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지젤은 후작저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며 다이한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해 고심했다. 화를 낼까? 화를 내고 추궁하겠지. 어쩌면 왕비랑 엮이는 문제 때문에 이쪽을 내칠지도 몰랐다.
“지젤 님!”
“한센 경.”
한센이 가장 먼저 그녀에게 달려왔다. 후작저에 도착하니 해가 완전히 하늘에 올라 땅을 밝히고 있었다. 주황빛 일출이 그녀의 얼굴을 따스하게 감쌌다. 지젤은 새삼스럽게 후작저 풍경이 달라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어딘지 더 차갑고, 생기 없어 보였다. 자애로운 햇빛이 저택을 감싸,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음에도 그렇게 느꼈다.
“괜찮으신 겁니까?”
“네, 별일 아니었어요. 작은 오해가 있었는데 잘 풀었습니다.”
한센은 자칫 잘못하면 후작님까지 곤란해질 수 있는 일을 잘 해결하고 온 지젤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울고불고 난리만 치는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병문안 한 번 간 게, 이렇게 큰일이 될 줄 몰랐네요. 앞으로는 조금 더 주의해서 움직일게요.”
“아닙니다, 다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답을 찾으려다 보니 어이없는 오해들을 하는 거죠.”
한센이 적극적으로 지젤의 편을 들어주자, 그녀는 옅게 미소 지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후작님께서는-?”
“아, 그게. 서재에 계십니다.”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지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지젤은 2층 서재 창가에 서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후작을 발견했다. 창문을 열어놓고 창틀을 오른손으로 꽉 쥔 채로 서있는 후작을 보며 지젤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어그러진 입매와 고요하게 분노를 삼키는 표정이 볼만했다. 그는 누가 봐도 화가 나 보였다. 결혼식 이후에 몇 번 봤던 그 얼굴이었다.
당장 소리를 지르고, 폭력적으로 굴 법도 한데 다이한은 그러지 않았다. 그럼 차라리 보지 않으면 되는데, 그는 그 또한 하지 못하고 지젤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후작님.”
지젤이 작게 고개 숙여 인사했으나, 그는 그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지젤은 반사적으로 어제 이안이 물어뜯다시피 해 잇자국이 남은 왼쪽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드레스에 분명 가려져 있는데 그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저택에 발을 디디며 그녀는 그에게 단순하게 죽음뿐만 아니라 다른 고통도 새겨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젤이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의 귀에 걸린 새하얀 진주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
“아침 식사 바로 하실 수 있도록 지금 가지고 올게요.”
지젤은 눈에 띄게 기뻐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미아를 보며 다른 사람을 찾았다.
“비앙카는?”
반사적으로 미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녀는 지젤에게 그런 티를 안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오늘 아침부터 안 보였는데, 따로 심부름을 시키신 게 아니세요?”
원래도 비앙카는 지젤의 심부름으로 바빠 저택의 일을 거의 돕지 않았기에 미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보면서 지젤도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킨 게 없는데, 뭔가 일이 생겼나. 지젤은 무슨 일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입 안의 혀를 짓씹었다.
그러고는 미아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는 사이에 화장대 밑에 손을 넣어 숨겨진 쪽지를 확인했다.
[그날 조지 콜튼 경을 목격한 시종 찾았음.]
그날이 지칭하는 게, 왕이 죽은 날이라는 걸 알아챈 지젤이 미간을 찌푸렸다.
“미아, 바르한 자작가에 가볼 테니 미리 사람을 보내 알려줘.”
지젤이 화장대 앞에 앉으며 하는 말에 미아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응?”
“후작님께서 지젤 님의 외출은 물론, 서신도 허용하지 않는다 하셨어요.”
곤란하다는 듯 말하는 미아의 표정에서 묘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걸 본 지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도?”
분명 후작이 그녀를 구금하겠다 했지만, 왕궁에 다녀왔고 이렇다 할 명분도 없이 이렇게 길게 외출을 금지할 수는 없었다. 어제의 외박은 표면적으로 황녀가 불러 간 거였으니, 지젤을 탓할 수 없었다. 그것도 잘 해결되었다 이야기했는데, 왜. 그녀가 황태자인 이안과 무언가 있을 것이라 어림짐작했다 하더라도, 증거도 없이 이럴 수는 없었다.
“네, 이제 지젤 님의 이름으로 오가는 모든 서신은 다 후작님께서 관리하겠다 하셨어요.”
“이유가 뭔데.”
“그건 정확하게 이야기 안 하셨지만, 2층을 벗어나는 것도 안된다고 하셨어요.”
2층을 벗어나지 말라고? 말 그대로 서재와 집무실, 침실만 오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지젤의 눈가가 절로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고?
“그럼 나한테 이 저택은 감옥이나 다름없네?”
“아니죠, 지젤 님은 후작 부인이시잖아요.”
푹신하고 안락한 침대가 있으시니, 차갑고 더러운 감옥과는 다르죠. 상큼하게 대답한 미아가 웃으며 침실을 나가는 걸 보며, 지젤이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미아, 넌 지금 이 상황이 기쁘니?”
