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걸까요?”
벌써? 졌다고 백기 드는 거야? 그 장난기 어린 표정에 울컥했지만 참아낸 마가렛은 조나단을 눈짓했다.
“내가 뭘 해야 우리-.”
어차피 지금 후작 부인을 죽일 수도 없었다. 앞으로도 성공하리란 보장이 있을까. 저 뱀 같은 여자를? 이쪽은 당장 오늘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내 왕자만이라도. 흐려진 판단력은 그녀를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내 아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리라는.
“조나단 님, 아까 말씀하셨던 카드 가지고 와 주시겠어요? 저희 카드 게임 해요.”
“으응, 그거 내 침실에 있어서 멀리 가야 하는데.”
가는 동안 심심하잖아. 그렇지만 카드 게임도 하고 싶었던 조나단이 몸을 배배 꼬며 손끝을 깨물었다. 지젤이 그런 아이의 손을 입에서 빼내고는 손톱을 매만져줬다. 자학적인 버릇은 안 좋았다.
“부탁드릴게요.”
“다니엘 부인이 부탁하니까 가줄게.”
조나단이 후, 하는 깊은 한숨을 쉬며 그대로 방을 나갔다. 쪼르르 달려가는 조나단이 나가고, 문이 완전히 닫힌 걸 확인한 지젤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녀는 이쪽을 계속 보고 있는 마가렛이 울상 짓는 걸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날 죽이면, 네 속이 조금이나마 편해지지 않겠어?”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하게 하십니까.”
그깟 걸로 내 속이 편해질 리가 있나. 지젤이 마가렛을 비웃는데도, 그녀는 계속 물었다.
“어떻게 해줄까. 뭘 하면 될까?”
적어도 조나단에게만은 지금처럼 해주면, 그렇게만 해주면 마가렛은 뭐든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무릎 꿇으라면 꿇고, 바닥을 핥으라면 핥을 수 있었다.
“원하는 걸 말해. 내 다 할 테니.”
모든 감정이 다 연소되고 남은 곳에 피어난 모정은 그녀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속삭였다.
“그러니.”
마가렛은 덥석 지젤의 손을 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지젤은 문득, 그때 본인의 표정도 지금 저 왕비처럼 간절했나 궁금해졌다.
“나로 끝내게. 조나단은-. 왕자는 두고, 날 죽여 끝내.”
지젤은 그제야 왕비가 왜 그렇게 절박하게 굴었는지 눈치챘다.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장담하는데, 그때의 지젤이 지금의 왕비보다는 더 애원했던 것 같았다. 얼굴도 못 본 내 친모를 죽이고,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이고는 하나로 끝내라고? 빌고 비는 날 다이한과 결혼시켜 놓고-.
“왕비님께서는 절 대체 뭘로 보시는지.”
지젤은 못 말리겠다는 듯 눈을 찡긋거리며 소리 내 웃었다. 그 기괴한 장면을 보며 마가렛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지젤이 옅게 미소를 지은 채 마가렛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줬다. 정말 소름 끼치도록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어릴 적에 살려만 주시면 조용히 여길 떠나겠다고,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며 무릎에 피가 나도록 빌었었거든요.”
순진하게 그러면 해결이 될 줄 알았어요. 마가렛은 숨을 죽이고 자신의 뺨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지젤의 손을 바라봤다. 목을 조를 건가?
“차라리 그랬더라면 모두가 행복했을 텐데. 뭐, 다 지난 이야기고. 지난 일은 어쩔 수가 없죠.”
지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말을 하고는 눈썹을 까딱였다.
“난 당신 안 죽일 거야.”
“뭐?”
마가렛은 지젤이 오른 장갑을 벗는 걸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파란색 드레스와 색을 맞춘 파란 장갑 안에서 작은 유리병이 툭 튀어나왔다. 지젤이 손목 안쪽에 남은 갈색 상흔을 검지로 톡톡 치며 말했다. 무지한 그녀가 손목을 긋고 얻은 것들이었다.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전부 쉽게 해결됐을 텐데 아쉬우시겠어요.”
지젤이 손톱보다 작은 유리병을 꺼내는 걸 보면서 마가렛은 그게 독약이고 자신에게 쓰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날 죽이고 끝내.”
끝까지 명령조인 마가렛의 말에 지젤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안 죽인다니까? 누가 죽인다고 그랬어? 지젤은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마가렛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쥐었다.
“내가 왜 당신 죽음을 헐값에 사야 해?”
내 가족은 불에 타 죽었는데, 넌 지금 내 손에 독약 몇 방울로 곱게 잠들겠다고? 그건 너무 수지타산이 안 맞는 장사지. 지젤의 바다처럼 푸른 눈에 이채가 번득였다.
“네 죽음 따위는 내 아버지와 여동생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면?”
지젤은 마가렛이 불안해하는 걸 보면서 그녀의 턱을 놓아줬다. 이 정도에 겁먹는 주제에. 그녀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금박이 박힌 고급스러운 조각 양초를 집어 들었다.
“왕비궁에 납품되는 초는 후작가의 영지에서 생산하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문양이 예쁘게 박힌 초를 보존하기 위해 도료를 옅게 바르거든?”
반사적으로 마가렛의 시선이 유리병으로 향했다. 그러자 지젤이 잘했다는 듯 작게 박수까지 쳐줬다. 맞아.
“그게 이거야.”
잠깐 멍하니 생각을 하던 마가렛이 방금과는 다르게 발작이라도 하듯 소리를 질렀다.
