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비앙카는 침대에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지젤을 가만히 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곧 있으면 해가 뜰 텐데 지젤은 계속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누워있어도, 서있어도, 앉아있어도 늪에 잠겨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하는 이안의 눈물은 그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결혼식 이후에 그냥 곱게 순응하고 다이한의 뜻대로 얌전한 후작 부인 노릇을 했더라면 뭐가 달라졌으려나. 가족의 죽음도 그저 정말 우연히 일어난 사고였다고 받아들여야 했을까.
“조금이라도 주무세요.”
눈치 빠른 비앙카가 지젤을 우울에서 건져냈다. 지젤은 그런 비앙카를 가만히 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가 왜 네가 편한지 아니?”
비앙카는 지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침대 옆 촛불을 껐다. 창밖이 훤하게 밝아져 오니, 초는 의미가 없었다.
“우린 이해관계가 확실한 사이잖아.”
그러니까, 예측이 가능하지. 너는 돈을 받고 내 뜻대로 움직여주잖아. 비앙카는 지젤이 굉장히 복잡한 고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후작이든, 황태자든 지젤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백작이 한동안 왕궁은 가지 않으시는 게 좋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어찌 되었든, 계속 말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비앙카의 말에 지젤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일단,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그게 약점인 줄 알고 쥐고 계시는 황녀님부터 뵙고.”
지젤은 일단, 모든 문제에서 이안을 배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안이 없다고 생각하면, 평상시처럼 일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
엘레노어는 아침 식사 전부터 침실로 찾아온 지젤을 보며 길게 하품을 했다. 후작가 터가 안 좋은지 간밤에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이른 아침부터 죄송해요, 제가 오늘 낮에는 시간 내기가 힘들어서요.”
“부부가 나란히 썩 꺼지라 이야기하려나 봐? 어쩌지, 나는 우리 황태자 저하께서 고집부리셔서 못 떠나는데.”
“아니요, 머무시는 거야 황녀님 마음이시죠. 제가 뭐라고 재촉하나요.”
지젤이 산뜻하게 미소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자, 엘레노어가 오른 눈썹을 까딱였다. 이렇게 보니 또 다른 사람 같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고?”
“전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조지 콜튼 경이 침실에 들어갔다가 은밀히 빠져나온 걸 봤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엘레노어 님께서 계속 거론하시는 기사단장 말입니다. 지젤이 미소를 머금으며 하는 말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황녀님께서 가지신 논리에 의하면 말이죠.”
제가 왕비님을 마지막에 만났기에, 여러모로 수상하다고 하셨으니 말이에요. 지젤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는 걸 보면서 엘레노어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공식적인 방문도 아니고, 저처럼 왕자님과 함께 들어간 것도 아닌, 밤에 기록도 남기지 않고 조용하게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지젤은 엘레노어가 자신을 보며 한쪽 눈을 찡그리는 게 꽤 즐거워서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얼마나 수상한 사람인가요?”
엘레노어는 성급히 대답하지 않고 검지로 의자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걸 보며 지젤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 일이 커져서, 황국에 협조적인 제 남편도 곤란해질까 걱정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친황국파들에 대한 반발심이 커지고 있는데.”
“굉장히 위험하고, 건방진 말을 하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근데.”
지젤이 전혀 죄송하지 않은 어투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황국 사람인 왕비님의 수족이 왕이 죽기 전날 침실에 몰래 들어갔다 나왔다? 그거야말로 우연치고는 기묘한데 그 이야기는 관심 없으신가요?”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엘레노어는 숨을 들이마시며, 지젤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어야 했다.
“그런 기묘한 일이 또 있었는데 혹시 아실까요? 죽은 달리아 안나, 그러니까 전 왕비도 얼마 전 제가 겪은 마차 사고를 똑같이 겪으셨답니다.”
“후작 부인이 정확하게 하고 싶은 말이 뭘까.”
빙빙 돌려 말하지 말라는 듯 짧게 혀를 찬 엘레노어가 짜증스럽게 묻자 지젤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황녀가 아무리 대단한 여자일지라도, 여긴 지젤이 나고 자란 곳이었다. 황녀는 이 고립된 작은 나라에서 외지인이었고, 그건 기본적인 적대감을 가진 민중들을 다루기 어렵다는 소리였다. 어찌 되었든, 증거도 없이 말도 안 되는 마녀사냥을 하겠다 계속 협박하면 곤란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어쭙잖게 말도 안 되는 협박 하지 마시고 그저 마음 편히 쉬다 가세요.”
“뭐?”
지젤은 엘레노어가 자신을 못 죽인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만약에 지젤이 엘레노어였다면 이안을 위해서라도 도움 안 되는 후작 부인 따위, 멀리 치워버리거나 죽였을 텐데 그녀는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제 반년이면 다 끝날 일, 미움받아도 상관없었다.
“황녀님께서 얼마나 머무시든, 저는 성심성의껏 황녀님의 편의를 위해 협조할 겁니다. 근데, 제 일은 방해하지 마세요.”
