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72)화 (72/135)

72.

“스텔라?”

리안나가 예의는 둘째 치고 위생에 맞지 않게 먹던 걸 뿜어낸 그녀를 부르자, 스텔라가 손사래를 치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콜록. 죄송해요. 제가 사레가 들려서요. 지젤 님, 드레스 어쩌죠?”

“옷은 괜찮은데. 스텔라, 괜찮아요?”

비앙카가 지젤의 왼팔에 튄 액체를 닦아내며,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스텔라를 쓱 눈으로 살폈다. 지젤은 스텔라를 걱정하는 사람처럼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네, 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들 하세요. 죄송해요, 기침이-.”

스텔라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내젓자, 귀부인들은 그녀의 이상행동에 대해 금방 흥미를 잃고 지젤에게 물었다.

“오스틴? 처음 듣는 이름인데, 수도에서 활동하는 화가인가요?”

“그것도 잘 모르겠네요. 그렇게 이름 있는 화가는 아닌데. 후작님께서 화풍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후작님께서 흥미를 느끼셨다니 궁금하네요.”

평소에 그림에 관심이 많은 리안나가 눈을 반짝이며 하는 말에 지젤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초대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택에 비공식 방문 중인 황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언제 한번 데려올게요.”

“콜록.”

방금 기침을 멈췄던 스텔라가 찻잔을 다시 들었다가 또 사레에 들린 걸 보며, 지젤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스틴이 뭐 하던 놈이라고 했지? 비앙카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입을 샐쭉대는데, 리안나가 스텔라가 민망하지 않도록 대화를 이어갔다.

“그건 그렇고, 우리 지젤 님께서는 그 이야기 아직 못 들으셨겠네요?”

“어떤 이야기요?”

“일단, 박수 주세요.”

리안나가 뿌듯하게 웃으며 박수 치자, 모두가 덩달아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귀부인들이 리안나를 따라 박수 치는 게, 꼭 광신도들 같아서 무서웠다. 지젤이 얼결에 그녀를 따라 박수 치면서도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하자 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저희 치사하신 공작님께서, 나탈리한테 줬던 저택도 빼앗고 아예 내쫓으셨지 뭡니까.”

“아하.”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라며 어깨를 으쓱이는 리안나를 보며, 지젤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었다. 리안나는 항상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릴 이야기들을 먼저 꺼내 털어버리고는 했다. 그녀 나름대로의 자기방어 수단이었다.

“싸우다가 손톱으로 얼굴을 긁었다네요. 그것 때문에 아주 분에 차서는- 저한테 와서 그 여자 욕을 하는데. 제가 검술을 안 배워 다행이지 뭐예요.”

검을 좀 다룰 줄 알았더라면 남편 목을 베어버렸을 텐데. 리안나가 지젤 뒤에 서있는 기사들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그 여자 맨날 본인이 공작가 사람인 것처럼 고개 빳빳하게 들고 다니던데, 이제 그거 안 봐도 되니 좋네요.”

“저번에 보석상에서도 후작 부인께 바락바락 대드는 것만 해도. 어휴, 꼴 보기 싫어요.”

“지젤 님이 너그럽게 넘어가신 걸 감사히 여겨야지, 다른 사람 같으면 수치를 알라며 옷을 벗겨서 길거리에 내던져놨을 거라구요.”

지젤은 적당히 미소 짓고는 리안나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이러나저러나, 제일 더럽고 짜증스러운 놈은 공작일 텐데. 죽이지도 못하는 심정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리안나가 그런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지젤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토닥였다.

“아무튼, 나탈리가 다음엔 누구를 꼬셔낼지가 모두의 관심사가 되었네요. 그래도 꽤나 미인인 건 변함이 없고, 우리 고귀한 남성분들은 쓸데없는 데서 비위가 좋잖아요.”

리안나의 말에 귀부인들이 단박에 얼굴을 구겼지만, 지젤은 덤덤했다. 다이한한테 다른 여자가 생기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계획에 차질이 되면 치워야겠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같이 보내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묘한 침묵이 계속 흐르자, 지젤이 나른하게 한숨 쉬며 말했다.

“이번 가을 무도회 때 다들 바쁘시겠네요.”

남편들 단속하느라. 지젤의 말에 귀부인들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가을 무도회라는 말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어머, 하는 건가요? 가면 준비를 해야겠네요.”

“저는 드레스도 새로 하나 하려고요.”

시국이 시국인 만큼 사냥대회 이후에 열리는 가을 무도회를 취소하자는 말도 나왔었지만, 결국 강행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한가을 밤에 가면을 쓰고 춤추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는 타국 관광객도 많았다. 그건 확실히 왕국 사람들의 생계에 큰 보탬이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우울한 분위기를 털어버릴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귀족들은 연회장에서, 평민들은 광장에서 그런 구분이 어느 정도는 있었지만 그래도 모두가 함께하는 행사로서 의미가 컸다.

