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이안은 지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았다. 적어도 그때의 지젤은 자기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넌 날 끝까지 비참하게 해.”
일방적인 원망에 지젤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들을 조용히 삼켰다. 이제 이렇게 마무리 짓고, 넌 네 자리로 돌아가. 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끝낼 거야.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황국에서 다들 기다리시잖아요.”
“미안한데, 난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어.”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여기 와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고, 다시 네게 사랑받겠다는 희망을 품었던 내가 바보인 거지. 이안이 잇새로 말을 내뱉으며 지젤의 바로 앞에 섰다. 서로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상황 속에서 이안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제 더는 너한테 사랑받는 걸 바라지 않아. 과분하게 그따위 것 바라지 않으니, 나도 내 뜻대로 할 거야.”
“저하.”
“지젤 아벨린.”
손가락에 닿는 살결이 뜨거웠다. 이안은 마차에서 떨어져 단둘이 남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가 차라리 쉬웠다. 지젤은 그를 안아줬고, 보듬어줬다. 애정 있는 손길이 얼굴을 스쳤던 잔상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야만, 날 사랑해줘.”
어릴 적 우리 그 산에 있을 때처럼. 너랑 나만 존재해야, 그래야만 넌 날 봐. 그렇게 해야만 네가 날 사랑할 수 있다면.
“그러니 그렇게 만들어줄게.”
살벌한 말을 다정하게 속삭인 이안은 지젤의 표정을 살폈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지젤의 눈에 피로함이 담겨있었다. 그게 그의 이성을 끊어버렸다. 이안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려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내 아내 놓아주셔야겠는데.”
“후작님.”
다이한이 이안의 어깨를 으스러트릴 것처럼 잡아 쥐며, 반대편 손으로 검 끝을 그의 등에 눌렀다. 다이한이 살의를 숨기지 않고 이안을 위협했다.
“이 모든 원흉이 너지.”
이안이 지젤을 놓아주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걸 보면서, 지젤은 5년 전 결혼식 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이안은 맨손이었고, 다이한은 검을 들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스스로도 궁금했었다. 그때, 만약에 이안을 따라나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달라졌을까.
근데 이제 보니 그건 의미가 없었다. 지젤은 그가 다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지젤이 자조적으로 웃고는 온 힘을 다해 이안을 옆으로 밀어 넘어트렸다. 정확하게 그가 다친 갈비뼈를 양손으로 누르자, 아까부터 통증을 무시하고 있던 이안이 무너져내렸다. 그는 중심조차 잡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쳐야 했다. 온전치 못한 몸을 억지로 끌고 온 대가였다.
“너!”
“후작님, 저하께서 약에 취해 그러시는 것 같으니 못 본 척 넘어감이 옳습니다.”
지젤은 소리를 지르는 이안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젤이 다이한에게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재차 말했다.
“사고의 충격 때문에 그러시는 것 같아요. 후작님, 무서우니 검을 거둬주세요.”
이안은 그게, 5년 전 마지막으로 봤던 지젤의 뒷모습과 같아서 숨을 멈췄다. 명치에 누가 검을 넣고 돌려 쑤시는 것같이 아파왔다.
“이 거짓말쟁이 같으니.”
원망을 쏟아낸 이안이 몸을 일으키려다 휘청였다. 동시에 제인이 황태자를 향해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저하, 참으세요.”
계속 뒤에 서있던 제인은 다이한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기 때문에,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이안을 챙기며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 몸 상태라면 보나 마나 황태자가 질 게 뻔했다. 여기까지 사지 움직여 온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제인은 그녀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빼앗으려는 이안의 목을 내리쳤다.
“죄송합니다.”
이안이 윽- 소리와 함께 그대로 기절하자, 제인은 다이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조용히 물러날 테니, 검 내려놓으시죠. 이 이상의 위협은 저도 가만있지 않습니다.”
다이한은 고요하게 이안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등을 돌려 먼저 떠난 지젤을 따라갔다. 호위 기사의 경고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당장 저 황태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저 상태면 그저 손 한 번만 까딱하면 죽일 수 있는데, 그런데. 그는 예전과 다르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게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다이한은 말이 없었다. 지젤은 다이한이 황태자랑 뭘 하는 거냐고 저번처럼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너무 조용해서 긴장하고 있던 게 민망했다. 지젤은 다이한도 아는지 궁금해졌다. 미하엘이 이안이라는 걸, 당신이 죽였던 평민이 황태자라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하려나.
“두 분 다 괜찮으십니까?”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집사와 한센이 후다닥 다가와 둘의 안위를 살폈다. 황국의 황태자를 위협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젤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처연하게 다이한을 올려다봤다. 다이한의 연녹색 눈이 그녀를 담아냈다.
“오늘부로 후작 부인을 저택에 구금한다.”
“예?”
뭐? 지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다이한은 한센에게 쥐고 있던 검을 넘겨주고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지젤 다니엘의 저택 밖 출입을 불허한다.”
“절 구금하시겠다고요?”
