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68)화 (68/135)

68.

“누가.”

“아! 지젤 님.”

지젤은 자신을 보며 놀란 듯 경련을 일으키는 하녀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저택에 이안이 와있더라도 동요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추문이라도 생기면 정말로 황태자에게 흠을 내는 일이었다.

“누가 왔다고?”

그걸 알면서도 마지막 기회를 놓쳐 얼굴 한번 보지 못했던 부친이 계속 겹쳐서 호흡이 절로 거칠어졌다.

“그-, 후작님께서 알리지 말라 하셨는데.”

청소 도구를 손에 쥔 하녀들이 우물쭈물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한마디씩 털어놓았다.

“일라이 자작님- 내외분이 오셨어요.”

“어제부터 계속 버티고 서계시는데, 후작님께서 절대 들이지 말라 하셔가지구.”

어린 하녀들이 눈치를 보며 하는 말에 비앙카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일라이 자작가. 귀족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 집안은, 다이한의 형식적인 부모들이었다. 물론 후작 작위를 받은 다이한이 모든 면에서 선을 그은 지 오래였다. 다이한의 다니엘이라는 성조차 일라이 자작에게 받은 게 아닌, 황국의 황제에게 작위와 함께 받은 것이었다.

“아.”

지젤은 작게 탄식하며, 본인이 실망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기적이게도 그녀는 이안이 그 밤을 끝으로 자신을 털어내 찾아오지 않는 것에 묘한 서운함을 느꼈다. 멍청아, 이안은 오면 안 돼. 지젤은 자신을 비난하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버티고 서계신다는데 계속 그리 둘 수도 없고.”

보나 마나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러 온 게 뻔했다. 지젤은 다이한이 결혼식 때도 부모를 부르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실제로 지젤은 그들을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다 마주쳐도 다이한이 철저하게 거리를 뒀고, 매사 가까이 오지 말라 경고하고는 했다. 자작 부인은 사생아였던 후작을 꽤나 괴롭혔었는지 다이한을 보면 두려워했다.

“후작님께서 껄끄럽다 하시면 나라도 대신 인사를 드려야겠지. 집사를 불러오렴.”

지젤이 집사를 찾으며 고개를 까딱이자, 비앙카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응접실에 앉은 일라이 자작은 후작가의 저택에 처음 들어온 티를 최대한 내지 않으려 하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나 어깨가 절로 위축되는 걸 숨길 수는 없었다. 후작저는 수도 내 귀족들의 저택 중 가장 크다는 말이 허풍이 아닐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자작 부인은 그런 남편의 옆에 앉아서 인상을 확 찌푸렸다. 다이한은 죽으라고 내보낸 전쟁터에서 살아와서는 두고두고 속을 썩였다. 이제 사교계 누구도 일라이 자작가와는 얽히려 하지 않았다. 후작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후작가의 후원을 받게 도와주실 겁니까?”

와중에 둘 사이에 앉은 청년이 그들에게 따지고 들었다.

“아니면, 당장에 저에게 진 빚을 모두 상환하셔야 할 겁니다.”

“아, 그렇다니까!”

일라이 자작은 아까부터 눈치를 주는 젊은 화가 오스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점점 기우는 가세와 좁아지는 입지에 평민인 그에게까지 돈을 빌렸지만, 시간만 있으면 갚을 수 있었다. 곧 추수가 다가오니 말이다. 다이한이 후작이 된 뒤로 완전히 시골로 쫓겨나, 얼마 안 되는 땅이지만 영지민들을 쥐어짜 낼 수 있었다.

“왜 사람 말을 못 믿는가. 그래도, 우리 자작님께서 후작님의 친부이거늘.”

자작 부인이 자신의 남편 편을 들며 오스틴을 노려봤다. 그러나, 이미 작은 저택 한 채 값만큼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차용증을 쥐고 있는 오스틴은 기죽지 않았다. 그게 어떤 돈인데. 귀족 같지도 않은 것들의 더러운 놀이에 어울려 힘들게 번 돈들이었다. 그래도 귀족이라고 어떻게 연줄이 되어주려나 기대해서 빌려준 돈인데, 젠장.

