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다이한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요 근래 이렇게 밝게 웃은 적이 없을 정도로 환하고 청량하게 웃는 지젤을 보니, 그의 염려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후작님?”
지젤은 다이한이 흰색 셔츠만 입은, 아니 그마저도 단추가 다 풀어 헤쳐져 복근까지 다 보이는 상태인 걸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게서 비릿한 곰팡이 냄새 같은 게 나서, 지젤의 표정은 더 기묘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벌써 왕비의 소식이 들어왔나? 조지 콜튼은 수도에서 다른 짓을 하고 있는 걸 확인했고, 왕비는 다들 잠들었다 여길 테니 내일이나 되어야 소문이 퍼질 텐데.
“무슨 일 있으신가요?”
지젤의 푸른 눈이 오롯하게 그를 담아냈다. 그걸 보면서 다이한은 죄책감이라는 올가미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덤덤하게 눈을 깜빡이며 평소처럼 평온한 어조로 말하는 지젤을 보며, 그는 자신이 한 짓들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새삼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지젤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지젤은 마치 위로하듯 그녀의 등을 감싸 안는 다이한의 행동에 침을 뱉고 싶었다.
“다행이네요.”
그렇지만 그걸 참아내야 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겨우, 겨우 산 하나만 넘었을 뿐이었다. 어렴풋이 다이한의 목 언저리에 피가 굳어 메말랐다는 걸 알아챘지만, 그것 또한 말하지 않고 참아냈다. 이런 걸 보니,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지젤은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이제 겨우 한 걸음 움직였다.
***
왕비가 잠에서 깨어나질 못한다는 소식이 후작저에 도착한 건 그다음 날 오후였다. 다이한은 생각보다 크게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왕궁으로 향했다. 한동안 돌아오기 힘들 수 있다는 말을 집사에게 남기고 떠나는 후작의 마차를 보며 지젤은 고개를 기울였다.
“스텔라랑 약속을 했는데, 언제가 좋을까.”
지젤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스텔라에게서 온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뜯어보지 않았지만, 하루빨리 자작가에 들러주셨으면 하는 그런 내용일 게 뻔했다. 안부차 이쪽의 건강상태도 걱정하겠지. 사실, 지젤이 누워있는 동안 병문안을 온 사람은 꽤 많았는데 다이한이 그걸 모두 거절했다. 편히 쉴 수 있도록 하는 나름의 배려 같았다.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의 순서에 대해 생각하는데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들어선 노집사를 보며 지젤은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지젤 님, 지금 황태자 저하께서-”
“일어나셨니?”
일어났다니 다행이야. 지젤은 안도의 한숨을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입에만 머금었다. 그래, 죽지 않았으면 되었다. 가련하게 몸을 떨며 아파하는 네 모습에 숨이 막혔었는데, 이제 지나간 일이 되었다니 정말 다행이야.
“일어나신 건 맞는데, 그. 지금 여기 오셨습니다!”
그 말에 지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막무가내로 저택에 발 들이는 이안을 보며 그녀는 울상 짓듯 웃었다. 어쩌지, 미하엘. 네가 돌아온 게 맞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어.”
지젤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약지에 껴있는 결혼반지를 바라봤다. 햇살에 반짝이는 게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후원으로 모셔주세요. 금방 있다 가실 겁니다.”
집사는 침착한 지젤을 보며 빨리 후작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눈을 뜨자마자 후작저로 오려 했지만, 상처 때문에 걸을 수가 없어 불가능했었다. 그 짧은 이틀 동안 분노가 그를 잠식해 삼켜버렸다.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닌데, 날 외면하고. 그는 지젤이 그를 기만했다고 생각했다.
“감히 저하를 뵙습니다. 후작 부인께서는 후원-”
이안은 저택의 계단으로 향하다가 이쪽을 향해 다가와 고하는 노집사를 거칠게 밀치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날 기억하면, 적어도 사과는 해야지. 5년 전에 날 버리고 간 거에 대한 눈곱만큼의 미안함을 보여야지.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얼굴을 붉힐 수가 있지?
“저하.”
제인은 이안을 따라가는 걸 포기했다. 잘못했다가는 정말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거리를 좀 두고 따라가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이쪽의 눈치를 보는 사용인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비앙카와 눈이 마주친 제인은 그대로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녀를 훑었다. 후작의 저택은 참 이상하다 했던 도널드의 말이 거짓이 아닌 듯한데. 잠깐 고민하던 제인은 이안을 따라가는 데 집중했다.
이안은 거친 발걸음으로 후원에 들어섰다. 이성을 잃은 그에게 꽃이 곱게 피어난 화단이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그의 격한 감정에 꽃이 짓밟혔다. 얼마 안 가 그는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지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젤 아벨린.”
