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69)화 (69/135)

69.

“그림?”

침대에 늘어져있던 지젤이 놀라서 묻자, 미아가 고개를 거세게 주억거렸다.

“오스틴? 그 화가한테 별채를 내주셨어요. 한 달 정도 걸린다죠? 지젤 님의 초상화를 그리라 하셨대요.”

얼마나 예쁠까요? 미아가 지젤의 침실 바닥에 앉아 열심히 걸레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물론 그림이 우리 지젤 님의 미모를 다 담아낼 수는 없겠죠.”

미아의 말에 그 옆에서 먼지를 쓸어내던 비앙카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미아는 항상 너무 과했다. 하다못해 지젤의 침실은 꼭 본인이 손걸레질을 하고는 했다. 비앙카는 그런 작은 행동들 밑에 깔려있는 미아의 보상심리를 잘 알았기에 그 모든 게 껄끄러웠다. 내가 이만큼 하니, 너도 봐 줘. 옆에서 보면 그런 표정들이 눈에 보였다.

“내 초상화?”

“네, 집사님께 말씀하시는 걸 엿들었어요. 아마 오늘 저녁때는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실까요?”

지젤은 다이한이 자신의 초상화를 가지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채고 소름 돋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징그러워. 그녀는 이 저택에 어떤 의미로든 남는 게 싫었다. 그러고 보니, 비앙카가 말했던 독특한 주방 사람도 보러 가야 하는데.

“싫은데.”

“그래도 이미 꽤 큰돈을 주기로 하신 것 같아요. 벌써 하녀들이 다들 별채를 맡고 싶다고 난리랍니다. 잘생겼다던데요?”

“그런가.”

미아는 지젤의 대답이 짧아진 것에 잔뜩 눈치를 보며 등을 구부렸다. 요즘 지젤은 묘하게 차가운 면이 있었다.

“물론 후작님이 제일 잘생기셨지만요.”

미아의 말에 지젤은 쓰게 미소 지었다.

“그래, 잘생긴 후작님.”

네가 그림을 남기고 싶으면 해. 하고 싶은 대로 해. 아직 어떻게 끝낼지 결정 못 했으니, 그동안은 어울려줄게. 그렇게 침대에 앉은 지젤은 이안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소식을 알 수는 없었으나, 어렴풋이 이안이 황녀와 함께 떠났을 것이라 단정 지었다.

***

후작가의 정원 구석에서 붓을 들고 앉은 오스틴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살짝만 고개를 틀어 앉아 보시겠습니까?”

자신의 눈앞에 후작 부인이 붉은색 드레스를 뽐내며 앉아있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귀부인 흉내나 내던 것들 그리던 붓으로 후작 부인을 그려낼 수 있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수도에서 화제가 될 텐데, 후작은 거금까지 약속했다. 썩은 줄인 줄 알았던 자작가가 진정 금줄이었다.

“조금만 더 옆으로 기울여주시면, 완벽할 것 같습니다.”

오스틴이 눈을 반짝이며 하는 말에 지젤은 좀 짜증스러웠다. 조금만은 대체 어느 정도이며, 옆으로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도 똑바로 못 하는 놈을 데려와 그림을 그린다니.

“내가 잘 모르겠는데.”

지젤이 짜증을 애써 숨기며 미소 짓자, 오스틴이 냅다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지젤을 향해 걸어왔다. 초록 수풀을 배경으로 해야 좋을 것 같다는 화가의 말에 후작은 그녀의 정원 외출을 허락했다. 게다가, 원래는 서재에 있어야 할 붉은 원단의 고급 의자까지 이 흙바닥으로 끌고 왔으니 희극이 따로 없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좀 봐드리겠습니다.”

후작 부인과 다른 의미로 친밀해질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라. 오스틴이 성큼 지젤에게 다가와서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젤은 무례하다 이야기하려다가 귀찮아서 눈을 감아버렸다.

잔디가 바스락 밟히는 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턱과 뺨에 투박한 손가락이 닿았다. 조심스럽고도 부드러웠으며,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손길이 섬세했다.

“이렇게.”

그녀의 턱을 꾹 누르는 손길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앉아있어도 아름답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와 웃음기 가득한 어투에 놀란 지젤이 눈을 번쩍 뜨고 위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이안의 검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움찔거리는 턱 근육을 보아 화를 참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른 사람 손이 닿는 걸, 이리 함부로 허락하면 쓰나.”

“왜-”

“누구십니까?”

이안에 의해 뒤로 확 밀린 오스틴이 불만을 가득 담고 얼굴을 찌푸려서 지젤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왜 그가 여기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느라 시선을 내리까는데, 이안이 그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안 반가워?”

왜? 난 반가운데. 지젤은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세심히 살피는 걸 보면서도, 입술만 달싹였다. 그의 검지가 톡톡 그녀의 뺨을 눌러냈다.

“많이 놀라는 거 보니, 나한테 미안한 일이 많은가 봐.”

우리 하나하나 이야기해볼까. 이안이 지젤의 뺨을 살짝 아프게 꼬집으며 이를 악물었다.

“저하께서 여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네가 여기 있으니까.”

이안이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지젤의 코를 검지로 툭 쳤다. 지젤이 절로 미간을 구기자 그가 엄지로 그녀의 미간 주름을 펴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후작 새끼 보자고 왔을까.”

