볼게요.”

다이한이 찻잔을 들며 고개를 까딱였다.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해.”

“싫지 않아요.”

지젤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걸 보면서, 다이한의 기분은 가라앉았다. 싫다는 말도 과분하게 느껴야 하는가. 지젤을 보고 있노라면 속이 답답하고, 숨이 턱 막히지만 또 아예 보지 않으면 불안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지젤이 책 한 권을 다 읽고 덮자, 다이한의 입술 사이로 한심한 질투가 넘쳐흘렀다.

“황태자는 곧 떠날 테고.”

오늘 한 번도 그를 보지 않았던 지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는 그녀의 푸른 눈을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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