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너랑 있으면 애가 되는 것 같아.”
지젤이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녀는 슬슬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이안의 양 눈을 꾹 차가운 물수건으로 눌러줬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굴게 되고, 유치한 말만 해. 다 큰 어른이 이렇게 울기나 하고.
“난 너랑 있어야 살아 숨 쉬는 것 같아.”
지젤을 제 무릎 위에 앉혀놓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이안이 코를 훌쩍였다.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열감이 오른 눈을 꾹꾹 눌러주는 그녀의 손길이 좋았다. 지젤은 이안의 말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물수건을 떼어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평소에는 숨을 안 쉬어?”
“몰라.”
정확하게 표현할 말을 못 찾겠어. 이안의 솔직한 대답에 지젤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기울였다. 통유리창 밖으로 해가 지는 게 보였다. 이제 가야 하는데, 그러면 또 울겠지? 어쩌지. 지젤은 황녀의 말처럼 이안과 어울려 놀아줄 수가 없었다.
“이안, 있잖아.”
“싫어.”
이안은 지젤이 자신의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는 게 듣기 싫었다. 그는 지젤의 오른손을 잡아 쥐고는 그 약지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버렸다. 그러고는 반지가 사라진 그녀의 약지를 콱 잇자국이 남도록 깨물었다.
“아파.”
“아파해.”
뭐? 지젤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의아해하자, 이안이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나 때문에 아파하는 건 괜찮아.”
그건 내가 사랑으로 다시 보듬어 줄 수 있으니 괜찮아. 네게 그렇게라도 내가 남는다면, 괜찮아. 이안의 입술이 손등에서 눈가로 옮겨왔다.
“어차피 넌 날 못 미워하니까.”
“황태자 저하, 난 그때의 네 지젤이 아니야.”
널 미워할 수 있어. 널 의심하고, 생각하고 판단해서 멀리할 수 있다고. 문득, 지젤은 가까이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그의 검은 눈이 무서웠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지젤의 푸른 눈이 겹쳐 이안의 눈 색깔이 기묘해 보였다. 지젤은 이제 그의 손이 다이한만큼이나 크다는 것도 실감할 수 있었다. 근육이 다부진 어깨와 팔뚝, 뜨거운 체온에 여기 더 머물고 싶었으나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난 그때의 그 어린애가 아니야. 넌 실망할 거야. 난 네 흠이자 과오가 될 테고.”
그러니,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 때 정리해줘야 했다. 지젤은 마음 아프지만, 그가 자신 때문에 곤란하거나 더럽혀지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나야말로 어린애가 아닌데.”
이안은 얄미운 말만 하는 그녀의 눈가에 계속 입 맞췄다. 그러면서도 손은 그녀의 귀에 반짝이고 있는 귀걸이를 능숙하게 빼내기 시작했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그녀의 귓바퀴부터 귓불을 지그시 문질렀다.
“읏-.”
민감한 부위를 매만지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지젤이 놀라서 몸을 비틀었다. 그녀가 그만하라 소리를 하기도 전에 이미 귀걸이는 그녀의 귀를 떠나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손에 쥐어지게 된 진주 귀걸이 한 쌍은 이내 투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내 앞에서 다른 사람이 준 귀걸이 하지 마.”
필요하면, 광산째로 네 손에 쥐여줄 테니까. 참아왔던 독점욕과 질투가 흘러넘치는 말에 지젤이 고개를 저었다.
“유치해라.”
“다른 사람이 준 목걸이도 하지 마.”
그가 지젤의 목에 매여있는 진주 목걸이를 물고 잡아당기며 으르렁거렸다. 진짜 유치했는데, 그걸 보자 명치가 묵직하게 아파왔다. 넌 왜 여전히 날 좋아해?
“나 가야 해.”
“미안한데 넌 나랑 있을 거야. 아무 데도 못 가.”
내 지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서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그녀의 왼쪽 귀를 입에 물고 잘근거렸다.
“그 어떤 핑계도 못 받아들여, 싫어.”
손목부터 팔꿈치, 어깨까지 타고 올라오는 손길이 피부가 아닌 심장을 간질였다.
“그러면 뭐 어떻게 하자고.”
냉정하게 말한 지젤은 자연스레 그녀의 등으로 향하는 이안의 손을 찰싹 때렸다. 드레스를 고정시킨 리본 쪽으로 가는 손의 목적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안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가 짐짓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해도 괜찮아.”
“어떤 걸? 후작과의 결혼 생활?”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들어서 지젤이 이안에게서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뜻한 품이 아쉬웠지만, 이제 두 번 다시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체온이었다. 지젤은 싫어도 후작 부인이었다. 그리고 해야 할 복수가 남아있었다. 이안의 눈물에 약해져서 매정하게 못 떠났지만, 사실 그것도 이기적인 짓이었다.
