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70)화 (70/135)

70.

저녁 식사 자리에서 지젤은 체해서 구역질을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불편한 식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후작은 덤덤하게 식기를 움직여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고, 그 맞은편의 황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녀의 바로 맞은편에 앉은 이안은 식사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이안이 연신 생글거리며 이쪽을 보는 탓에 계속 눈이 마주쳤고,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지젤은 음식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계속 실패했다. 후작은 황태자 남매가 한동안만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고 설명했지만, 정확한 기약이 없었다.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정말 날 데려가고 싶어서? 내가 불임이라는 것까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해야 하는 걸까.

“내일부터는.”

다이한 후작의 말에 지젤은 고개를 들었고, 이안은 얼굴을 구겼다.

“제약 없이 외출해도 좋아.”

저택에서 황태자와 나란히 붙어있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지젤도 나름의 일로 바쁜 후작 부인이었으니, 황태자와 덜 엮이겠지. 그건 다이한의 바람이었다.

“하.”

다이한의 말에 이안이 입가를 파르르 떨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뭐? 감히 뭐라고?

“외출을 허락한다?”

“요즘 세태와 다르게, 후작이 후작 부인을 너무 엄하게 죄는 것 같기는 하지만.”

엘레노어가 능숙하게 이안의 말을 잘라먹고, 입에 문 스테이크를 오물거렸다.

“어쩌겠니, 부부 사이 애정이 커서 그런 것을.”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지젤은 딱히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당장에 손에 쥔 칼을 까딱이며 후작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썰어낼까 고민하는 이안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음식 멀쩡하게 맛있네.”

엘레노어가 이안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뜻 모를 말을 하자, 이안이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지젤은 그 대화를 흘려들었다.

후작이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는 건가? 그때 그 죽였다고 큰소리쳤던 평민이, 지금 눈앞의 황태자라는 걸 알고도 들였을까. 아니면, 아예 기억을 못 하는 걸까. 동일인물이라 알고 있다 해도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황태자랑 나랑 모르는 사이라는 건 확신하고 있겠지? 아니면, 날 떠보려고 저택에 머무는 걸 허락한 건가? 지젤은 태연하게 음식을 씹어 삼키려 하며 혀를 지그시 깨물었다.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다이한은 식사 내내 무표정을 유지했으며, 이안과 엘레노어 쪽은 물론 지젤도 바라보지 않았다.

***

지젤은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이한이 집무실로 가고, 황녀가 자신의 바로 옆 침실로 가는 걸 보면서 비앙카에게 눈짓했다. 비앙카가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지자 지젤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일단, 달리아 백작에게 당장 계획된 일의 진행을 멈추라 전해야 했다.

원래는 왕자 혼자 남고, 황태자가 떠나면 말도 안 되는 사업에 발들인 후작을 파산시키는 걸 시작으로 움직일 계획이었다. 후작을 중심으로 한 친황국파를 흔들어 왕궁을 뒤엎을 생각이었는데, 당장 황태자와 황녀가 언제 떠날지 모르니 일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지젤이 분에 차서 구둣발로 바닥을 거칠게 내리치며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너와의 미래에 더는 미련 없다는 걸 보여주려면, 이안 앞에서 저 무덤을 다 파헤쳐서 지금의 일상을 유지하고 싶다고 소리라도 쳐야 하는 건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왜 거짓말하게 만드는 거지? 당장 후작의 의도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지젤은 초조해졌다.

지젤이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후원을 향해 걷는데, 누군가 휙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왜 밥을 제대로 못 먹어?”

이안이 정말 이상하다는 듯 씩씩거리는 지젤의 얼굴을 살폈다. 스테이크 한 접시도 못 먹어치우는 지젤을 보며 그가 걱정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음식을 제대로 못 먹는 이유가 뭐야?”

“너 때문에.”

매일 아침마다 먹는 독초 때문에, 위가 약해져서 식사량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지젤은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다.

“지젤.”

“어떻게 할까? 네가 원하는 게 정말로 날 데려가는 거야? 좋아, 갈게. 그다음은?”

지젤은 분노를 숨길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바닥을 보여줘야 네가 나한테 질릴까? 그것까지는 보기 싫어서, 가라니까 왜 계속 일을 어렵게 만들어. 넌 이 진탕에 엮이면 안 된다고.

“내가 이혼해서, 그다음은? 말해봐. 이 빌어먹을-. 머리가 꽃밭으로 가득 찬 저하께서 말씀을 해보세요.”

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가는 걸 보면서, 지젤은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난 황국으로 가서 네 옆에 누가 버젓하게 서있는 걸 볼 자신이 없어. 주제도 안 되는데, 질투로 미쳐버릴 거야.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

지금 지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이기적인 욕심을 키워내는 자신이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추악한 안도감. 네가 그래도 날 쉽게 떨치지는 못하고 돌아왔구나. 지젤은 그에게 이 더러운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너랑 같이하지 못할 게 뻔해서, 가증스럽게 널 위하는 척이라도 해보겠다는데 왜 일을 어렵게 만들어.

“내가 가라고 할 때 가.”

