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67)화 (67/135)

67.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에 다이한은 덧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떼어냈다. 지젤의 하얀 피부에 붉게 손자국이 남았다. 다이한은 그걸 가만히 보다가 등을 돌리고 의식적으로 그녀와 멀어졌다.

“제발-.”

단어 자체는 간곡한 애원이었지만, 그걸 내뱉는 목소리가 살벌했다. 가쁜 숨을 몰아쉰 그가 집무실 책상에 기대섰다. 예견된 상실에서 발현된 공포가 그에게 폭력을 종용했다. 그게 가장 쉬운 방법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이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나가.”

다이한이 애써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데도 지젤은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이한의 바로 뒤에 서서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대왔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까지는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행동을 예측 못 했던 다이한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이유를 알려주실 때까지 저택에서 조용히 쉴게요.”

지젤의 팔이 그의 허리를 감아왔다. 다이한은 천천히 몸을 감아오는 그녀의 손짓이, 사냥감의 목을 죄는 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도 그걸 밀어낼 수 없었다. 그를 뒤에서 끌어안은 지젤은 확신했다. 그가 그녀를 밀치거나, 꺼지라 욕을 하지 않는 게 우스웠다. 다이한은 자신을, 적어도 형식적인 부부간의 감정 이상으로 좋아했다.

“그러니 화내지 마세요.”

다이한은 다정스럽게 구는 그녀가 이쪽을 간과했다는 걸 눈치채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동시에 안심했다. 그녀는 아직 그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아직 건재한 그녀의 원망과 미움에 기대었다. 그 거대한 응어리는 황태자의 애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다이한이 자신을 감싸 안고 있는 그녀의 손을 꽉 힘주어 잡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지젤은 그를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그녀가 자신을 증오함에 감사했다. 정말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

지젤이 후작저에 머문 지 2년째 되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지젤은 정원 한편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정오쯤 그걸 본 다이한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해가 지고 있는 와중에도 그녀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면서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걸 보고 있는 거야?

“후작 부인은?”

집사는 창가에 서서 지젤을 내려다보는 다이한의 질문이 그녀가 어디 있는지가 아닌, 무얼 하고 있는지 묻는다는 걸 조금 늦게 알아챘다.

“답답하신지, 점심부터 정원에 앉아계십니다.”

“뭐가 답답해서.”

“거기까지는 잘-.”

다이한의 질문에 집사가 그를 따라 얼굴을 구겼다. 후작 부인에게 거기 앉아계시는 이유가 뭔지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쯧.”

짧게 혀를 찬 다이한은 지젤을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저러다 다시 골골거리기라도 하면 본인 손해였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려던 다이한은 집무실 의자에 앉은 지 5분도 안 지나서 일어서야 했다.

그걸 보면서 집사는 담요를 다이한에게 내밀었다. 지젤이 건강을 회복했음에도 다이한은 이런 일에 민감하게 굴었다.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다이한은 그걸 받아 들고 거칠게 걸음을 옮겼다.

저택을 나서면서 다이한은 지젤이 손이 너무 많이 간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매사 너무 신경이 쓰였다.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그의 시간을 낭비시켰다.

“아, 후작님.”

의자에 앉아있던 지젤이 그를 발견하고 일어서려 했으나, 다이한이 더 빨랐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무릎 위로 툭 담요를 던졌다.

“늙은 의원 꼴 보기 싫으니 덮어.”

지젤은 그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는 작은 담요를 무릎 위에 펼쳤다. 지젤은 다이한의 말에 크게 반응하지도, 대답하지도, 그렇다고 담요에 대한 감사를 표하지도 않았다. 지젤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고, 다이한은 그녀에게 대체 뭘 보고 있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곧 그는 성인 남성이 끌어안기도 버거울 정도로 큰 나무 한 그루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나뭇잎이 하나, 둘 바람결에 흔들려 떨어졌다. 마치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바람 따라 낙엽이 쏟아지는 풍경이 기이해서, 정확하게는 그 한가운데 앉아있는 지젤이 시선을 사로잡아서 다이한은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한 발 물러섰다.

지젤의 붉은 머리카락이 계절을 머금듯 빨갛게 물든 낙엽 같았다. 다이한은 그제야 요 근래 자신이 무엇을 보든 지젤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만 해도 그는 서늘한 새벽을 지워내는 일출의 따스함을 느끼고 그녀를 떠올렸다. 호수를 보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푸른 눈을, 일렁이는 벽난로를 보고 있자면 손짓 한 번에 흐트러지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생각하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지젤이 자신의 저택 정원에 조용히 앉아있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제 겨울이 와서.”

