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60)화 (60/135)

60.

“지젤 님, 이것 좀 드세요. 주방장이 특별히 쿠키를 구웠어요.”

“그래.”

지젤은 어딘지 신나 보이는 미아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쪽이 갇힌 걸, 너무 대놓고 좋아하네. 감당이 가능한지, 아니면 치워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다이한이 지젤의 외출을 금지했을 뿐 여느 때와 똑같았다. 지루했고, 평범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이안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안도 이제는 지긋지긋해할 게 뻔했다. 같이 뛰어내리기까지 했는데, 냉정하게 돌아섰으니 정떨어져야 맞았다.

창가에 앉아 미아가 내미는 쿠키를 아무 생각 없이 씹어 삼키던 지젤은 노크 소리에 고개를 까딱였다. 미아가 눈치껏 문을 열자 단정한 차림의 다이한이 들어왔다.

“후작님.”

미아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지젤 쪽으로 다시 다가가려 했으나, 다이한이 그녀를 내보냈다.

“나가.”

“아-.”

미아는 후작이 지젤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이한의 기분은 가라앉아있어 보였고, 후작 부인은 외출 금지 상태였으니까 나름 타당한 생각이었다. 미아가 갈등하는 걸 본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 나가있어 줄래?”

“네, 저 문 앞에 서있을게요. 필요하시면 바로 부르세요.”

미아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며 나가는 걸 본 다이한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젤도 다이한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쟤를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아내가 너무 사랑받아서 걱정이 커.”

지젤은 다이한의 그 말이 비아냥거림이라 생각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다이한은 답답한지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눈썹을 까딱였다. 장식 없는 단정한 연분홍색 드레스가 너무 타이트해서 지젤이 유난히 더 말라보였다.

“팔은.”

지젤의 바로 뒤까지 다가온 다이한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삼켰다. 무슨 팔? 그녀는 그가 오른팔에 대해 묻는 것이라는 걸 조금 늦게 알아들었다. 역시나 사과는 없었다.

“괜찮아요.”

평소처럼 무미건조한 대화였다. 다이한은 그게 당연한 일인데도 울컥 화가 났다. 황태자랑 있을 때는 이러지 않잖아. 더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런 지젤을 보고 싶었다. 제 품에서 편안해하고 자연스레 곁을 내어주길. 조잡한 질투였다.

“내일부터는.”

다이한은 말을 하다가 말고 조심스레 지젤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젤은 그 손길보다도 유리창에 비치는 후작의 표정을 보고 숨을 멈췄다.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는 음울한 얼굴이었다.

“서재에 다시 와.”

“제 얼굴 보기 싫어하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설마, 당신이 날. 지젤이 다이한의 커다란 손 위로 손을 얹었다. 그걸 본 다이한의 얼굴이 더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잠깐 숨을 고르다가 이내 지젤의 머리에 이마를 기댔다.

“내가 그럴 리가 있나.”

지젤은 어쩌면 다이한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감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

“후작 부인이 다녀간 뒤로 왕비께서 깨어나질 못하고 계시잖습니까!”

왕궁의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지 콜튼은 언성을 높였다. 아무도 그의 말에 호응하거나 반응해주지 않았다. 곤란한 듯 고개를 돌리거나, 시선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콜튼은 후작에 적대적이야 하는 친왕국파들도 자신을 외면하는 걸 납득할 수가 없었다. 후작 부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왕비가 죽은 왕처럼 가사상태에 빠진 건 이상한 일이었다. 당연히 조사가 들어가야 옳은 일이었다.

“콜튼 경은 입을 조심하는 게 좋겠네.”

다이한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무겁게 회의장에 가라앉았다.

“지금 그 말은 내 아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말처럼 들리거든.”

“그럼 아니라는 겁니까?”

“상심이 큰 나머지 지나치게 흥분하시는 것 같은데, 위험한 발언 삼가세요.”

평소라면 적당히 자리나 메꾸고 있을 바르한 자작이 드물게 콜튼 경에게 경고했다.

“멀쩡하시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시다니, 이건 이상합니다!”

달리아 백작이 단호하게 흥분한 콜튼의 말에 선을 그었다.

“병세가 똑같은 걸 보면, 왕께 옮으신 게 아니겠는가? 그게 더 타당한 것을.”

“조사를 하게 해주십쇼. 제가 직접 후작 부인을 만나봐야겠습니다.”

콜튼의 말에 다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다들 그의 연녹색 눈이 가늘어지는 걸 보며 몸을 움츠렸다. 왕비마저 쓰러진 지금 후작은 왕궁에서 가장 큰 권력가였다.

“내 아내가 조사에 응할 이유가 있나?”

“다이한 후작님!”

콜튼은 후작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방적인 면이 있었을지언정 왕비와 후작은 두터운 사이였고 공생관계였다. 쓰러진 왕비에 대한 일말의 동정이라도 있다면 조사를 시작하게 해줘야 했다. 후작 부인이 범인이 아니더라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음을 다들 인정해야 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셔야 합니다!”

“그래, 내 그동안 그 공과 사를 구분하느라.”