“내가 후작 부인에게 방해가 된다?”
“저에게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 미리 부탁드리는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다 가는 게 황태자 남매에게도 좋았다. 즉위식을 앞두고 부재중인 황태자에 대한 평판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걸 지젤은 알고 있었다. 지젤이 끝까지 웃으며 하는 말에 엘레노어는 정말로 어이가 없어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시건방지네.”
지젤은 그 정도 욕은 감수하고 들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를 정말 싫어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해요.”
“혀에 기름을 발랐나, 말만 잘해.”
엘레노어가 정색을 하며 지젤을 노려봤지만, 지젤은 기죽지 않고 찻잔을 비워냈다. 문득, 지젤은 방금 끝낸 대화의 큰 문제점을 찾아냈다. 둘은 죽은 왕도, 누워있는 왕비도 그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이용할 뿐 안타까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그게 우스워서 지젤은 혼자 소리 내 웃었다.
***
“그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죽지도 않아요?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면서요? 마차가 튼튼해도 한계가 있을 텐데, 이래저래 운도 좋아요.”
엘로이 백작 부인이 말을 뱉어 놓고, 아차 싶었는지 급하게 변명했다.
“내 말은, 그래서 너무 다행이다-. 이제 그런 얘기죠.”
“그게 소문처럼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더라구요.”
헤넌 공작저에 모인 귀부인들이 앉아서 수군거리는데, 리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이 죽고 왕비가 드러누웠는데, 태평한 앵무새처럼 조잘거리는 게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더욱이 자작 부인인 스텔라는 요 근래 계속 울상이었다.
“그건 그렇고, 왕비님이 저렇게 되셔서 어째요?”
“아예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살아계시니 선위가 맞기는 한데. 정신을 못 차리시니, 저희 남편도 고민이 많더라구요.”
“일단, 왕자님께서 즉위하시고 후작님께서 같이 일을 봐주심이 맞지 않을까요?”
“근데 다른 귀족들 반발은 어찌하고요? 사실상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게 되는 건데.”
“반발은 무슨, 실상 후작님 위에 누가 존재한다구요?”
“후작 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찻잔을 들고 신나게 떠들던 그들은 집사가 리안나에게 하는 말을 듣고 빠르게 입을 닫았다. 곧이어 푸른색 드레스를 입을 지젤이 비앙카를 데리고 응접실로 들어섰다. 지젤이 들어서자마자 모두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어머, 지젤 님.”
“세상에,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이에요.”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몸은 좀 어떠세요? 제가 후작저로 찾아뵈었는데, 병문안도 어렵다고 하셔서 돌아왔었답니다.”
리안나는 하인의 안내를 따라 들어오는 지젤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있다는 걸 눈치채고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지? 리안나가 눈치 빠르게 지젤의 옆에 서서 그녀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고는 미간을 구겼다.
“오시는 길이 불편하셨나요?”
“아니요, 그게 아니고.”
지젤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뒤따라 들어오는 기사 둘을 눈짓했다. 한 명은 후작가의 문장을, 한 명은 황국의 문장을 달고 있었다. 모두가 눈만 깜빡이며 뭐라 입을 열지 못하는데, 지젤이 입가를 파르르 떨며 설명했다.
“제가 불편하다고 했는데도, 이리 과보호하시네요.”
저택을 나서자마자 따라붙는 저 두 명 때문에 백작도 못 만나고, 자작의 일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으니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후작이야 그렇다 치지만, 이안은 정말로 상식 밖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직접 따지고 싶었지만, 아침부터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지젤은 속으로 분을 삭여야 했다.
“워낙 큰일이 많았으니까요.”
모두가 어색하게 웃으며 눈치를 보는데, 지젤은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유세 떤다고 생각하겠지. 와중에 스텔라가 지젤과 눈이 마주치자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지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모두가 모여있는데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둘이서 조용히 해결해야 했다. 그걸 알아들은 스텔라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화가를 들이셨다면서요?”
“벌써 그게 소문이 났나요. 다들 후작저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지젤이 놀랐다는 듯 엘로이 백작 부인을 보며 웃자, 그녀가 어색하게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황태자가 왕궁이 아니라 후작저에 머물기로 했다는 건, 황국에서 후작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는 뜻이었다. 그건, 다음 왕좌에 오를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니 모두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지금만 해도 후작 부인이 무슨 황족처럼 기사를 데리고 다니잖아.
“아니, 생전 관심 없으셨던 분이 화가까지 들이셨다니까. 다음 순서로 미리 말이나 넣어볼까 해서요.”
“지젤 님, 화가 이름이?”
리안나가 지젤을 향해 묻자, 지젤은 잠깐 고민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다른 데 신경 쓰느라 바빠서. 지젤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비앙카에게 눈짓했다. 이름이 뭐라고?
“지젤 님, 오스틴이라고 들었습니다.”
“오스틴이라네요.”
“풉!”
화가 이름을 듣자마자 입에 머금었던 차를 뿜어내는 스텔라를 보며 지젤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