“오스틴, 잠깐 자리 좀 비켜주지?”

“네? 네, 네.”

지젤의 ‘저하’라는 호칭에 그제야 이안의 차림새를 살폈던 오스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흰색 정복이 언뜻 봐도 이쪽이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오스틴이 놀라서 후다닥 사라지자, 지젤이 이를 악물고 이안에게 따지고 들었다.

“뭐 하자는 거야?”

그녀의 질문에 이안이 잠깐 무언가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게 척이라는 걸 아는 지젤이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으나, 이안은 밀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지젤의 이마에 입 맞추고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어 보였다.

“너 꼬시러 온 건데.”

지젤은 아주 잠깐 그가 내뱉은 문장을 되새겨 보다가 얼굴을 확 찡그렸다. 뭘 하러 왔다고?

“뭐?”

“우리 겁쟁이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홀리기만 해.”

내가 그 핑계로 너 가방에 싸 들고 갈 거야. 이안이 지젤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장난기를 가득 담아 하는 말에, 지젤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려다 실패했다.

“진짜 미쳤어?”

“응.”

“그렇게 쉽게 인정할 일이야?”

“네 책임이라니까, 몇 번을 말해.”

이안이 지젤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데, 그의 눈이 웃고 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지젤은 입을 다물었다. 일이 또 이상한 방향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

“별채나 좀 얻어 쓸까 했는데, 이미 손님이 와있다니 남는 침실 아무거나 주면 되겠네.”

다이한은 엘레노어가 다리를 꼬고 앉아 하는 말에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엘레노어는 그 정도에 굴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어딜 가서도 정상인 취급 받는 일이 드물었다. 당당하게 후작가의 집무실 중앙에 앉은 엘레노어가 고개를 까딱였다.

“내 농을 한 적이 없는데, 후작이 그리 웃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후작이 귀가 좀 안 좋은가, 아니면 내 말을 귀담아 안 듣는 건가.”

엘레노어의 뻔뻔함에 다이한 옆에 서있던 한센은 감탄했다.

“내가 비공식적으로 방문했다 보니, 왕궁에 계속 숨어있기가 뭐해서. 후작저에 머물겠다고 했는데.”

“그래서, 황태자 저하와 함께 여기 머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하필. 다이한이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진 주먹을 꽉 쥐었다.

“당연히 황태자도 함께 있어야지. 황궁 기사단을 둘로 쪼갤 수는 없지 않아?”

“거절합니다.”

다이한의 칼 같은 거절에 엘레노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허면,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왕궁으로 돌아가 마가렛이 왜 저리 되었나부터 살필까.”

“황녀께서는 그게 제 약점이라도 된다 믿으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무얼 했다고. 다이한의 말에 엘레노어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 콜튼 경? 그 기사단장이 왜인지 모르지만, 후작 부인을 물고 늘어지는 것 같던데.”

엘레노어가 왼쪽 눈썹을 긁적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 가벼운 태도에 다이한이 기가 차다는 듯 숨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후작 부인이 꽤 마음에 들어서,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황국으로서도 꽤 곤란하지. 우리 말 잘 듣던 왕비가 저리 누워서 기약이 없으니, 왕자는 어리고.”

다이한이 뭔가 가늠하듯 엘레노어를 훑어보는데, 연녹색 눈에서 명백하게 살의가 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후작이 아무리 고집부린다 한들 당장 가서 다 엎어버리고, 후작 부인 납치해서 황국 가겠다는 멍청이 설득하기보다는 쉬웠다.

“물론, 후작이 왕비 대신 열심히 해주고 있지만. 민심 흉흉해지게 후작 부인이 왕비를 죽음으로 내몬 마녀라는 소문이라도 돌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겠어?”

정치적으로도, 또 남편으로서도. 엘레노어가 붉은 입술을 끌어당겨 매혹적으로 웃으며 말을 끝냈다가, 작은 손바닥으로 의자 손잡이를 탁 내려쳤다.

“정정하지, 나는 아니고.”

그녀가 다이한을 약 올리듯 입을 열었다.

“그대가 좀 곤란해지겠어.”

“여차하면, 제 아내에게 누명이라도 씌우시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말입니다.”

“그런 일 없도록 협조해달라는 말이었는데, 우리 다니엘 후작이 이런 곳에서는 둔하시구나.”

한센은 상황이 점점 위험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걸 보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엘레노어 뒤의 제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에게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그는 이내 체념했다.

제인이 두 눈을 반짝이며 후작과 황녀를 번갈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이길까? 제인은 이 저택에 들어앉아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두 번 다시 왕비와 내 아내를 엮지 않겠다 약조하십쇼.”

다이한이 엘레노어를 보며 하는 말에, 황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엘레노어 입장에서는 이안이 다이한을 죽이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소국이라지만 왕국은 다른 지역과의 국경으로서 역할도 해주고 있었으며, 광산에서 들어오는 세금이 짭짤했다. 그걸 친황국파인 후작이 꽉 쥐고 있는데, 굳이 들쑤실 필요는 없었다.

“내 이름을 걸고, 약조하지.”

어차피 금방 식어버릴 그 사랑 놀음, 조금만 맞춰주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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