다이한이 본인이 얼마나 많이 그녀를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 고민하는데, 지젤이 그를 당혹감에서 건져냈다. 와중에 나뭇잎 한 장이 다이한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는 지젤의 위로 낙엽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곧 낙엽 하나가 지젤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지젤은 남색 담요 위에 떨어진 낙엽을 보며 쓰게 웃었다.

“나무가 죽어버렸네요.”

그녀의 말에 다이한은 눈을 깜빡였다. 죽었다고 표현해야 옳은가?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죠, 겨울이 와버렸으니까.”

지젤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중얼거렸으나, 다이한은 찰나 울상 짓는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생생하게 초록빛을 머금은 적이 없다는 듯, 바짝 말라 땅에 수북이 쌓인 낙엽들을 보며 다이한은 숨을 멈췄다. 그것들이 마치 그녀 같았다.

“올해도 겨울이 왔네요.”

지젤이 이번엔 슬픔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미하엘이 항상 오던 그 계절이 다시 돌아왔네요. 그녀는 그를 만날 수 없는 겨울이 너무 추워서 담요를 더 끌어 올렸다. 다이한은 파르르 떨리는 지젤의 주먹 쥔 손을 보다가 이내 등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목구멍에서 뭐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그는 그 이상 지젤을 보고 서있을 수가 없었다. 집사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보는데, 그가 이를 악물고 명했다.

“나무 베어버려.”

“네? 이 저택을 지을 때부터 있던 나무입니다. 갑자기요?”

집사가 놀라서 이유를 묻는데 다이한은 그걸 답해줄 수 없었다. 그조차도 정확히 왜 저걸 치워야겠다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보기 싫으니 당장 베어버려.”

그다음 날 저택 사람들은 후작의 명대로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베어냈다. 사람들은 후작의 괴이한 명령에 크게 수군거렸지만,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 지젤 또한 아쉬움을 표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명확했다. 두 번은 지젤의 그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죄 없는 나무와 상관없이 겨울은 매년 돌아왔다. 지젤과 다이한 모두 인정했듯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지젤은 차분하게 서재에 홀로 앉아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그런데, 서신과 하인의 왕래까지 막힌 마당에 저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후작은 저녁 늦게 돌아온 비앙카와 미아에게도 외출 금지를 명했다. 생각보다 세세하고 까다로운 후작의 태도에 지젤은 그가 정확하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그를 더 아프게 할 수 있을지도 고심되었다.

“비앙카, 너도 나 때문에 답답하지?”

“저는 괜찮습니다.”

대신 밖에 사람들이 답답해하겠지. 비앙카가 삼킨 뒷말을 알아챈 지젤이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비앙카가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생각 중이세요?”

“다른 남자를 끌어들여 볼까? 아니면, 간단하게 후작 눈앞에서 죽어버리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야. 지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이어갔다. 괴로워할까? 아니면, 그 정도의 가치는 없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이어갈까?

“우는 걸 보고 죽으면, 속이 좀 시원할 것 같아. 과연 죽은 나를 보고 슬퍼하려나.”

“지젤 님.”

비앙카가 경고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지젤은 태연하게 턱을 괸 채로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2층에서 떨어져봤자 죽지는 못하니, 좀 더 자극적인 방법을 써야겠지.”

지젤이 자신의 목을 긋는 손짓을 하며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근데, 그 정도로 깊은 감정은 아니었다며 비웃으면 정말 개죽음이 되겠네.”

다이한이 죽어가는 자신을 보며 어떤 말을 하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상상해보던 지젤은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 뒤로 이안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안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에 또 머리가 복잡해진 지젤은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안, 넌 내 일을 어렵게 만들어.

“제가 정신이 없어서 말씀드리는 걸 잊었었는데, 주방에 좀 독특한 사람이 새로 왔어요.”

비앙카는 지젤의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도널드를 팔아먹기로 했다.

“독특한 사람?”

지젤은 비앙카가 고개를 까딱이는 걸 가만히 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누가 내 저택에?

“내가 갑자기 배가 고프니, 오랜만에 주방에 직접 내려가 봐야겠구나. 저택 안이니 그 정도는 후작님께서도 용인해주시겠지.”

배고픈 걸 굶으라 하지는 않으시겠지. 지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복도로 나서자 비앙카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둘은 복도에 울리는 하녀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어제부터 저택 입구에 와있다며?”

“그러니까 말이야,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저렇게 버티고 서있는 거래?”

그 말을 들은 비앙카는 고개를 기울이며 대체 누가 왔다는 건지 궁금해했지만, 지젤은 아니었다. 그 짧은 몇 마디에, 지젤은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딸 얼굴 한번 보겠다 버티던 아버지가 떠올라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 뒤에 떠올린 사람은 이안이었다. 설마, 여기까지 온 거야?

비앙카는 지젤의 표정이 굳어 드는 걸 보면서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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