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지젤은 엘레노어의 헛수작에 걸려들지 않았다. 황녀는 단순히 이쪽의 기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에 황녀가 조지 콜튼의 말을 믿고, 이쪽을 의심했더라면 바로 움직였을 테니까.
“저는 황녀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지젤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는 말에, 엘레노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반응이 저러니, 협박도 안 되고 재미가 없네.
“그래, 좋아.”
엘레노어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막 들쑤시고 다니고 싶지는 않아, 알다시피 다이한 후작을 우리 황제께서 꽤나 예뻐하시거든.”
말을 마친 황녀는 샴페인 한 잔을 다 비우고 지젤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 말을 잘 들으면, 나는 마가렛이 이대로 죽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지젤은 엘레노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독특한 협박인데, 황녀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
“왕비님께서 죽-.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어요. 제가 그날 뭔가 잘못한 건가요?”
정말 병문안을 갔던 게 다인데. 지젤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하는 말에 엘레노어는 권태로운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네?”
“하루 이틀 시간 벌어줄 테니, 우리 멍청이 좀 적당히 달래.”
“멍청이-요?”
지젤은 알고 보니 황녀가 취한 상태인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소리야?
“결혼하고, 즉위식 무사히 치르고 돌아와라.”
엘레노어의 부연 설명에 지젤의 어깨가 굳어 들었다. 지젤은 그제야 그녀가 자신을 부른 게 왕비 때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하면, 나도 이혼하고 따라가겠다. 이런 사탕발림 소리 있잖아.”
“엘레노어 님.”
“그런 같잖은 거짓말 좀 해달라고. 내 친히 부탁하는 거야.”
엘레노어는 아까와는 다르게 딱딱하게 굳은 지젤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실제로 그리해서 이혼하고, 황궁에 첩실로 들어와 살고 싶으면 도와주지.”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지젤은 첩실이라는 말에 이를 악물고 엘레노어를 노려봤다. 이게 실수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숨길 수가 없었다. 엘레노어는 그런 지젤을 보며, 입을 샐쭉거렸다. 이것 봐라.
“저는 황태자 저하와 그 무엇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안은 황제 폐하의 눈 밖에 완전히 났던 아들이야.”
그걸 겨우겨우 욕심 많은 작은아버지 밀어내고, 다시 끌어올린 게 엘레노어였다.
“왜냐하면, 정치는커녕 학문에 관심도 없이 검술과 무예만 하다가 성인이 되기 전에 제 파벌 만들기에 실패했거든. 그리고, 성인이 돼서는 대뜸 후작의 결혼식을 취소해달라.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다가 1년 넘게 구금되어 있었어.”
엘레노어의 기나긴 설명에 지젤의 어깨가 굳어 들었다. 몰랐던 이야기에 지젤이 눈만 깜빡이는 걸 보면서 엘레노어는 말을 이어갔다.
“지난 5년 동안 정신 나간 멍청이 뒤 닦느라 기운을 다 써서, 이제 더는 못 해.”
정말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새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외골수 무지한 놈. 다른 데서는 여우같이 굴고, 제 성질 다 부리면서 이 여자 앞에서는 쩔쩔매고 다치기만 할까.
“그러니 그 원인인 네가 이런 가벼운 협박에 못 이기는 척, 움직이는 것 정도는 양심상 해줘.”
엘레노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지젤은 별말을 하지 못했다. 지젤은 이안이 1년 동안 갇혀 지냈다는 걸 몰랐다. 모를 수밖에 없었지만-. 이안도 지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니까. 근데, 넌 대체 왜 그런 거야? 난 이미 결혼했고, 넌 네가 해야 할 일들이 있었잖아. 근데-.
“같잖은 사랑 놀음 하라는 게 아니니.”
엘레노어가 마지막으로 지젤에게 일러주고는 응접실을 나섰다. 그걸 보지도 않은 지젤은 고요하게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너무 멀리 와서 돌아갈 수 없음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
이안은 엘레노어가 지젤을 찾아갔다는 말에 피가 식었다. 왜? 무슨 얘기로 겁을 주려고, 뭐든 그걸 들은 지젤이 날 더 밀어내면. 그가 조급함을 숨기지 못하고 침실에서 맨발로 일어서는데 제인이 그런 이안을 붙잡았다.
“여기 계시면 지젤 님이 오실 겁니다.”
“뭐?”
제인도 엘레노어가 정확하게 무슨 생각인지 몰랐기에,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채 자신을 노려보는 이안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안은 그렇게 제인이 나가고 약 기운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욕을 짓씹었다. 몸만 안 아팠어도, 제대로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건데.
-똑똑.
그가 자신을 원망하는 사이 누군가 단조롭게 노크했다. 이안은 숨을 들이마시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문이 천천히 열리며 지젤이 들어섰다. 저번에 만났을 때처럼 차분해 보이는 그녀를 보면서 이안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거짓말쟁이.”
그의 입에서 가장 먼저 원망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울컥 지젤도 그에게 다가서며 쏘아붙였다.
“그러는 너는?”
“뭐?”
“너도 나 속였잖아. 황태자?”
“그건-”
지젤은 이안이 변명할 틈을 주지 않고 화를 쏟아냈다.
