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56)화 (56/135)

56.

“그건 뭐 내가 게으르다는 소린가?”

제인이 꾹꾹 도널드의 이마를 검지로 누르며 하는 말에 그는 빠르게 부인했다.

“아닙니다, 근데 너무 적극적으로 임하셔서요.”

그런가? 도널드의 말에 제인은 눈을 작게 뜨고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재밌잖아. 아주 흥미진진해.”

그녀는 이안이 황국에서 얼마나 힘들어하고 불안정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 와서는 훨씬 잠도 잘 자고 웃기도 잘 웃으니까 미친놈이 왜 그런가 궁금한 거지. 가볍게 생각한 제인은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뜨고 있는 이안을 보며 화들짝 놀라서 고함을 질렀다.

“이안 님!”

“저하!”

도널드가 덩달아 놀라서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퍼덕이다가, 이내 빠르게 의원을 부르러 튀어 나갔다. 그사이에 제인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이안을 살폈다.

“좀 괜찮으십니까? 저 누군지 보이세요?”

이안은 초점이 나간 검은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안개 낀 시야가 단숨에 환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

분명 지젤은 그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이안이 아닌, 황태자가 아닌. 기억을 잃었다면 부를 수 없는 이름으로 그를 보듬어줬다. 그는 자신이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 들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미하엘?”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 여태 날 모른 척한 거다. 네가-. 이안이 온 힘을 다해 이를 악물자 턱 근육이 움찔거리고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거칠어진 호흡으로 갈비뼈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화를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겨우 그는 그녀의 이름을 뱉었다.

“지젤 아벨린.”

“일단, 의원이 오기 전까지 전 조용히 있겠습니다.”

제인은 황태자의 눈에 일순 광기가 희번덕이는 걸 보면서 그대로 일어섰다. 뭔지 모르겠지만, 눈 뜨자마자 분노할 일이면 보통 일은 아니겠지. 그녀는 혹시나 불똥 튈라 뒤로 물러섰다.

***

왕궁에서 홀로 공을 던지던 조나단은 침울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귀부인들은 입궁하지 않았고, 아무도 아이랑 놀아주지 않았다. 그나마 좀 친해지는가 싶었던 시녀들은 왕비의 명에 의해 바뀌니, 아이는 이제 어른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모친인 왕비에게 가서 칭얼거려도 놀 생각 말고 ‘검술에 매진하라. 공부에 집중하라.’는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양손으로 내던진 공이 팅- 소리를 내며 나무에 튕겨 나갔지만 조나단은 그걸 잡으러 가지 않았다.

“짜증 나. 나 혼자 심심한데-.”

왕궁 밖으로도 못 나가고. 조나단이 그렇게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왕자님.”

왕자는 끝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의 주인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다니엘 부인!”

“왜 여기 혼자 계세요.”

지젤은 단숨에 달려와 품에 안기는 왕자를 받아 안았다. 작고, 어렸던 조나단은 이제 제법 묵직했다. 알게 모르게 정이 들어서, 그래서 주저하기도 했다. 내가 또 나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닐까 싶어서. 조나단 네가 나처럼 홀로 남아 억울함과 원통함을 씹어먹고 자라게 될까 봐.

“몸은? 되게 큰 사고가 났다고 다들 그랬는데. 내가 호 할까?”

이리저리 지젤을 살피는 조나단을 보며 그녀는 굳은 혀를 움직였다. 너는 죄가 없으니, 내가 너에게 하는 일은 누가 봐도 부당하지.

“별거 아니었답니다. 금방 나았어요.”

“진짜? 그러면 나랑, 나랑 카드 게임 하자!”

카드 내 방에 있어, 내려줘! 지젤은 신이 나서 떠드는 조나단을 바닥에 내려주고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푸른 가을 하늘이 너무 높아서, 보기만 해도 버거웠다. 당장에 무너져 그녀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조나단은 그저 태어났을 뿐이니 죄가 없었다. 그런데, 그건 지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여동생인 이엘리야 또한 아무런 죄가 없었다.

“왕자님, 저희 게임하러 가기 전에 왕비님 뵈러 갈까요?”

“어머니를? 왜?”

한 번도 같이 보러 간 적 없잖아. 조나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을 표하자 지젤은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조나단, 네 분노는 내가 받아줄게.

지젤은 조나단의 손등에 짧게 입 맞추고는 서글프게 웃었다. 조나단이 안쓰럽기는 했지만, 마가렛과 후작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후작님, 제발-.”

다이한은 양손에 불이 붙도록 비는 청년을 보며 한센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한센은 불에 달궈 벌겋게 변한 쇠꼬챙이를 들고 왔다. 지하실 특유의 쿰쿰하고 습한 냄새가 코를 마비시켰다. 다이한은 그 냄새가 불쾌하다 느꼈다가, 요즘 자신이 안일해졌었다 반성했다. 예전엔 이런 썩은 내야 항상 함께했는데. 확실히 지난 5년 동안 지하실에 들어올 일이 거의 없었다. 초반에 지젤에 관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사용할 때 빼고는. 그는 굳이 피를 보지 않았다. 혹시나 지젤이 피 냄새를 눈치채고 더 멀어질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내가 많이 변하기는 했지.”

