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65)화 (65/135)

65.

침대에 누운 이안은 등 돌리고 누운 지젤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목욕 이후에 곱게 잠든 척 가만히 누워있던 지젤은 결국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이제 곧 해가 떠오를 텐데, 둘은 계속 잠든 척만 하고 있었다.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었다.

“너 왜 안 자?”

“그러는 너는.”

이안이 퉁명스럽게 답해놓고는 지젤의 뺨에 쪽 소리 나게 입 맞췄다. 어른들의 입맞춤치고는 장난스러운, 낯간지러운 행동이었다. 지젤이 아무 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만 있자, 그가 그녀를 자신 쪽으로 돌아눕게 당겼다. 그러고는 그녀의 코끝을 검지로 톡톡 누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날 얼마나 멍청하게 보는 거야.

“날 두고 가는 걸 또 보고만 있을까.”

“나도, 너도 돌아가야지.”

이안은 지젤이 어딘지 매정하게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렇게 품 안에 넣어두고 나니까 여유가 생겼다. 상처받지도 동요하지도 않은 그였지만 짜증은 감추기 좀 힘들었다.

“우리 지젤 양은 내 말을 참 안 들어.”

귀담아듣는 법이 없지. 그가 그녀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괜찮아. 네가 기억할 때까지 내가 계속 새겨줄 테니.”

어쩌면,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현실감각이 없는 건가? 황태자라서 무서운 거 없이 자라서 저러는 거야?

“다시 다람쥐만큼 살도 찌우고.”

그의 다람쥐 소리에 지젤은 상체를 일으켰다. 얇은 슬립 하나 걸친 피부에 서늘한 새벽 공기가 닿아 절로 소름이 돋았다. 이안이 그걸 따라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한쪽 무릎을 세워 턱을 괴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탄탄한 허벅지 근육부터 복근까지 훤히 드러내고 있는 이안을 본 지젤은 이불이 그의 중요 부위들을 다 가린 걸 다행으로 여겼다.

“물 줘?”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미소 짓고 있는 이안을 보며 지젤은 고민했다. 알고 보니까 좀 멍청했던 걸까, 왜 저렇게 웃어. 지젤은 엘레노어 황녀의 말대로 적당히 어르고 달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거짓말이 될 터였다. 이안이 황제가 되고, 결혼을 해서 만약에 돌아온다 해도 지젤은 일을 다 끝내고 이미 죽어있을 터였다. 그래서 그걸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또.”

이안이 그녀의 눈가를 엄지로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또 혼자 고민만 하지, 말은 안 하고.”

왜냐하면, 너에게 조금이라도 피해 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왔고, 너는 네가 가야 할 길이 있잖아. 나중에라도 너에게 원망받고 싶지 않아. 우리 사랑이 사그라들어 작아지고, 네가 날 원망하는 말이라도 하면 난 못 견딜 거야. 지젤은 그 모든 걸 삼켜냈다. 답답하고 꼬였을지언정 그게 그녀의 몫이었고 나름의 사랑이었다.

“갈게, 이걸로 우리 마무리해.”

이안은 지젤이 그의 손을 밀어내며 하는 말에 누가 가슴께를 찢어발기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왜 우리 대화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까?”

그의 타당한 의문에 지젤은 고개를 내저었다.

“결혼했으니 난 내 의무를 다해야지. 지금 나와의 이런 관계도 결국 네 오점으로 남을 거야.”

지젤은 이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걸 보면서도 말을 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비겁한 변명이었다.

“내가 널 따라가면, 넌 얼마 못 가서 날 원망할 거야. 비운의 첫사랑을 몇 년 만에 이룬 쾌감이 얼마나 갈까? 반년? 한 달? 그게 다 닳고 나면 넌 날 황궁에서 내쫓고 싶어 할걸. 모두가 내 얘기를 하며 널 공격할 테니까. 얼마나 지긋지긋하겠니.”

“왜 우리에 대해 그런 식으로 얘기해.”

이안은 지젤이 일부러 더 냉소적으로 구는 걸 알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젤은 그녀를 보는 이안이 상처받은 표정을 하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네가 후작도 죽여주고, 왕비도 죽여준다고? 좋아, 그다음에는?”

이안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걸 보며, 지젤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도무지 후첩으로 못 있겠다 하면. 과부 데려가서 네 권력가의 약혼녀랑 파혼할래? 그럼, 넌 귀족들 다 적으로 돌리는 거야. 그럼 내가 계속 좋겠어? 아니, 얼굴 보기도 싫어질 텐데. 미움받을 게 뻔한데 내가 널 왜 따라가.”

지젤은 눈을 부릅뜨고 살짝 놀란 듯 눈을 깜빡이는 이안을 노려봤다. 대답할 말이 있어? 없지. 그녀는 이제 스무 살 어린애가 아니라는 게 사무치게 서글펐다. 복수를 떠나서도 단순히 이안을 사랑한다고 그를 따라가서 괴롭힐 수는 없었다. 이안은 그런 지젤을 가만히 살피다가 그녀를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너 무섭구나.”

그래서 그렇게 놀란 고양이처럼 공격적이구나. 이안의 창의적인 해석에 지젤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턱 벌렸다. 이안이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듯 속삭였다.

“우리 지젤, 겁먹었어.”

“아니?”

지젤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고 그를 올려다봤다. 이안이 정말로 어린애 달래듯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문지르고 등을 쓸어내렸다.