다이한은 아예 시작조차 못 하게 할 생각이었다. 뭔가 있다고 믿기 시작하고 파헤치면, 제대로 된 증거가 없어도 뒤집어씌우기 마련이었다. 마녀로 몰아 죽이는 것도 정말 간단했다.

“왕비께서 내 아내를 괴롭히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건만.”

“그건-.”

“하다 하다 이제는 병으로 아픈 것마저 후작 부인 탓이다?”

달리아 백작은 예상외로 과하게 지젤을 감싸고도는 후작을 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지젤이 지금 외출 금지를 당한 상태라 들어 걱정했는데, 다른 걸 들킨 건가.

“이러다 왕비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그 또한 내 아내 짓이 되겠군.”

“후작님! 그저 조사단을 꾸릴 수 있게 허가만 해주십쇼.”

“대체 어디까지 후작 부인을 괴롭힐 생각인가?”

바르한 자작이 정색을 하며 조지 콜튼 경에게 따지고 들었다.

“솔직히 다들 말은 못 하지만, 그간 유난히 후작 부인에게만 적대적인 왕궁 사람들.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네. 지젤 님만큼 왕궁에 헌신적인 귀부인이 없건만.”

“자작님께서 뭘 모르고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다 이유가-”

“어떤 이유?”

다이한이 콜튼의 말을 싹둑 잘라먹고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콜튼은 다이한이 노려보는 시선에 몸을 움찔 떨었다. 후작은 감정적으로 동요하지는 않았지만, 가늠하고 있었다. 저걸 지금 어떻게 치울까.

“대체 내 아내에게 뭘 얼마나 잘못했기에, 그렇게 무서워할까.”

조사를 하자면, 그것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후작의 말에 콜튼은 얼굴을 확 구겼다. 지젤의 친정인 남작가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는 건가. 본인도 함께했으면서 꼬리 자르기라도 하자고?

“콜튼 경, 평소에 왕비께서 후작 부인 괴롭히시던 걸로 충분하니 분란 그만 만들게.”

다이한의 말을 이은 헤넌 공작이 과격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게 미심쩍으면 의원에게 가서 뭐 때문에 발병한 건지나 확실히 하게. 다들 전염병일까 걱정이 크니. 조사단은 무슨.”

“그 무슨!”

바르한 자작이 콜튼의 말을 무시하고 다이한을 보며 물었다.

“일단, 후작님께서 임시로 정무를 맡아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콜튼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 그러면 설마. 후작의 짓인가? 왕자를 앞에 두고 꼭두각시놀음을 하고 싶었나? 콜튼이 놀란 듯 숨을 들이마시며 후작을 올려다봤다.

그의 안에 새로운 의심의 싹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그걸 본 다이한은 콜튼의 의심을 눈치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지젤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저 내버려두기로 했다.

***

저택에 갇혀있자니, 몸이 계속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왕궁 상황이 어떤지도 궁금하고 자작가도 한 번은 가야 하는데, 후작이 언제까지 외출을 금지할지 몰라 짜증스러웠다. 말뿐인 구금이 아닌지, 그녀를 찾아오는 방문객들도 한센 경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못 만나게 할 생각이 분명했다. 지젤은 자신의 구두를 닦고 있는 비앙카를 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비앙카, 양을 조금 더 늘려줘.”

그 말에 비앙카가 구두를 닦는 손을 멈추지 않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렇게 되면, 지젤 님께서도 버티기 힘드실 수 있습니다. 낮에 드시는 해독제도 한계가 있어요.”

“괜찮아.”

지젤은 어쩌면 후작이랑 둘이 같이 죽어버리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했다. 매일 아침마다 같이 나눠 먹는 차에 타는 소량의 독은, 소량을 섭취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게 쌓이고 쌓여 치사량을 넘게 되면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약이었다. 여태까지는 낮에 따로 해독제를 섭취했지만,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하자.”

그녀의 말에 비앙카는 뭐라 더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결정 내린 후작 부인은 어차피 설득하기 어려웠다.

“바르한 자작 쪽에서 투자 문제로 계속 연락해오는데 어쩔까요?”

“좀 기다리라고 해, 일 그르치지 말고.”

“아무래도.”

말을 하던 비앙카가 슬쩍 지젤에게 눈짓했다. 지젤은 그런 비앙카의 눈치에 침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세하게 소리 없이 열린 문을 보며 지젤은 눈을 감았다. 보나 마나 미아가 분명했다. 후작의 편에 완전히 서기로 해서 저렇게 말을 엿듣는 건가. 생전 저런 거 해본 적이 없어서 어색한 애가 왜 저럴까.

“아무래도 침실에만 있으시려니 피곤하시죠? 제가 차라도 한 잔 가져올게요.”

비앙카는 권태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지젤을 잠깐 바라봤다. 붉은 머리가 허리까지 타고 내려와 그녀의 마른 몸을 더 돋보이게 했다. 무심한 얼굴의 푸른 눈이 우울함을 담은 것치고는 너무 맑아서 오히려 시선을 끌었다. 그걸 보면서 비앙카는 차라리 후작과 황태자 둘 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지젤은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졌다. 의미가 없지만, 가끔 그는 그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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