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64)화 (64/135)

64.

찰나 떨어졌던 둘의 입술 사이 간격이 다시 좁아졌다. 지젤이 그런 그의 뒷머리를 콱 움켜쥐며 경고했다. 그녀의 손에 머리채가 잡혀 아릿하게 통증이 일었는데도, 이안은 몸을 물리거나 그 손을 내치지 않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대로 황궁으로 돌아가.”

지젤이 한숨처럼 작게 그러나 힘 있고도 단호하게 하는 말에 이안은 숨을 가다듬었다.

“괜찮아, 어떤 상황에서도 난 네 미하엘이니까.”

네가 어떻게 변했든. 지젤은 이안이 하는 말에 반사적으로 자신의 손에 끼인 반지를 내려다봤다.

“설령 네가 후작 부인이 아닌, 황후일지라도.”

그 시선을 읽은 이안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난 네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지젤의 뒷목을 감싸 잡고 당겼다. 둘 다 이게 최악의 방식이라는 걸 너무 잘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안은 그녀의 입술 사이로 무자비하게 파고들며 미간을 찡그렸다.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으로 괴로운데, 그걸 해소하지 못하는 건 비참했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그 갈증에 괴로워해야 했다.

물컹한 살덩이가 그녀의 입 안을 침범하고, 헤집었다. 예민한 점막을 스치는 열기에 지젤이 어깨를 움츠리자, 이안은 그녀를 안아 들었다. 타의로 땅에서 발이 떨어지자 반사적으로 지젤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밀어내고 싶지가 않았다.

어느 순간 침대에 내던져진 지젤은 이안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걸 보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이안이 그런 지젤을 보며 붉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잠깐 숨을 고르던 그는 난데없이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시트를 움켜쥔 지젤의 손에 그걸 쥐여줬다. 손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이질적이었다.

“칼?”

갑자기 왜? 지젤이 납득할 수가 없어서 눈살을 찌푸리자 이안이 그녀의 위로 올라타며 말했다.

“그만둘 자신 없으니까, 멈추고 싶으면 찔러.”

탁한 목소리가 하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지젤은 울상 지었다. 널 찌르라고? 그게 가능이나 한 소리인가.

“너야말로 영악해.”

지젤의 손에 쥐어진 칼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보며, 이안은 그녀의 어깨에 이를 박아 세웠다. 피부에 박혀 들어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안은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가는 것보다 칼로 찔러 피를 보는 게 덜 아프다고 이야기하려다가 그만뒀다. 그가 그렇게 원망하지 않아도 그녀는 괴로워 보였다.

드레스가 벗겨지고 이안이 그녀의 위에 타고 올라오자, 지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모든 게 수치스러워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지젤의 피부를 스치는 이안의 숨결이 너무 뜨거웠다.

“농담 아니니, 정말 찔러.”

하다못해, 찌르는 시늉이라도 해. 이안이 볼록 튀어나온 그녀의 쇄골에 입 맞추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녀를 올려다보느라 살짝 주름진 이마를 보며 지젤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정말로 이안과 함께 있으면 현실감각이 무뎌졌다. 그녀를 따라 옷을 벗어낸 이안의 얼굴에서 엿보이는 탐욕과 갈망이 그녀가 내린 상식적인 결론을 좀먹었다.

“넌 결국 나한테 실망할 거야. 우린 서로에게 최악으로 남을 거야.”

‘우린 이러면 안 돼.’와 같은 식상한 거부조차도 내뱉지 못하는 스스로가 간사해서 지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뭘로 해석했는지 이안이 그녀의 입술을 다시 삼켜버렸다. 그의 혀가 입 안 속 뜨거운 살을 유린했다.

이안은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입맞춤을 멈추지 않았다. 그게 계속 미운 말만 하는 그녀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건지, 여태 참아왔던 감정을 터트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미리 경고했던 것처럼 본인이 참고 있었던 걸 증명하듯 거칠었다. 마치 그녀의 안에 자신을 새겨 넣기라도 할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지젤.”

그는 겨우 가쁘게 숨 쉴 수 있을 만큼의 찰나만 허용했다. 그마저도, 그녀가 내뱉는 억눌린 숨결을 독점하지 못해 아쉬운 듯 그녀의 목을 입에 물고 잘근거렸다. 빈틈없이 밀착된 단단한 피부가 그녀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목 안쪽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참기가 힘들었다.

“사랑해.”

지젤은 그의 격정적인 움직임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사실은 이안의 사랑 고백에 환희를 느끼는 자신을 떨쳐내기 위함이었다. 내가 이렇게 끔찍한 인간인 걸 네가 알면. 이 상황 속에서도 머리 한편으로는 널 어떻게 황국으로 돌려보낼까 생각 중인 걸 알아도 네가 그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제발.”

밑에서 흐트러진 지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핥아낸 이안이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함부로 두고 가지 마.”

네가 날 버려두면, 나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어. 그건 온전하게 네 탓이야. 이안은 잘게 떠는 지젤의 어깨를 보며 겁먹은 그녀를 달래기라도 하듯 뺨에 연신 입 맞췄다. 그러면서도 여태까지의 감정을 쏟아내기라도 하듯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넌 날 책임져야 해.”