다이한이 한센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으나 한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후작과 기사들 앞에 놓인 마부 세 명은 공포에 떨며 고개를 숙였다.

“제발 부디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이라. 다이한은 청년이 간절하게 애원하는 걸 들으며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내가 더 간절하군.”

한센은 덤덤한 후작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어깨를 경직시켰다. 오늘 여기 있는 마부는 다 죽겠네. 무언가를 참아내듯 움찔거리는 후작의 손을 보면,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 아래 깔린 분노를 엿볼 수 있었다.

“제발 네가 한 짓이길 바라지.”

그나마 덜 억울하도록. 가죽 장갑을 낀 다이한이 한센에게서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건네받았다.

“내가 오늘 너희를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으니.”

“으-! 진짜 모릅니다! 제발! 전 평소처럼 정비했습니다! 마차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이한은 몸부림치며 바닥을 기는 청년을 버러지 보듯 내려다봤다. 그는 한 뼘 조금 넘는 이 쇳덩어리를 어떻게 쓰는 게 좋은지 잘 알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 발가락 사이사이 하나씩 박아주면 죽지도 않고 그렇게 피를 많이 흘리지도 않아 오랜 시간 대화가 가능했다.

“네놈들이 마차만 제대로 살펴봤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니 책임을 져야지.”

“후작님, 부디. 부디 용서해주십쇼! 정말로 저희가 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내가 죽을 뻔했는데, 용서가 될 리가 있나.”

그는 이번에 마차를 태운 것도 자신의 뜻이었다는 사실이 소름 끼치도록 혐오스러웠다. 지젤이 그를 미워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니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저택에서 일하면 알지 않는가? 내가 얼마나 지젤에 관한 일에 예민한지.”

“압니다, 저희가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살폈습니다! 정말로 도망간 마크 놈 혼자 한 짓입니다!”

“제발 한 번만 믿어주세요. 정말 억울합니다!”

다이한은 마크라는 남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한센 경을 바라봤다. 한센이 그 시선에 몸을 떨었다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빠른 시일 내에 찾아오겠습니다.”

“정말 저희 잘못이 아닙니다!”

가장 나이 많은 마부가 소리치는 것에 다이한은 숨을 들이마셨다.

“너희가 사고의 배후와 무슨 인연이 있든, 없든.”

다이한은 오른 눈썹을 들어 올린 채로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난 지젤을 다치게 한 걸 용서할 생각이 없어.”

그는 본보기를 남기는 걸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이렇게 지젤의 목숨이 위협받았으니 모두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젤 다니엘을 위협하는 자는 결국 후작에게 죽음을 구걸하게 된다고. 다이한은 바로 이 위 저택에서 쉬고 있을 지젤을 떠올리며 손을 움직였다. 비명과 고통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아내를 잃을 뻔한 공포를 해소했다.

***

“어머니!”

왕비의 침실에 들어선 조나단이 침대를 향해 달려갔지만, 이내 뒤로 물러섰다. 왕비가 조나단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지젤을 노려보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 눈빛에 놀란 조나단이 다시 총총 지젤에게 달려갔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왕자까지 데리고 들어오는 건지.”

콜튼 경은 뭘 하고. 지젤은 자신을 향해 경계심을 잔뜩 내보이는 왕비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왕자 손을 잡고 왕비를 보러 오니 다들 길을 내어줬다. 왕비는 확실히 당장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라있었다. 사람이 왔는데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지도 못할 정도로 힘이 없는 듯했다. 그녀의 표독스러운 얼굴에 이쪽을 향한 공포와 혐오, 분노가 드러났다.

“경비! 기사들은 대체 뭘 하는 건가!”

마가렛은 무서웠다. 이번엔 죽었어야 했는데, 죽지 않고 기어코 여기 돌아온 지젤이 두려웠다. 지젤이 잡고 있는 손이 조나단이라는 사실에 몸이 덜덜 떨려서 주체가 안 되었다. 내 왕자. 내 피를 이은 내가 낳은 아들.

“콜튼 경께서는 부재중이신지 안 계시고, 제가 혹시 잠드셨을까 고하지 말라 했습니다. 저 때문에 깨시면 안 되잖습니까.”

조지 콜튼마저 이곳에 없다는 말에 마가렛은 주먹을 꽉 쥐고 조나단을 바라봤다.

“경은 요즘 바쁘신가 봅니다. 뭐가 그리 바쁘신지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네요.”

묘한 비아냥거림에 마가렛은 날을 잔뜩 세우고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러 온 거라면-”

“매정하십니다, 왕자님 들으시는데.”

지젤이 장난스레 손으로 조나단의 양 귀를 막았다. 조나단이 그런 지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고는 키득거렸다. 그걸 본 마가렛은 입을 다물었다. 마가렛은 지금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지젤에게 행한 짓이 두려워졌다.

“뭘 원하지?”

“저야 원하는 게 뭐 있겠어요. 권력가인 후작님이 제 남편인데.”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야. 원하는 게 뭐야.”

지젤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는 마가렛을 보며 입을 샐쭉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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