지젤의 질문에 미아는 뭔가 생각하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조용히 답했다.
“전 지젤 님께서 안전한 곳에서, 아무 생각도 안 하시고 편안하게 쉬실 때가 가장 기뻐요.”
그녀의 말에 지젤은 조용히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해야 할 일 천지인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여기 갇혀있을 수는 없었다.
***
다이한은 노크도 없이 집무실에 들어온 익숙한 침입자를 확인하고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지젤이 그런 그를 살피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무슨 용무가 있어서.”
다이한은 일부러 그녀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럼에도 주변 시야로 지젤의 드레스 끝자락이 보였다.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파란 드레스가 그녀의 푸른 눈동자색처럼 짙었다.
“제게 왜 화가 나신 건지 얘기해 주세요.”
드물게 지젤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중앙까지 걸어 들어오며 턱을 들어 올렸다. 그걸 들은 다이한이 입 안의 살을 짓씹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왜 화가 났냐고.
“나가.”
지젤은 그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그녀에게 명하는 걸 듣고 한쪽 눈을 찡그렸다. 정확하게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아야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있었다.
“말씀해주세요.”
“방해되니 나가라는 말이, 말 같지가 않아?”
말을 짓씹어 뱉어낸 다이한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봤다. 지젤은 그의 옆에 쌓여있는 서류들을 슬쩍 살폈다. 왕도, 왕비도 없는 왕국의 정무를 보느라 애쓴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그도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왕비의 대리인조차 없는 지금, 대부분의 결정은 후작이 하고 있다고 들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할 테니, 말로 할 때 나가.”
다이한은 무심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종이를 보고 있었지만, 그건 애써 가장된 것일 뿐이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촉의 만년필이 종이를 부욱 찢어냈다. 빼곡히 글씨가 적힌 새하얀 종이가 그의 인내심처럼 찢겨나갔다.
“뭐 때문에 화가 나셔서, 제가 죄인처럼 저택에 갇혀있어야 하는지 말씀을 해주세요.”
그러기 전에는 나가지 않겠습니다. 지젤이 숨을 들이마시며 하는 말에 다이한은 기어코 손에 쥔 만년필을 거칠게 집어 던졌다. 지젤을 스쳐 지나 벽에 부딪힌 만년필이 조각나 바닥으로 흩어졌다.
“이유?”
다이한은 놀란 지젤이 어깨를 움츠리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는 겁먹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뜬 지젤의 왼팔을 잡아 집무실에서 끌어내려 했다. 지젤이 그런 그를 밀치고 버텨 선 채로 차분하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화가 나신 이유를 말씀을 해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래야 제가 변명이라도 할 테니까요.”
죄수도 항변의 기회는 가집니다. 지젤의 말에 다이한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다 생각했다.
“제 잘못이 뭔지 짚어주시면, 왜 그리했는지 말씀을 해드릴게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그는 어젯밤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정말 듣고 싶지 않았다. 다이한은 지젤의 가녀린 목을 부러트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 덥석 양손으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을 조르는 건 아니지만, 그가 잡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어서 지젤은 숨을 멈췄다.
“난 네게 아무것도 듣고 싶지가 않아.”
어제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그걸 입 밖으로 내뱉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뭐가 후작님을 이렇게 분노하게 만들었나요?”
궁금해요. 지젤은 침착하게 자신의 목을 쥐고 있는 다이한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다이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젤은 그의 노골적인 동요가 흥미로웠다. 지젤의 자의는 아니었지만 어제의 외박 때문에 분노했다면 자존심의 문제일까. 아니면 정말 네 주제에 날 좋아한다고?
“화가 난 이유가 뭐냐고.”
다이한은 정말로 그를 걱정하듯 다정하게 올려다보는 지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푸른 눈이 그를 멍청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그걸 보고 있노라면, 그는 부끄러워 차마 보이지 못한 속을 꺼내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입 안의 살점이 떨어지도록 짓씹었다. 익숙하고도 비릿한 피 내음이 그의 입 안에 퍼졌다. 그의 커다란 몸이 잘게 떨리는 걸 보며 지젤은 긴장했다.
“후작님.”
다이한이야말로 궁금했다. 난 널 죽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강제로 취하지도 못하고. 제정신 아닌 사람처럼 이렇게 혼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휩쓸린다. 이걸 뭐라 정의한단 말인다가. 죄책감? 그가 그런 걸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얘기를 해주세요, 제가 고칠게요.”
지금 이 분노의 발단은 간단했고 그건 그녀가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제 지젤이 황태자와 함께 있었을까? 잊었던 감정과 기억을 새로 만들어내, 추억을 꽃피우고 내일을 약속했을까. 그 긴 밤 둘이 서로의 애정과 사랑을 확인하고 5년의 공백을 채웠을까. 그리해서 기어코 떠나겠다 해도 그는 보내줄 수 없었다. 그런데, 지젤이 마음먹고 그를 떠나면-.
“다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