그가 말도 안 되는 책임을 전가했다. 지젤은 묵직하게 눌러오는 그의 체중과 속삭임에 숨이 막힌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던 그녀는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뿌리부터 뒤흔드는 이안 그 자체가 여실하게 느껴졌다. 이안이 정말로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게 생소했다. 물론, 입에서 튀어나오는 본인의 신음 또한 생소했다.

“응? 잡고 놓지 마.”

닿고 있어도 부족하고, 부족해서. 그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허기가 이끄는 대로 그녀를 탐했다. 뒤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갈 곳 잃은 지젤의 손이 그의 넓은 어깨를 끌어당겼다. 별거 아닌 그 손길에 벅차올라서 그는 몸을 숙여 지젤을 더 품에 안았다. 지젤의 가느다란 흰 팔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에게 매달리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해.”

계속된 사랑 고백에 지젤은 저도 모르게 그의 커다란 등에 손톱을 세웠다. 이안은 살에 박히는 날카로움에 미간을 살짝 구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가 그녀를 훨씬 더 아프게 하고 있으므로 그 정도는 괜찮았다. 오히려 그녀가 그에게 상흔을 남겨주는 게 짜릿하기까지 했다.

“내 지젤.”

그가 탁한 음성으로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을 들은 지젤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지젤은 그녀 안의 이성과 욕망이 충돌해 그대로 조각나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지젤은 충만함을 느꼈다.

***

엘레노어는 다이한 후작을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어느 연회에서였던 것 같은데, 첫인상은 돌 같은 사내라는 느낌이 강했다. 옆에서 누가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말을 해도 큰 반응이 없었다. 그게 인상 깊었고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개인적으로 편안한 스타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스물아홉 살, 동갑이라고 했었나.

“제 아내 어디 있습니까.”

다이한이 허리춤에 있는 검을 꽉 쥔 채로, 후작가의 기사들까지 여럿 데리고 온 걸 보며 그녀는 입을 샐쭉거렸다. 이처럼 대놓고 적의를 드러낼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이것도 매력이 있었다.

“앉아서 차분하게 얘기하지?”

이 지긋지긋한 삼각관계. 그렇게 예쁘지도 않더만. 그녀는 아까 지젤을 맞이했던 그 응접실에 앉아서 샴페인을 홀짝였다. 그러고는 정색을 하고 오른 눈썹을 까딱였다.

“황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이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은데.”

“무슨 짓을 하시려는지 모르겠지만, 내 아내는 왕궁의 일과 관련된 바가 없습니다.”

엘레노어의 뒤에 서있던 제인은 다이한이 잇새로 말을 내뱉는 걸 보며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턱 근육이 움찔거릴 정도로 이를 악물고 있는 덩치가 커다란 후작은 가뜩이나 체격이 작은 황녀 앞이라 더 거대해 보였다.

“내가 친우의 의식 불명에 마음이 쓸쓸해서 좀 데리고 있으려고. 그건 그렇고, 후작께서는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내의 외출에 이리 집착하나?”

“데려가겠습니다.”

엘레노어가 친히 바로 앞의 의자를 손짓하며 앉기를 권했으나, 다이한은 고집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샴페인 잔을 들고 어깨를 으쓱였다.

“후작 부인에 대한 과보호가 심하네.”

그녀는 금발의 미남이 연녹색 눈을 가진 게 꽤 마음에 들어서, 그의 불손한 행동에 크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잘생겼고, 체격도 좋고. 그러나, 아쉽게도 이 진탕에 끼어들 정도로 매력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렇게 숨 막히게 굴면, 정말 도망갈지도 몰라.”

그녀가 그의 약점을 콕 짚어내듯 말을 이었다.

“사실, 그건 나도 좀 곤란한 일이니까 오늘만 참아.”

“황녀께서 제 아내를 납치한 걸 참으란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우린 떠날 사람들이니 너그럽게 받아들여. 납치라니, 누가 들을까 무섭군.”

“엘레노어 님.”

다이한이 어이없다는 듯 한 발 내디디며 엘레노어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짐과 동시에 다이한이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남매분께서 이 작은 왕국에 관심이 이리 많으신 걸 알면, 폐하께서 과연 좋아하실까 궁금하군요.”

“후작께서 그리 전하실 생각이라면.”

엘레노어는 다이한의 협박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물론, 속이야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런 티를 내는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황제의 옆에 간신배처럼 붙어 황위를 탐내는 공작이 알기 전에 이안을 데리고 떠나는 거였다.

“나도 이곳에 온 명분이 필요하니, 충성스러운 왕궁 기사단을 활용해 마가렛 왕비가 왜 쓰러졌는지 상세하게 살펴야 옳지. 그리해서 죄인을 사형대에 세워야겠는데.”

다이한이 동요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지만, 그의 주먹이 꿈틀거리는 걸 보며 뒤에 선 제인은 숨을 멈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노어는 태연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하루만 서로 한 발씩 물러나 참는 걸로 하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정말 적적해서 데리고 있고 싶다니까.”

다이한은 눈까지 찡긋거리며 이쪽을 비웃는 엘레노어를 보며 분노를 삭이기 위해 애써야 했다. 순간, 황태자가 말했던 무력감과 비참함에 휩싸여 잠 못 드는 밤이 떠올랐다.

그때 이미 그 밤을 알고 있다 자만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게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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