지젤은 놀라지도 않은 듯 나무에 기댄 채로 그를 바라봤다. 작은 흙무덤 3개가 나무 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실제 무덤처럼 사람이 묻혀있지는 않았다. 그저 오롯하게 그녀의 안식을 위해 만든 무덤이었다. 지젤이 직접 손으로 파서 만들었고, 다이한은 그걸 모른 척했다. 왜 무덤이 3개인지 따져 묻지도 않았다. 아마 눈 뜨자마자 가족을 잃은 걸 인지한 지젤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리라.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이네요.”
이건 지젤이 잊을 수 없는 과거였다. 이 무덤에 사로잡혀 지젤은 이안과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니 새삼, 이안이 어른이 된 게 느껴졌다.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건장해진 몸과 예전보다 많은 걸 담고 있는 검은 눈이 그걸 알 수 있게 해줬다. 제대로 격식을 차린 차림새도 아니고 겨우 흰색 셔츠 하나 걸치고 왔으니 남들이 흉을 볼 게 뻔했다.
“너.”
이안이 오른 주먹을 꽉 쥐고 지젤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그러면서도 그는 함부로 그녀에게 다가서지는 않았다.
“여기 제 아버지와 여동생이 있어요.”
지젤이 오른손을 가슴에 툭 얹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안은 그게 무덤을 설명하는 건지 그녀의 심정을 설명하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저하께만 말씀을 드리자면, 두 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모를 소년도 같이 묻었어요.”
이안의 눈이 절로 무덤 중 하나로 향했다. 지젤은 그가 말이 없는 게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가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해야 할 말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난한 자작가의 여식과는 다르게 자유로운 평민이었어요. 상인의 아들이었는데, 정말 잘생겼어요.”
지젤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미하엘이 황태자인 걸 숨긴 의도가 뭐였냐고 화내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그때가 너무 소중하고 행복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가 정말 좋아했어요.”
고백 아닌 고백을 한 지젤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졌다가,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그래서 죽었다고 들었을 때, 저는 여기에 같이 묻었답니다. 여기 두면, 흉을 보거나 의심하지 않거든요.”
가족 잃은 불쌍한 여자가 흙무덤에 가 홀로 우는 건 아무도 흉을 보지 않았다. 지젤은 무덤도 없이 길에 버려졌다는 미하엘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 아주 가끔 가족을 핑계로 여기 와 슬퍼하고는 했어요. 불쌍한 상인의 아들에 대한 죽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추모할 수가 없었거든요.”
“지젤 아벨린.”
이안은 지젤을 향해 걸어갔다. 불안이 그의 목을 죄고, 다리를 물고 늘어져서 빠르게 달려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젤은 이안이 바로 앞까지 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일어서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본 이안이 걸음을 멈췄다.
“근데, 저하.”
지젤은 이안이 살아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뻤다. 그러니, 그걸로 끝내면 되는 일이었다. 이미 너무 긴 시간이 지났고, 그녀는 여러 의미로 변했다. 그녀가 미하엘에게 가진 죄책감 중 하나는, 그가 일생에 단 한 번 지젤을 통해 했던 사랑이. 온 세상 기쁨을 다 가져다줘도 모자랄 판에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악감이었다. 근데, 살아있으니 괜찮았다. 그는 삶을 이어갈 수 있었고, 그다음 사랑도 할 수 있었다.
“사실 제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젤은 이미 여기서 썩어버린 지 오래라, 그에게 흠밖에 되지 못했다. 그녀의 오른손에 자리한 후작과의 결혼반지가 그걸 얘기해줬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런 죄책감 속에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널 망쳤다는 생각에 울고 싶지 않았다.
“제가 후작님과의 결혼을 위해서, 그 평민을 버렸습니다.”
이안은 이명이 귀를 찢는 와중에 애써 이성을 붙잡기 위해 혀를 짓씹어야 했다. 이안은 알고 있었다. 분명 머리로는 지젤이 원했던 결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저걸 지젤의 입으로 들으니 폐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 같아 숨쉬기 어려웠다.
“하.”
저절로 거친 숨을 토해낸 이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황태자인 걸 밝히지 않았으니, 못 알아봤을 수도 있었고. 그가 원했던 것처럼 지난 시간 동안, 시신 없는 무덤까지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자신을 그리워했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가끔 이렇게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걸로 죄책감을 덜어내고는 합니다. 제가 철이 없었죠.”
“어쩌지, 난 철없는 놀이 따위를 한 게 아니었는데?”
이안은 지젤의 장단에 맞춰주기를 그만뒀다. 그러나 지젤은 모른 척했다.
“저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평민 소년이 놀이를 한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녀는 미하엘이 보여줬던 모든 것들이 다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묻어두고 끝낼 것이었다.
“귀족 소녀에게는 그저 유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