“무섭냐고? 너 내 말 듣기는 해?”

네가 현실 도피하는 거 아니야? 지젤이 따지고 들자 이안은 고개를 천천히 내저으며 제인이 가져다 놓은 가루약과 물잔을 한 손에 들었다.

“많이 먹고, 많이 쉬고 다시 얘기해. 나도 할 이야기 많은데, 일단 네가 좀 안정되고.”

지금처럼 무서워하는 상태로는 안 돼. 더 놀랬다가는 내 지젤 정말 도망가겠어. 지젤은 이안이 애정 어린 손길로 몸을 쓰다듬는 걸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약인데?”

“5년 전부터 먹는 수면제.”

몸에 무해한 약초로 만든 거라니까, 같이 먹자. 차분함을 가장한 이안이 꽤나 괜찮은 타협안인 척 그녀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너도 잠들고, 나도 잠들고. 자는 동안은 아무 생각 안 하고 쉴 수 있으니까. 쉬고 다시 얘기하자.”

지젤은 그 말이 그녀를 묶어두려는 의도를 숨긴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갑자기 온순해졌네.

“너 몽유병 있어서 걸어 나갈 건 아니지?”

“없어.”

이안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로 대답하는 지젤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꾹 누르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입 안에 쓰디쓴 가루약이 퍼지자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텁텁하고 떨떠름한 그 느낌이 그녀를 괴롭게 하기 직전 물잔이 입술에 닿았다. 곧 이안도 가루약을 다 털어 먹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쓴 걸 계속 먹은 거야?”

남 말할 처지가 아니면서, 그녀가 그를 나무랐다. 그러자, 이안이 어리광을 부리듯 지젤에게서 물잔을 빼앗고 그 품으로 파고들었다.

“잠을 못 자는데, 잠들면 계속 네 꿈을 꿔서.”

지젤은 이안이 동정심을 사기 위해 눈꺼풀을 반쯤 내리까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속상한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건 큰 문제야. 같이 있으면 둘 다 머리 꽃밭인 바보가 되어버리잖아. 둘은 그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내 이안이 규칙적인 호흡을 내뱉으며 잠에 들자, 지젤은 이럴 줄 알았다며 주억거렸다.

“몽유병은 없고 약에 대한 내성은 있어.”

독초를 먹은 지 3년쯤 되었거든. 그래서 아파도 잘 낫지를 않아. 지젤이 잠든 이안의 이마에 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줬다. 한 올 한 올, 검은색이 얼마나 선명한지 괜히 만지작거리고 싶어졌다. 이안의 눈동자도 그랬다. 그녀는 티 없이 맑은 검은 눈이 꼭 밤하늘 같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감상이지.”

아쉽게 그를 옆으로 밀어낸 그녀는 조용히 침실을 떠났다.

***

지젤은 후작저로 돌아가는 마차로 향하는 길에 엘레노어를 마주쳤다. 누가 봐도 지젤을 기다리고 있었던 황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혀를 찼다.

“찝찝해하는 표정 보니 제대로 끝낸 것 같지도 않아.”

그게 어려운 일이야? 멍청하긴 해도 사리 분별 못 하는 놈은 아닌데. 후작 부인 앞에서는 열 살짜리 꼬맹이처럼 굴었고, 열 살짜리 어린애 어르고 달래는 건 간단했다. 엘레노어가 자신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하고 그대로 지나치는 지젤을 향해 불만을 내보였다.

“우린 또 보게 될 것 같네, 아주 귀찮게.”

“힘으로 끌어서라도 데리고 가세요.”

지젤이 엘레노어를 돌아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붉은 입술을 열었다. 두 번은 그렇게 거짓말로 못 밀어내겠어요. 당장을 모면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거짓말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이미 비싼 값을 치르고 배웠다.

“기다릴 테니 다녀오라는 그런 거짓말 못 해요. 이제 더는 황태자 저하와 엮이지 않을 테니, 억지로라도 데리고 가서 정신 차리게 하세요.”

“그게 안 되니까, 내가 그런 부탁을 했겠지? 어차피 즉위식 치르고 결혼식 하고 나면 올해는 금방 지나가. 그럼 소꿉놀이하던 여자는 금세 잊을 테니 그 시간만 벌어달라고.”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기다린다는 거짓말 못 해요.”

엘레노어가 깊게 한숨을 쉬며 기죽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지젤을 바라봤다. 부부는 닮는다고 후작처럼 무던하다 생각했는데, 그녀는 초연해 보였다. 어쩌면 그건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머금은 그녀의 파란 눈 때문일 수도 있었다.

“좋아, 거짓말 못 하겠다는 네 양심 때문에 다 같이 곤란해져 보자고.”

“어떤 걸로 협박하셔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황녀님께서 조사하실 게 있으시다면 마땅하게 하심이 옳겠죠.”

그게 마녀사냥일지라도 하시고 싶다면 하셔야겠죠. 지젤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그대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걸 가만히 보던 엘레노어가 기둥 뒤에 숨죽이고 있던 제인을 보며 말했다.

“부부가 정말 나랑 안 맞아.”

“어찌할까요? 일단, 후작가에 저희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일단 분위기나 좀 보라고 해.”

“이안 님은 어찌할까요?”

제인의 말에 엘레노어는 잠들어있는 멍청이가 언제쯤 깰까 가늠하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일어나면 또 한바탕할 게 뻔했다. 벌써부터 고민을 사서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는 멀어진 지젤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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