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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61)화 (61/135)

61.

잠결에 지젤은 누군가 침실에 들어오는 걸 눈치채고 머리를 굴렸다. 후작이겠지? 왕궁을 정리하는 문제로 새벽 일찍 나가, 자정이 넘어서야 들어오는 다이한을 떠올린 지젤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 툭하면 침실에 들어와 보기만 하다가 가는 걸까. 그녀는 계속해서 얼마 전 유리창으로 봤던 다이한의 표정을 떠올렸다.

“후작님.”

지젤이 눈도 안 뜨고 그를 불렀다. 다이한은 놀라지 않았다. 정면을 보고 누워있는 지젤이 자신이 들어섬과 동시에 잠에서 깼다는 걸 이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에 침대에 걸터앉았다.

“안 자?”

“자는데, 들어오시는 소리에 깼어요.”

눈을 뜬 지젤은 옅게 미소 지으며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마치 다이한의 후광처럼 보였다. 그의 금발이 환해 보이고, 그가 어깨에 걸치고 있는 검은 코트와 대조되었다.

“사과해야겠군.”

나 때문에 잠에서 깼다니. 다이한은 지젤의 이마에 흘러내린 붉은 머리칼을 정돈해주고 싶다 생각했지만 행동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왕비님은 좀 어떠세요?”

“후작 부인은 왕궁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어.”

다이한은 지젤의 갈라진 목소리를 듣고 집사에게 가서 물을 한 잔 가져오라 얘기할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이제는 얘기해주시나요?”

다이한은 그게 구금까지 거론하며 그녀의 외출을 막아선 이유에 대해 묻는 질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사실을 얘기해줬다.

“넌 잘못한 게 없어.”

“그럼 왜 벌을 주시는 거예요?”

“벌?”

그 말에 다이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벌은 내가 받고 있는데.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마실 물 좀 가져다 두라 할 테니, 더 자.”

지젤은 묘하게 균열이라도 생긴 빈틈투성이인 후작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후작이 그대로 굳어 서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무서운 꿈을 꿔서 그러는데.”

“어떤 꿈.”

“잘 모르겠어요, 근데 그냥 무서워서 그러는데.”

그녀는 차분히 말을 이으면서 후작의 표정과 몸짓을 살폈다. 네가 나한테 어떤 감정이 있다면, 네가 날 좋아하는 거라면.

“같이 주무시면 안 될까요?”

그냥, 잠만 같이요. 지젤이 변명하듯 덧붙이고는 어둠 속에서도 영롱한 푸른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살펴봤다. 다이한은 지젤의 의도가 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쪽이 흔들리는지 궁금해할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 마음을 알게 되면 지젤은 분명 다이한을 더 혐오할 터였다.

“싫으시면-.”

지젤이 죄송하다 소리를 하고 손을 빼려는데, 다이한이 빠져나가는 그녀의 손을 잡아 쥐었다.

“그래.”

다이한은 더는 말없이 그대로 코트를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 이끌리듯 지젤의 옆에 누웠다.

“잠들 때까지만.”

부부가 정말 아무런 접촉도 없이 침대에 나란히 누운 꼴이 우스웠다. 다이한이 정말 그대로 잠들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감자, 그의 연녹색 눈을 더는 볼 수 없었다. 숨결이 느껴지도록 가까웠는데, 후작과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지젤은 그런 다이한을 가만히 보다가 눈을 감았다. 이걸 어떻게 이용해야 널 더 아프게 할 수 있을까.

***

“그래서, 우리 제인 경은.”

제인은 엘레노어가 자신을 다정하게 부르는 것에 먼저 무릎을 꿇었다. 욕먹을 일이 수두룩했다. 일단, 황태자를 최대한 빨리 황국으로 귀환시키라는 제일 중요한 일도 잊고 있었다. 엘레노어는 그런 제인과 약 기운에 억지로 잠든 이안을 번갈아 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흥미로운 가십에 호기심을 충족시키느라, 황태자 말대로 곱게 여기 남아서 놀고 있었다?”

“아닙니다, 엘레노어 님. 저는 정말로 빨리, 하루빨리 가야 한다고 고했는데-. 저하께서 제 말을 듣지 않으셔서.”

하.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쉰 엘레노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바보들은 내가 없으면 꼭 딴 데 가서 놀고 있더라. 잠깐 그렇게 제인을 노려보던 엘레노어는 이안이 잠든 걸 한 번 더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우리 두 번째 멍청이 여기 왔니?”

“예? 엘 님이 여기 오셨습니까?”

제인이 되묻자 엘레노어는 한 번 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 착한 바보는 걱정돼서 가보고 싶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되지. 야반도주를 해? 물론, 가보고 싶다고 해도 안 보내줬겠지만. 아직 안 왔다니 오다가 길을 잃은 게 뻔했다.

“하나는 가출하고, 하나는 뛰어내리고.”

“저는 정말로 저하를 말렸는데, 제가 말린다고 말려지시는 분이 아닌지라-.”

엘레노어가 어디 더 변명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제인은 그냥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식적인 사과 집어치우고, 일어나서 빨리 움직여.”

“어디 가시게요?”

엘레노어의 방문은 비공식적인지라, 왕궁에도 알리지 않았다. 황국의 황녀, 황태자가 모두 이곳에 와있다는 건 사람들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좋았다. 더불어, 황국에 있는 반대파들이 두 사람 다 자리를 비운 걸 알면 어떤 모략을 펼칠지 몰랐다.