“네가 달리아 백작이랑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하지 마.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다이한 후작은 내가 너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어디까지 아는 건지. 지젤은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미간을 구겼다. 이안이 살아있다고 해서 후작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지난 5년간의 고통과 가족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만나서 반갑고, 다행스럽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거짓말이겠지.”
지젤이 바닥에 던져져 있던 반지와 귀걸이를 허리 숙여 주웠다. 절로 이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녀가 약지에 다시 반지를 끼며 쓰게 웃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면 너도 혐오스러워할걸? 후작을 죽이고 싶어서 독을 먹는 것도 두렵지가 않아. 그러다 죽어도 아쉽지가 않거든.
“난 남들 보기에는 구질구질하게 그때에 목매고 있는, 네 지나간 과거야.”
지젤은 재차 강조했다. 난 그때의 지젤이 아니야. 넌 분명 실망할 거야. 그리고 솔직하게 그걸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 저하께서는 현실을 충실히 살아.”
그녀가 다시금 현 상황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 한 손에 계속 쥐고 있던 물수건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안은 그걸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보다가 오른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너 내가 했던 말들 귀담아 안 듣지.”
무슨 말? 지젤이 일부러 허리와 어깨를 곧게 펴고 그런 이안을 내려다봤다. 이안이 그런 지젤을 보며 속으로 욕을 짓씹어냈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고민을 너무 많이 해.”
“네가 생각이 없는 거야. 너 대체 황궁에서-”
황태자가 뭘 하느라 정치적 입지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따지려던 지젤은 그만뒀다. 그녀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안이 정말로 누나인 엘레노어에게 모든 걸 넘기고 떠날 생각으로 일부러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안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그런 지젤의 붉은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정말 새삼스럽게 올려다보려면 목이 뻐근할 정도로 그의 키가 크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야, 우리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말자.”
“겁이 많은 너는 아무도 없을 때만, 나를 온전히 봐.”
지젤은 그게 얼마 전 후작저에 찾아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이라는 걸 눈치챘다.
“무슨 뜻이야?”
“내가 황태자인 걸 밝혔으면, 넌 그다음 날부터 산에 오지 않았겠지. 아니야?”
넌 도망쳤을 거야. 이안이 표정 없는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게 어쩐지 섬뜩해져서 지젤은 숨을 멈췄다.
“그러니 나는 네가 나한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수밖에.”
더 이상 참을 필요도 없이, 후작을 죽이고 왕비를 죽이고 지젤을 황궁에 데려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 간단한 걸 함부로 하지 못하고 쩔쩔맨 자신이 우스웠다.
“깊게 고민하지 말고 간단하게 생각해. 후작이 죽는 게, 내가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예전에, 아주 예전에 결혼식 날 이안이 과부 운운하며 그녀를 협박했던 게 떠올랐다. 지젤은 그때보다 더 짙어지고 깊어진 그의 분노를 엿볼 수 있었다.
“내가 다 해결하고 와서, 네가 내 얘기를 귀담아들을 수 있을 때 다시 차분히 대화하자.”
아까와는 다르게 이안이 지젤을 떠나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 다정하게 속삭인 그의 탁한 검은 눈이 예쁘게 휘는 걸 보면서 지젤은 손을 파르르 떨었다. 지젤이 그보다 먼저 나가려 했으나, 이안이 그녀를 방 안쪽으로 다시 잡아당겼다. 그녀는 그를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가 계속 미소 짓는 게 두려웠다.
“너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날 나가게 해줘.”
“넌 여기 있어.”
이안은 지젤의 말을 가볍게 넘기고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 맞추며 소곤거렸다. 인내심이 고갈된 지 오래였다. 그래, 쉽게 가는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빙빙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격앙된 감정이 계속해서 그를 충동질했다.
“이안.”
지젤은 이안이 멈출 생각이 없는 걸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아무것도 하지 마. 나만 보내줘.”
“네 일이, 내 일이니 의미가 없는 말이네.”
이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그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지젤이 해야 할 일이었다. 황태자가 갑자기 광병이라도 도진 듯 후작과 왕비에게 무슨 짓을 하면-. 그거야말로 나 때문에 네가 얼룩지는 거잖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뭐든 하지 마. 내 일을 망치지 마.”
그는 그녀의 만류에도 멈추지 않았고, 그걸 본 지젤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멀어지는 이안의 뺨을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이안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자신의 입술에 입술 도장을 꾹 찍는 지젤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들끓는 감정이 향하는 방향을 확실하게 틀어버린 방법이었다.
지젤은 어딘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이안을 보며 쓰게 웃었다.
“비웃어?”
그녀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비트며 이를 악물었다.
“너 영악해.”
“알아.”
“알아? 네가 지금 어떤 도발을 하는 건지 안다고?”
정말? 그는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이쪽의 욕망을 내보였다.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에 일렁이는 열기가 뜨거웠다.
“우리 지젤 양이 내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모르나 본데.”
이안이 이죽거리며 고개를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