“너-! 내 병이 네년 짓이야!”
“맞아.”
지젤은 자신의 업적을 쉽게 인정했다. 그녀는 왕비를 중독시켜서 아프게 만들었다. 1개당 보통 평민의 두 달 급여를 뛰어넘는 초를 쓰는 곳은 왕비궁 침실밖에 없었다. 매일 밤 초를 태우고 꾸준히 그걸 맡는 사람이 왕비밖에 없으니 다른 사람은 중독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건 널 죽이려고 가지고 온 게 아니야.”
지젤은 마가렛을 죽여야 하나 정말 많이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그건 그녀를 너무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뭐 하러 내가 힘들여 그 여자를 안식의 곁으로 보내준단 말인가.
“조금 다른 약초인데, 보통은 상처를 봉합하는 수술을 하기 전에 한 방울 정도 먹는 약이야. 근데, 이걸 치사량 이상 먹게 되면.”
그녀는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오른손으로 가렸다. 마가렛이 송장처럼 누워서 무력하게 그녀의 다음 말만 기다리는 게 너무 우스웠다.
“한 그루의 나무처럼 살다 죽지.”
그녀의 말에 화살이 관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경련을 일으킨 마가렛의 눈이 점점 커졌다. 지젤은 태연하게 마가렛의 턱을 잡아 억지로 입을 벌렸다. 마가렛이 바둥거리자, 지젤의 붉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가볍게 흩날렸다. 마가렛의 눈에는 그게 핏방울이 흩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많이 고민했어.”
“네년이-! 여봐라!”
“아직도 왕궁에 당신 말을 듣는 사람이 남아 있는 줄 알아?”
조지 콜튼도 없는데? 지젤은 마가렛이 손을 물려고 하자, 짧게 혀를 찼다. 한 손으로 간단하게 유리병을 꺼낸 그녀는 그걸 마가렛의 입을 향해 기울였다.
“너는 죽지 않아. 누워서 아무것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한 채로 걷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 살 거야. 네 질긴 명이 다할 때까지.”
마가렛이 삼키지 않으려고 온몸을 비틀었지만 미약한 반항이었다.
“고귀하신 왕비님 돌아가시게 둘 수 없으니, 물이며 꿀이며 네 목에 쑤셔 넣어 줄 거야. 걱정 마.”
굶겨 죽이는 취미는 없어. 지젤은 한 손으로는 턱을 잡아 고정시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녀의 코를 틀어막았다. 한 번도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왕비가 워낙 말라서 지젤의 힘으로도 제압이 가능하니 다행이었다.
“넌 거기 누워서 내가 네 아들을 어떻게 망치나 구경해. 이 나라를 어떻게 가지는지 걱정하고 원통해해.”
지젤은 인내심을 가지고, 마가렛이 숨을 쉬기 위해 헐떡이다가 어쩔 수 없이 꿀꺽 약을 삼켜내는 걸 기다렸다. 그리고, 지젤은 마가렛이 모든 걸 삼키고 절망스러워하는 걸 보면서도 조금 더 기다렸다. 그녀가 숨을 쉬지 못해서 크게 경련을 하고 나서야 손을 떼내었다.
“너-.”
마가렛은 당장 콜튼 경을 불러서 이 여자를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앞뒤 다 자르고 그저 검으로라도 찔러서-. 대체 무슨 약인지 벌써부터 눈꺼풀이 반쯤 감기고 목이 턱 막혔다.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지는 기분에 마가렛은 눈을 부릅뜨고 버티려 했으나 무의미했다.
“이 정도는 돼야 후회를 하겠지.”
지젤은 그런 왕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홀가분한가? 모르겠어. 겨우 이게 끝인가 싶은데, 그렇다고 붙잡아두고 고문해서 죽일 수는 없으니.
“카드 가지고 왔다!”
조나단이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데구루루 굴러 들어왔다. 그걸 보며 지젤은 쓰게 웃었다. 유일하게 그녀의 양심을 아프게 하는 존재였으나, 이엘리야를 생각하면 또 안타깝지가 않았다.
“쉿, 주무시는 것 같으니 저희 나가서 놀까요?”
그녀는 조나단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그것 또한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
“지젤은.”
지하실에서 나온 다이한은 피에 젖은 손을 손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내며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의 금발에 엉킨 피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하얀 피부에 튄 검붉은 피는 점박이 문양을 남겨놓았다. 누가 보면 후작이 도축장에라도 다녀온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 모습을 지젤이 보게 될까 집사가 내미는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꼼꼼하게 털어냈다. 집사는 후작이 바로 목욕을 할 거라 예상하며 하인에게 눈짓하고는 후작 부인의 행방을 고했다.
“왕자님을 뵈러 가신다면서, 왕궁에 가셨습니다.”
“뭐?”
디이한은 얼굴을 닦아내던 손을 멈췄다.
“지젤 님께서 왕궁에 가셨습니다.”
잠깐 집사의 말을 곱씹고 생각하던 그의 얼굴에 낭패가 스쳤다. 다이한이 수건을 집어 던지고 그대로 그 자리를 박차 뛰어나갔다.
“후작님?”
“말을 준비해, 바로 왕궁으로 간다.”
“갑자기 왜-”
다이한은 그 말에 대꾸해줄 정신이 없어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야 고장 난 사람이니 괜찮았다. 애초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니 할 수 있었다. 근데 지젤은-.
“후작님.”
계단을 다 내려오고 하인들이 저택의 문을 여는 동시에 지젤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