“넌 처음부터 나 속였어. 알아? 뭐 평민의 아들? 그걸 속이고 나랑 결혼을 해?”
“그건, 처음에는 단순히 네가 겁먹고 도망갈까 봐 그랬어.”
“아니, 넌 나한테 청혼하는 그 순간까지 거짓말했잖아. 왜? 나는 산에 두고 재미 보고, 너는 일을 핑계 삼아 황궁에 가서 삶을 즐길 생각이었어?”
“지젤!”
선을 넘는 비아냥거림에 이안이 큰소리를 치며 그녀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지금 나한테 그걸 따지는 거야?”
“거짓말쟁이라고 먼저 비난한 건 너야.”
이안은 지젤이 푸른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걸 보며 기가 막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넌 나 왜 버렸는데? 왜 날 모르는 척했어? 너 보러 다시 온 나를 보니 우스웠어?”
“날 보러 왔다고?”
“그럼!”
이안이 미쳐서 팔짝 뛸 것처럼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럼, 내가 여기 왜 꾸역꾸역 왔을까? 혹시나 네 마음이 변했을까, 이제 후작에게 조금이나마 질리지 않았을까. 지금 흔들면 흔들리지 않을까.”
용건만 전달하고 가면 되는 걸 그는 그러지 못했다. 지젤이 기억을 잃었으니 다시 날 사랑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머무르는 게 한심했다. 제인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보면 더 그랬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라도 헛된 희망이라도 손에 쥐고 멍청한 놈처럼-.
“결혼 앞두고, 그냥 옛날 생각에 재미나 보러 온 게 아니고?”
지난 5년 동안 배운 게 그런 것밖에 없어서, 그녀는 예전처럼 단순하게 이안을 반기기만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생각이 있겠지, 원하는 게 있겠지. 이안이 그런 지젤에게 질린다는 듯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너 진짜.”
지젤은 그런 그의 턱 근육이 움찔거리고, 이쪽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빠지는 걸 보며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황녀가 잘못 생각했다. 못 이기는 척 와서 대화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골이 너무 깊었고, 내가 너무 변해서-.
“난 네가 생각하는 옛날의 그 어린애가 아니야. 이렇게 얘기해봤자 네 속만 답답하고 화만 날 거야.”
갈게. 지젤이 이안의 손을 밀어내며 몸을 반쯤 돌리자,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가겠다고? 날 두고 또 간다고?
“아니야, 화 안 낼게.”
이안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그가 지젤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꼭 잡아 쥐었다.
“화낸 거 아니야.”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 아니야, 가지 마. 지젤은 모순적인 그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안 그럴 테니까 가지 마.”
“미-.”
반사적으로 그를 미하엘이라 부를 뻔한 지젤이 입을 다물었다. 얼마 전만 해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졌는데, 이젠 그 이름이 우습게 느껴졌다. 지젤이 이안의 손을 떨쳐내기 위해 그의 팔을 밀어냈다.
“이안.”
“내가 잘못한 거 맞아, 네 말이 맞아.”
절박하게, 정말 그녀가 이대로 갈까 두려운 사람처럼 지젤의 손목을 꽉 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지젤의 입에서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실, 제일 잘못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내가 먼저 널 버렸어. 넌 다시 돌아와서 나를 위해 뛰어내리기까지 했는데, 난 또 떠나라 종용했다고. 근데, 왜 네가 잘못했다고 그래.
“지젤, 내가 잘못했어. 내가 거짓말했어. 용서해, 용서하고 가지 마.”
나 정말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5년처럼 다시 버틸 자신이 없어. 그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축축하게 지젤의 장갑을 적셨다. 지젤이 홀린 듯 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줬다. 그가 그런 그녀는 보며 눈을 조금 크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의 손에 뺨을 비비며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너 너무 말랐어.”
그게 너무 속상해. 이안의 말에 지젤은 눈을 부릅떠야 했다. 잘못하면 그처럼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 지젤을 끌어당겨 안은 이안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속삭였다.
“응? 왜 이렇게 말랐어.”
“왜 울고 그래.”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방금까지 서로 소리를 질렀던 사람들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지젤이 달래듯 그의 등을 쓸어내리자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아랫입술을 콱 깨물고 있는 그녀를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깜빡거려야 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조심스레 그녀의 장갑을 벗겨냈다. 지젤은 그가 떨리는 손으로 장갑을 벗겨내는 걸 가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내, 그녀의 손목에 가득한 흉터를 보더니 다시 서럽게 숨을 헐떡였다.
“이건 또 뭐야.”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니 당장에 죽어버리고 싶었다. 네가 이렇게 힘들 동안 나는 널 미워만 했단 말이야. 무지한 나는 끝까지 함께 도망칠 생각도 안 하는 너를 매정하다 욕했었다. 그가 이를 아득 물고 못 견디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걸 보면서 지젤은 손을 들어 올렸다.
“괜찮아.”
그녀는 그에게 다정하게 거짓말을 했다. 괜찮으니까, 그만 울어. 괜찮아, 속상해하지 마. 그럴수록 이안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부드럽게 얼굴을 매만지며 위로하는 지젤의 뺨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잘못했어.”
그가 계속 자신의 잘못이라 용서를 빌었다. 지젤은 그런 그에게 연신 괜찮다고 속삭여줬다. 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