“언제 저랑 시간 맞춰서, 화가도 보고 가면도 제작하러 가요.”

“시간을 맞춰볼게요.”

리안나가 지젤을 향해 웃으며 하는 말에, 스텔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어찌 보면 순진하고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그 노골적인 반응에 지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모처럼의 티타임 내내 지젤은 스텔라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지젤은 스텔라의 개인사에 깊게 관심 가진 적이 없었지만, 저 정도면 화가가 대체 뭐 하는 놈인지 궁금해졌다.

***

엘레노어는 꾸역꾸역 이안의 뒤를 쫓아다녔다. 사실 같은 곳에서 숨 쉬기도 싫었지만, 또 무슨 사고를 칠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쯧.”

마차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이안이 그런 엘레노어를 보며 대놓고 혀를 찼다. 제인은 마주 보고 앉아있는 두 남매에게서 한 발 멀어지며 뺨을 긁적였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정이 가는 여자도 아닌데. 엘레노어가 고개를 내저으며 하는 말에 이안이 오른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애초에.”

이안이 턱을 괴고 있는 엘레노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이 냉랭하다 못해 날카로웠다.

“5년 전에 바로잡을 수 있던 일이 꼬인 건, 날 황궁에 가둬둔 탓이지.”

제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라리 그때 도망을 치든, 뭐든 했으면 지금처럼 복잡하게 꼬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안 그래?”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깊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황궁에 데려가는 건 좋은데 파혼은 안 돼. 예정돼 있는 결혼식은 해.”

“누구 마음대로.”

이안이 엘레노어의 말을 칼같이 잘라냈다. 그러고는 비소를 머금고 고개를 까딱였다. 서로를 한심하게 보는 시선이 허공에 얽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걸 본 제인이 잠깐 고민하다가 뒤에 서있던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데려와.”

우물에 사람 머리를 눌러 넣고 있던 기사들이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뒷골목 우물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중년 남자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캑캑거리며 기도에 들어찬 물을 뱉어낸 남자가 마차 앞으로 질질 끌려왔다.

“저, 정말 모릅니다! 마크 그놈이 큰돈 들어올 데가 있다고 큰소리치고는 혼자 도망가버렸다구요! 저는 후작가에서도 찾는다니까 무서워서-. 그래서 숨어있던 거지 뭘 알아서 숨은 게 아닙니다! 저도 마크한테 받을 돈이 있는 놈입니다!”

아까부터 이 뒷골목을 다 엎고 있는데, 얻는 게 없었다. 이안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제인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가 집어치웠다. 아무리 황국이 아니라지만, 너무 무능한데.

“또 쓸모없는 걸 데려왔으니.”

제인을 내려다보는 이안의 표정이 싸늘했다.

“진정 저것도 쓸모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이안이 제인을 노려보며 살벌하게 중얼거리자, 제인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저것’이 가리키는 게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눈물 콧물 다 빼고 있는 남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윽!”

“그러니까, 그 큰돈 네가 이미 마크에게 받은 것 같던데?”

실종된 마부의 절친한 친구라는 남자가 며칠 전부터 큰돈을 쓰고 다니는 걸 상인들로부터 들은 제인이 그를 압박했다. 그의 머리채를 움켜쥔 제인은 그의 비명 정도에는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면 도둑질을 했나?”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이건 제 돈이 맞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대화가 지겨워진 이안이 마차에서 나와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탈탈 흔들고 있는 제인에게 비키라 손짓했다. 제인이 남자를 놓고 물러서자, 이안이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남자의 손을 꾹 밟아 눌렀다. 구둣발에 짓이겨진 손등에 남자가 통증을 호소하기도 전에 이안이 무심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도둑질을 한 게 아니라면, 네놈이 돈이 어디서 나서 금화를 턱턱 내고 다닐까.”

“그게-,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도둑으로 몰린 남자가 이안의 발을 밀어내고는 밟혀서 아린 손을 끌어안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도둑질이다?”

이안이 기사들에게 고개를 까딱이자, 그의 흑발이 살짝 흐트러졌다. 제인은 그가 오만한 표정으로 지시하는 게 뭔지 알아채고는 입을 열었다.

“잡아.”

기사들이 순식간에 남자의 몸을 짓누르고 웅크린 오른팔을 펴서 땅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제인이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으아!”

남자의 손목에 날카로운 쇠붙이 가져다 댄 제인이 이안을 보며 눈짓으로 물었다. 썰어요?

“내가 기본적으로 비폭력 주의야.”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태연하게 뱉은 문장에, 기사들이 동시에 얼굴을 찌푸리고 입을 삐죽였다. 다들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봤으나, 이안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뻔뻔하게도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잃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굳이 폭력을 휘두를 필요가 없거든.”

뭐, 그렇게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두가 얼굴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상황에서, 제인 혼자 이안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본적으로 황태자 앞에서는 알아서 배 까고 드러누웠고, 이안은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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