“그 대단하신 자작님께서 1년이 넘도록 한 푼도 못 갚고 계시니 하는 말입니다.”

“아니, 이 건방진 놈이!”

자작이 어제부터 계속된 오스틴의 정당한 핍박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지젤이 들어섰다.

“아.”

세 사람은 지젤이 들어서자마자 동시에 작게 탄식했다. 자작 부부는 이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오스틴은 그러지 못했다. 후작 부인의 걸음걸이를 따라 살랑거리는 붉은 드레스에서 장미 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사람 자체는 말라서 가녀려 보였지만, 이쪽을 내리깔아 보는 시선 처리가 우아했다. 옅게 미소를 짓고 있는 붉은 입술까지, 그의 기준에 완벽했다. 그 탐스러운 입술에서 흘러나온 끝이 잔뜩 갈라진 기괴한 목소리를 제외하면 말이다.

“두 분 오랜만에 뵙네요. 그간 잘 지내셨을까요?”

지젤이 살풋 웃으며 응접실 중앙 자리에 자리 잡았다. 다이한의 약점이 될 만한 게 없을까 싶어서 들인 거지, 격식 있게 윗사람 대우해 줄 생각은 없었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자작 부부는 얼굴에 욕심이 가득했다.

“우리야 여전하지, 후작 부인도 아주 좋아 보이니 다행이네. 큰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다리를 좀 절기는 하지만 많이 나아졌답니다.”

반듯하게 앉은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지젤의 푸른 눈에 담긴 희미한 경멸을 눈치챈 자작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작이 그런 아내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그, 다이한은 언제쯤 오려나?”

“이쪽은?”

지젤은 자작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는 청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평범했고, 준수한 외모였으나 인상 깊지는 않았다. 살짝 넋이 나가 있는 오스틴 대신 자작이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그 오스틴이라고. 우리가 이제 예술가들을 몇몇 후원하고 있는데 아주 재능이 뛰어난 친구라, 후작가에서 후원해보심 어떨까 싶어서 말이지. 저택에 머물면서 우리 후작님 초상화도 좀 그리고 그런-”

“아, 예. 제 그림 몇 개 보여드리겠습니다.”

자작이 오스틴에게 눈짓하자, 그가 싸 들고 온 캔버스를 꺼내 들었다. 천에 곱게 감겨있는 걸 풀어내던 그의 손길을 지젤이 중단시켰다.

“글쎄요, 제가 그림에는 큰 조예가 없는지라.”

자작의 말에 지젤은 금방 흥미를 잃었다. 저런 걸 저택에 들였다가는 피곤해지기만 할 뿐이다. 별것도 아니었는데, 시간만 낭비했네.

“뜻은 감사하나, 딱히 흥미가 안 생기네요.”

지젤이 상큼하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작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게. 데려온 우리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자세히 좀 봐주면 좋겠는데.”

“가시는 길 집사가 도와드릴 겁니다.”

자작 부인은 대놓고 이쪽을 무시하는 지젤을 노려보다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우리가 감정의 골이 깊은 사이라지만, 그래도 자작님께서 후작의 친부가 되거늘 그 태도는 뭐지?”

그녀의 지적에 지젤이 눈을 데구루루 굴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동시에 비앙카가 응접실 문을 열고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상대하지 말라는 뜻 같았으나, 지젤은 입을 열었다.

“태도?”

지젤이 짧은 단어로 되묻자, 자작 부인이 표독스럽게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이미 오랜 시간 저택 앞에 서서 홀대받았고 그걸 어떻게든 보상받고 싶었다.

“남편의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오만하고 건방지지 않은가!”

“부인, 그만하시게.”