내가 보내줄 때 가. 지젤이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젓자, 이안이 그런 지젤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안이 자신을 무슨 표정으로 보고 있을지가 무서워서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나 밀어내지 마, 그러지 마.”

이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지젤이 눈을 떴다. 동시에 지젤의 뺨 위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지젤은 그게 이안이 흘린 눈물이라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의 검은 눈이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것처럼, 그렁그렁 눈물을 담고 반짝였다. 그녀는 이안의 눈물에 약했다.

“그렇게 지겹다는 듯이 가라고 하지 마.”

“지겹다고 하지 않았어.”

“수십, 수백 개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서.”

자존심 다 버리고, 진짜 말도 안 되는 핑계까지 대면서 남았고. 하루라도 더 네 얼굴 보고 싶어서, 그 모든 게 다 만들어낸 이유인 걸 알아서 자괴감 들어도, 그래도.

“나 너 하나 보러 온 거야.”

“이안.”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 나 그냥 너 하나만 있었으면 해서.”

이안이 물기에 젖은 탁한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듣는 지젤은 혀가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입을 틀어막았다.

“지난 5년 동안 내내 고민했어. 시작이 어찌 되었든 나 없이도 잘 산다니, 이제 나도 털어내고 잘 살아야 하는데. 바보같이 그게 안 돼.”

그게 얼마나 비참한데. 이안이 어이가 없다는 숨을 토해내며 웃자, 그의 오른눈에 가득 들어찼던 투명한 눈물이 기어코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널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아? 나 너 정말 미워했거든? 난 이렇게 아픈데, 넌 잘 산다는 게 너무 미웠어. 근데, 와보니까 너-.”

네가 그렇게 아프고, 괴롭고 힘들어하는데. 이안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지젤은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안. 넌 나 미워해도 괜찮아. 그게 맞는 거야.”

“지젤, 난 지난 5년을 전부 후회해.”

이안의 눈에서 계속 흐르는 눈물에 가슴이 아파서 지젤은 계속 손으로 그의 눈가를 훔쳤다.

“네가 말하는 게 뭔지 나도 알아.”

이안도 정말 몰라서 이렇게 구는 게 아니었다. 황궁에서 그가 아무리 지젤을 보듬고 감싸줘도 분명 힘든 일이 생길 터였다. 모두가 이안과 엘레노어의 눈치를 본다지만, 그 능구렁이 같은 귀족들이 지젤을 헐뜯어댈 게 뻔했다. 근데 이기적이게도 그는 지젤을 놓아줄 수가 없었다.

“나도 잘 알아. 근데 나 너 없으면 안 돼.”

지젤은 이안이 자신을 꽉 끌어당겨 안으며 하는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안의 마음의 상처가 자신만큼 깊고 선명하다는 데 묘한 동질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애초에 날 안 만났더라면, 넌 행복했을 텐데.

“그러니, 나 밀어내지 마.”

이안이 뺨에 입 맞추며 속삭이는 말에 지젤은 정말로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지젤이 작게 한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지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이 이안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도록 둘은 서로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렇게 너무 가까운 나머지, 지젤은 이안의 눈매가 매서워지는 걸 보지 못했다.

***

“술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그거 먹고, 곱게 주무시면 어떨까요? 제인이 창가에 앉아 깊게 생각에 빠진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슬프게도 그녀는 지금 황태자와 황녀를 동시에 모시고 있었기에 매사 조마조마했다. 애초에 두 남매가 싸우면 꼭 주위 사람이 피를 보고는 했다. 게다가 후작저에 들어와 있으니 불안은 커졌다.

“달리아 안나.”

이안이 툭툭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걸 보면서 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섭게 남매가 버릇도 똑같았다.

“미련 없게 만들어줘야지.”

그래야 나만 볼 테니까. 이안이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하는 말에 제인은 콧잔등까지 구기고 진저리를 쳤다. 제인은 지젤이 이안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지젤 앞에서나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청승 떨지, 실제로는 어마어마하게 나쁜 인간인데요.

“제인.”

“네?”

“그 의원 왜 죽었는지 아직도 모르지.”

질문이 아닌 확신이 담긴 말에 제인이 반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뭐, 모르고 싶어서 모르는 건 아니고. 저하께서 워낙 정신없이-”

“이번에 마차 사고 직후 도망갔다던 마부도 아직 못 잡았고.”

맡긴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게 없으니. 이안의 오른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자 제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게 황국 기사단인지, 동네 오합지졸들인지 구분이 어렵네. 이래서는 즉위해도 뭘 맡기겠나.”

“바로 잡아오겠습니다. 정말 제가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잡아야죠. 잡을게요. 제인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했다. 다 잡아올게요. 이안은 시원치 않다 싶으면 다 뒤집어엎고 새로 뽑을 놈이었다. 여태 개고생 다 했는데, 황제의 호위 기사직은 다른 놈이 한다고? 그건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조지 콜튼은 또 뭐 하는 새끼인지 좀 알아봐.”

제인은 이안이 업무를 추가해주는 걸 묵묵히 들으며 입을 다물었다. 원래, 어느 시대든 약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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