“후작 부인 데리고 와.”

그녀의 말에 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그저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황녀가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건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지젤과 엘레노어가 만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하기도 해서 후다닥 몸을 움직였다.

***

그대로 새벽까지 잠들었던 다이한은 최대한 조용히 지젤의 침대에서 내려왔다.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로 쌕쌕거리는 숨만 내뱉는 지젤은 편안해 보였다. 날 옆에 두고 이렇게 잠들기도 하는구나. 곤히 잠든 모습을 보던 다이한은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주먹을 꽉 쥐었다. 알면서도,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게 된다.

“후작님, 지금 왕궁에-”

갑자기 한센이 노크도 없이 벌컥 침실 문을 열고 튀어 들어왔다. 다이한은 그 예의 없는 행동에 조용히 하라며 곧게 편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쉿.”

그러자, 한센이 조금 목소리를 낮추고 급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황녀가 은밀하게, 왕궁에 와있다고 합니다. 급하게 후작 부인을 뵙기를 청합니다.”

“엘레노어 황녀가?”

“비공식 방문이고, 마가렛 왕비와 어릴 적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터라. 걱정차 방문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왕비님을 만난 사람이 지젤 님이라는 걸 들은 모양입니다. 당장 입궁을 요구하는데, 어찌할까요?”

다이한은 일이 골치 아프게 되었다며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단, 몸이 아프다고 미뤄. 굳이 엮여서 다시 조사단 이야기라도 나오면 복잡해지니.”

“이건 콜튼 경처럼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황국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거라면-”

이러다 황국에서 조사를 한다고 들쑤시다, 조지 콜튼이 헛소리를 해 애먼 후작 부인에게 누명이라도 씌우면 곤란했다. 한센이 걱정과 염려를 가득 담아 하는 말에 다이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해서, 지젤이 그 불필요한 고초를 겪어야 한다?”

“후작님, 그게 아니고-”

“제가 갈게요.”

둘의 말다툼이 조금 커지는데, 불쑥 지젤이 끼어들었다. 언제 잠에서 깬 건지 침대에서 일어선 지젤이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가 얼른 다녀올게요.”

이제 막 잠에서 깬 얼굴로 환하게 웃는 걸 본 다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왕궁에는 황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황태자도-. 다이한이 불안감에 주먹을 꽉 쥐고는 눈을 감았다.

***

모처럼 차려입고 저택을 나와 응접실에 들어선 지젤은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나오니까, 좀 살 것 같았다. 이따가 틈을 봐서 자작가에도 들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지젤은 황녀는 만만치 않은 사람이니, 어떤 행동도 말도 신중히 하라는 다이한의 경고를 되새겼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응접실 한가운데 느긋하게 앉아서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는 흑발의 여자를 발견한 지젤이 허를 숙이며 인사했다. 엘레노어는 눈만 움직여 지젤을 훑어봤다. 마르고, 평범한데. 독특한 건 붉은 머리카락과 우울해 보이는 얼굴 정도? 입고 있는 남색 드레스가 어두워 보이는 얼굴을 더 우울해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미리 들었던 대로 쭉쭉 갈라지는 목소리도 괴이했다.

“지저분한 인사치레 치우고, 이리 와 앉지.”

“감사합니다.”

엘레노어의 손짓에 지젤이 그 맞은편에 앉았다. 지젤은 자신에게 샴페인을 따라주는 황녀의 태도에 눈썹을 찡그렸다. 친한 친구의 병세가 악화되었는데, 샴페인? 와인도 아니고, 축하주?

“생각보다 미인은 아니네?”

“네?”

“아니, 혼잣말이니 크게 귀담아듣지 마. 내가 성격이 모나, 주위에 사람이 없다 보니 혼자 잘 꿍얼거려.”

지젤은 들으라 한 소리라 생각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적대적인 게 분명한 황녀의 태도에, 지젤은 일부러 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 네 성격 모난 거 잘 알았다. 지젤의 짧은 대답에 엘레노어가 한쪽 눈썹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그래서 더 안타깝지, 몇 안 되는 친우 중 하나인 마가렛이 저리되다니.”

지젤은 엘레노어가 배부른 고양이처럼 미소 짓는 걸 보며, 그녀가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마지막으로 무슨 대화를 했는지 물어도 되나?”

“왕비님께서 왕자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몸이 좋지 못해, 신경 쓰기 어려우니 잘 부탁한다고-.”

지젤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목이 메는지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걸 잠깐 보던 엘레노어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우리 이것도 집어치우지. 뻔한 얘기 듣자고 이 먼 길 온 거 아니니.”

“네?”

지젤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푸른 눈을 토끼처럼 뜨고 엘레노어를 바라봤다. 엘레노어는 순진한 척 구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나는 드러나지 않으면, 뭐든 괜찮다 생각하는 주의야.”

아무도 모르는데, 그게 어떻게 죄가 된단 말인가? 벌줄 사람이 없는데. 지젤은 엘레노어가 톡톡 검지로 테이블을 치는 걸 보면서, 눈을 깜빡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자네가 들키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그 가련한 연기 계속해도 좋아.”

지젤은 황녀가 하는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허나, 들키면.”

내가 왕비를 따르던 충심 넘치는 기사들로 조사단을 꾸려, 황국의 이름으로 이 수상한 병에 대해 깊게 조사를 하게 된다면.

“내 앞에서 간사하게 혀 놀린 죗값을 치러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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