자작이 지젤의 눈치를 보며 말리는데, 지젤은 잠깐 고민하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 못 했는데, 제 태도가 그랬다면 사과드릴게요.”

지젤이 미안함을 꾸며내듯 과장되게 울상 짓고 오른손을 가슴께에 얹었다. 자작 부인은 지젤이 자신이 아닌 그 뒤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후작님.”

다이한은 정말 피로한 듯 깊게 한숨을 쉬며 지젤을 내려다봤다. 지젤이 그런 다이한은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다이한의 한숨으로는 기죽지 않았다.

“아, 다이한.”

자작 부인이 화들짝 놀라 자신의 남편 뒤로 숨자, 자작이 애써 어색함을 감추고 그를 불렀다. 다이한은 이제는 노부부가 된 둘을 가만히 보다가 지젤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2층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는 지젤이 두 사람을 저택에 들인 것에 대해서는 화내지 않았다. 그러자면 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확실히 제가 잘못했네요.”

지젤이 쉽사리 잘못을 인정하고는 다이한의 옆에 자리 잡았다. 다이한은 자신의 옆에 자리 잡고 선 지젤을 가만히 보며 물었다.

“그래서.”

“저쪽은 오스틴, 화가라고 소개시켜 주셨는데. 아시다시피 제가 이쪽으로는 큰 관심이 없어서요.”

“화가?”

여태까지 자신들을 무시하고 있던 다이한과 눈이 마주치자 놀란 자작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주 재능있는 친구야. 사람 눈코입을 아주 잘 그리지 뭐야. 그래서 내 생각에는 후작 부부가 그림 한 장 더 있으면 어떨까 해서 온 거지.”

자작의 칭찬은 형편없었지만, 오스틴은 본능적으로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손에 쥐고 있는 캔버스를 빠르게 들어 후작에게 내밀었다. 다이한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름 모를 여자의 초상화를 가만히 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여자의 귀에 걸린 루비 귀걸이의 색감이 영롱했다.

“물론, 후작가에 둘을 담은 그림이 많겠지만- 이게 또 화풍이 그 뭐라 하더라. 아무튼, 누가 오스틴의 그림은 나중에 아주 비싸게 팔릴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 가지고 말이지.”

그의 말에 다이한은 또 대답하지 않았다. 저택에 둘이 그려진 그림은 없었다. 정확하게는 지젤의 그림이 단 한 장도 없었다. 잠깐 뭔가 생각하던 그는 지젤을 다시 노려보듯 내려다봤다. 화가 풀릴 때까지 얌전하게 있겠다더니 또 거짓이었다.

“그럼, 전 2층 올라가 있을게요.”

지젤이 그의 비난을 알아차리고는 비앙카를 따라 응접실을 나섰다. 다이한은 그런 지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입을 열었다.

“내 경고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후작저에 발 들이지 말라.”

“그게, 그 우리는 또 후작 부인이 문을 열어줘서-”

“비루한 자작가 이름이라도 유지하고 싶으면.”

다이한은 자작의 변명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자작 부인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다이한을 보며 반사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방금 역시나 부인에게도 꽤 무심하게 군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는 후작 부인 앞에서 화를 참고 있던 중이었다. 분노를 담은 얼굴이 아까의 무표정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함부로 말 섞지도, 찾아오지도 말라. 분명 얘기했었는데 나이 들어 잊으신 건가.”

“그게-”

“말로 해서 기억 못 하시겠거든, 다른 방법도 많습니다.”

지은 죄가 있는 자작 부부가 놀라서 파드닥거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가, 가겠네. 지금 바로 가지.”

다이한의 협박 아닌 협박과 기세에 눌린 자작 부부가 기겁을 하고 응접실을 나갔다. 다이한이 그 뒤의 오스틴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화가는 남고.”

후작의 말에 자작 부부를 따라나서던 오스틴이 캔버스를 끌어안고 그대로 굳었다. 그는 자작에게 돈을 빌려줬던 그때부터 일이 꼬였다고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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