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요즘 꿈자리가 좋아서, 어지간한 바보들은 너그럽게 넘어가기도 하고.”
이안이 나른하게 미소 짓는 걸 보며 제인은 저도 모르게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마차 사고 이후로 본인 기분 더럽다고 뒤집어엎거나 충동적으로 검 뽑아 드는 일도 없어졌다. 후작 부인이 옆에 있으면 좀 온순해지는 건가? 괜찮은데?
“헌데, 너같이 내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는 버러지들은 어쩔 수 없지.”
무심한 말투로 말을 이은 이안이 멍하니 생각에 빠진 제인을 향해 손짓했다. 제인은 지젤을 꼬드겨서 제 편 만들 생각을 하며 손에 쥔 검을 꾹 내리눌렀다. 공포에 질린 남자가 손목에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자마자 꽤액 소리를 질렀다.
“그! 마크한테 누가 찾아왔었습니다!”
제인이 손에 힘을 풀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돌변한 남자의 태도를 보자면, 아직은 폭력이 우위인 세상에 살고 있는 게 확실했다.
“누구.”
“왕궁 기사단이었습니다. 그 기사들이 찾아오고 나서부터 마크가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떠들었어요! 그래서, 돈 받으러 그때 산 밑에 갔었는데-”
남자가 말을 하다가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자, 제인이 한숨을 쉬고 그의 손목을 다시 검으로 눌렀다. 귀찮게 하네.
“귀하신 분께서 같은 말 두 번 묻게 하지 마.”
“그때! 마크는 이미 죽어있었어요! 어, 어차피 받을 돈도 있고 해서 제가 금화만 슬쩍했을 뿐입니다! 그거 외에는 모릅니다! 잘못하면 누명 쓸까 봐 신고하지 않은 거구요, 정말로. 정말 제가 죽이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뒤에서 그 모든 걸 듣고 있던 엘레노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왕비랑 후작 부인이 생쥐랑 고양이 같은 관계였다는 거지? 주고받았는데, 결론적으로는 왕비의 패배인가.
“일단 어디 잘 묶어놓겠습니다.”
혹시 나중에 증인으로라도 쓰시려면 말이죠. 제인이 빠르게 결론 내리며 바로 생각난 말을 뱉어냈다.
“조지 콜튼일까요?”
왕궁 기사단이면 왕비의 사람들일 텐데. 이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대체 왜 지젤이 이런 대우를 받으며 여기 있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곧 지젤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상기시키고 나른하게 한숨 쉬었다.
“버러지가 한 마리가 아니니, 순한 내가 천성과 다르게 피를 보지.”
제인과 엘레노어는 이안의 뻔뻔함에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후작 부인, 신전에 들어가시려면 신발을 벗으셔야 합니다.”
수도 내 중앙 신전 앞을 지키고 서있는 기사의 말에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교는 없었지만, 신전은 사람들 눈 피하기 괜찮은 장소였다. 특히 무장한 기사들이 따라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기도 했다. 비앙카가 능숙하게 지젤의 구두를 벗겨냈다. 지젤이 그런 비앙카를 칭찬해주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기사님들과 여기서 기다리렴.”
베이지색 수수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지젤이 신전으로 들어가는 계단에 오르자, 기사들이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예상 못 한 상황이었기에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같이 들어갈게요.”
지젤에게 흰색 로브를 씌운 비앙카가 기사들이 할 법한 말을 선수쳐 해버렸다.
“신관님을 뵈러 가는 거라, 들어가도 기다려야 하니 소란스럽게 굴지 마시고 여기 계세요.”
지젤이 비앙카와 기사 둘을 내려다보며 말하고는 대리석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맨발에 차가운 대리석이 닿는 느낌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포근해야 할 신전은 차가웠고, 딱딱했다. 지젤이 신을 믿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흰색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이 절로 주먹 쥐어졌다. 다른 신도들에 섞여 신전의 중앙을 향해 걸으면서 그녀는 정면만을 바라봤다. 중앙에 다다를 때쯤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이런, 죄송합니다.”
“바르한 자작님을 여기서 뵙네요.”
검은 로브를 쓴 자작이 어깨를 으쓱이며 지젤의 곁에 붙어서 걸었다. 지젤이 그런 그를 보며 조용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지젤은 드디어 백작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자작에게 방해받을 수는 없었다.
“자작님께서는 기도를 마치시고 나가시던 중 아니었나요?”
“잊은 게 있어서요.”
자작이 능글맞게 지젤의 옆자리를 고수하며 걸음을 맞춰나갔다.
“오랜만에 뵈어서 반가운데, 후작 부인께서는 아니신가 봅니다.”
“솔직히 단둘이 이렇게 뵙는 건 반갑지 않네요.”
“사고 이후에 뵌 적이 없는데, 무사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런가.”
웃음기 가득한 그의 말에 지젤이 깊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투자 건은 잘되어 가시나 봐요? 저번에 자본이 부족할 것 같다고 걱정하시더니.”
“지젤 님께서 후작님께 말씀을 잘 해주신 덕분이죠. 감사하게도.”
“그러고 보니, 스텔라가 요즘 몸이 안 좋은 것 같던데.”
차분하게 말을 하는 지젤은 분명 옅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신전에 오실 시간에, 아내에게 조금 더 애정과 관심을 쏟으심이 어떨까요?”
“그래야 하는데, 지젤 님을 간만에 뵈니 발이 안 떨어지네요.”