그건 죄인에게 쓰는 단어였다. 왕비의 일이 꼬리 잡혔을 리는 없다. 설마, 그 며칠 사이에 왕궁에서 날 어떻게 버릴지 생각한 건가? 왜? 지젤은 본인이 황태자와 수상해 보일 수는 있다 생각했지만, 왕국은 간통에 대한 책임을 묻는 법이 없었다. 지젤은 다이한의 속내를 알아차리기 위해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후작님,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구금을 하십니까?”
“예, 후작님. 갑자기 마님께 무슨-.”
한센도 의문을 표하는데, 다이한이 대답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지젤이 그런 다이한을 향해 손을 뻗었다.
“후작님, 제가 대체 뭘 잘못-”
“내가!”
다이한은 지젤의 손이 자신에게 닿기 전에 등을 돌리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젤이 놀라서 그대로 굳어 드는데, 그가 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지젤의 오른 팔뚝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긴 다이한이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어디까지 참아야 해.”
내가 안 갔더라면, 빌어먹게도 넌 그 황태자랑 입 맞추고 있었겠지. 지젤이 크게 착각하는 게 있었다. 그는 지젤의 애인 따위를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지젤은 모르겠지만 지난 5년 동안 그는 그녀에게 꼬이는 온갖 날파리들을 다 태워죽였다. 근데, 하필 또 저 황태자.
“후작님께서 제게 화가 나신 것도 알겠고, 제가 잘못한 것도 알겠는데. 구금이라뇨?”
무슨 죄로요? 잡힌 팔뚝이 아파서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걸 본 다이한은 아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고는 그녀를 놓아줬다.
“내 입으로 설명해야 하나?”
그의 물음에 지젤은 아득해졌다. 뭐가 걸린 건지 짐작이 안 갔다. 자작? 왕비? 약초상? 백작? 여러 의미가 담긴 말에 지젤의 초점이 흐려졌다. 자체적인 구금이라면, 뭐든 재판에 끌고 갈 생각은 없고 후작가 안에서 해결하겠다는 뜻 같았다.
그 모든 상황을 옆에서 본 노집사는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 내 마음에 질투로 불을 지른 죄. 이런 건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화가 나셨다니 후작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번엔 지젤이 먼저 다이한을 떠났다. 다이한은 그런 지젤을 끝까지 눈으로 쫓다가 답답함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
“저하! 제발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비켜!”
제인은 눈을 뜨자마자, 멱살을 잡고 다시 후작저로 가겠다는 이안이 답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너 차인 거야, 임마!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표정이 너무 안쓰러웠다. 기사들 서너 명이 달라붙어 억지로 그를 침대에 다시 눕히는 걸 보면서 그녀는 진지하게 구속구로 묶어야 하나 고민했다. 아예 말을 듣지 않아서 대화도 안 되고, 힘은 무진장 세고. 원래 성정도 더러운데 더 더러워져서는 진짜 손 많이 가네.
“손이 저리 많이 가니.”
제인은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걸 듣고, 어깨를 굳혔다. 너무 작은 소리였지만, 익숙한 음성이었다. 로브를 쓴 사람을 막아선 기사를 보고도 제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소해 보이는 체격으로 한 손에는 연분홍색 샴페인 병을 들고 있었다.
“여긴 함부로 들어서면 안 됩니다.”
안 돼, 그거 아니야. 제인은 불쌍하고 충실한 도널드를 도와야겠다고 생각만 했다. 정말 생각만. 로브를 쓴 사람이 손을 들어 올렸다. 도널드는 로브가 흘러내리며 엿보이는 흑발을 보고 실수했다 생각해 일단 눈부터 찔끔 감았다.
-짝.
아프지는 않지만 찰진 타격감을 알 수 있는 소리였다. 로브를 완전히 벗은 엘레노어 황녀가 도널드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다시 말해 보렴, 내가 들어서지 못할 곳이 있다고?”
“죄송합니다.”
엘레노어는 꾸벅 허리를 숙이는 도널드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부터 해야지, 주인을 못 알아보면 쓰나.
“황녀님을 뵙습니다.”
제인이 냅다 허리를 숙이자 모두가 엘레노어에게 길을 열어주며 허리를 숙였다. 엘레노어는 제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그녀는 샴페인 병의 입구를 따는 대신, 대리석 테이블에 내리쳐 깨버렸다. 그러고는 침대에 억지로 잡아 눌려 버둥거리느라 자신이 온 줄도 모르는 이안을 향해 쏟아냈다.
“우리 멍청이.”
꽐꽐 소리를 내며 유리병에서 달큰한 알코올이 계속 흘렀다. 이안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액체에 잠깐 놀랐다가 이내 으르렁거렸다.
“엘레노어.”
“미리 건네는 축하주란다. 머리 좀 식혀.”
샴페인이 한 방울도 남지 않자, 그녀는 용도를 다한 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강한 힘이 아닌지라 병은 깨지지 않고 팅-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을 굴렀다.
“바보 같은 걸 보다 못해, 내가 왔으니 넌 이미 다 가진 거야.”
엘레노어가 이안을 내려다보며 특유의 오만한 웃음을 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