자작이 슬쩍 지젤의 오른 손등을 쓸어내리며 하는 말에 지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원래부터 흘리고 다니는 남자였지만, 아까부터 사람 많은 데서 선 넘네. 사업 얘기가 아니면 관심 없었다.
“바르한 자작.”
지젤이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하는데, 휙 하니 몸이 뒤로 끌려 나갔다. 반사적으로 뒤돌아본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잡아챈 사람이 이안이라는 걸 확인하고 얼굴을 확 찡그렸다. 그러고는 거칠게 이안의 손을 밀어냈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저하.”
자작이 단박에 이안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지젤이 그를 따라 이안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둘이서 밀회라도 하나 보지.”
이안이 바르한 자작을 위아래로 훑으며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저 새끼가 처음 봤을 때부터 예쁘다, 미인이다, 어쩐다 하더니. 저번 테라스에서부터 더럽게 거슬리는 놈이네.
“가정이 있는 사람들끼리 무슨 밀회요?”
지젤이 날카롭게 묻자, 바르한 자작이 좀 놀란 듯 지젤을 보다가 능숙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연히 만났는데, 후작저에 화가를 들이셨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걸 여쭙고 있었습니다.”
“화가?”
“네, 무척 독특한 사람을 들이셨다기에.”
바르한 자작이 장난치듯 고개를 기울이며 하는 말에 지젤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화가가 대체 뭔데? 되게 신경 쓰이게 하네. 지젤이 오른 눈썹을 까딱였지만, 자작은 더는 말하지 않고 허리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허면, 이야기 나누시도록 저는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하.”
둘이 지금 내 앞에서, 눈으로 대화를 해? 이안이 한숨을 깊게 토해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바르한 자작의 뒤를 눈으로 쫓았다. 저건 어떻게 죽여야 하나. 그가 아까 오전에 본인 입으로 얘기했던 비폭력 주의라는 단어가 무색해지도록, 잔인한 상상을 하며 지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쯤 되면 지젤도 어느 정도 문제가 있었다. 이쪽을 저렇게 노려보는 것도 예쁘면, 당연히 다른 놈들도 탐내겠지. 이안은 본인의 눈에 씐 콩깍지가 얼마나 두꺼운지도 모르고 지젤을 내려다봤다.
“따라오지 마세요.”
지젤이 냉담하게 딱 한마디 하고는 신전의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안은 당연히 그 말을 무시했다.
“싫어.”
“떼쓰지 마세요. 다 큰 어른이 그러면 꼴 보기 싫어요.”
이안은 그 정도 말에는 기죽지 않았다. 그러고는 잰걸음으로 걷는 지젤의 옆에 서서 고개를 기울였다.
“신전에 올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어?”
그럴 리가 있나. 지젤은 이안과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저 검은 눈이 항상 그녀의 이성을 좀먹고, 판단력을 망가트렸다. 어릴 때부터 저 예쁜 얼굴이 문제였다.
“예, 신께서 불경하니 저하와 말 섞지 마시랍니다.”
붉은 머리 후작 부인과 흑발의 황태자는 눈에 띄는 조합이었다. 이안 또한 지젤처럼 흰색 셔츠만 입은 단출한 차림이었지만, 충분히 귀족인 태가 났다.
“그리 냉담하게 구는 걸 보니. 신께서 나를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도 일러줬나 봐.”
이안의 말에 신전의 중앙 분수대 앞에 선 지젤은 기도하는 척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안쪽에 인위적으로 만든 계곡으로 모이기 때문에 분수대 앞에는 사람이 적었다. 그래도 갑자기 불안해진 그녀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걸 쫓아 걸으며 이안이 물었다.
“응? 그래서 이리 차갑게 굴어?”
사람이 근처에 없는 걸 확인한 지젤은 최대한 구석으로 자리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유가 참 많다시네요.”
이안은 지젤이 거짓말을 굉장히 못하는 거짓말쟁이인 것에 감사하며 웃었다. 눈물 몇 방울 흘리면, 어쩔 줄 모르고 마음 아파하면서 일부러 저렇게 모난 말만 한다. 물론, 이안이 그 눈물을 꾸며내는 건 아니었다. 단지 지젤 앞에 서면 조금 과장되게 불쌍해지는 것뿐이었다.
“내가 후작 부인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얘기해봐.”
“이미 그 문장 안에 안되는 이유가 있네요.”
후작 부인이니까요. 지젤이 눈을 질끈 감고 대답하자, 이안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으니 기각.”
지젤의 바로 옆에 선 그의 왼손이 지젤의 오른손에 닿았다. 이안이 그녀의 여린 손바닥을 스치듯 쓸어내며 웃자, 지젤의 어깨가 굳어 들었다.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그의 손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또?”
“황태자로서 해야 할 일이 있으시니까요.”
“아까와 같은 이유로 기각.”
지젤의 가녀린 손가락에 그의 굵은 손가락이 뱀처럼 얽혀들었다. 뜨겁고 단단한 손가락이 꽉 끼어서, 지젤은 그의 손등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려서 떨쳐내야 했다. 이안의 손이 아쉽게 물러서자 지젤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황궁에 같이 간다 한들, 다들 날 헐뜯고 무시하고 너까지 같이 깎아내릴 테니까.”
“그 또한 내가 혀를 뽑아내고, 입을 꿰매버리면 되는 일이니 되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한 말을 속삭인 이안이 지젤의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스치듯 매만지며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