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55)화 (55/135)

55.

엘레노어의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눈앞의 생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배부르게 웃는 황녀를 보며 엘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는 언제나 부자연스럽죠. 하필, 즉위를 앞둔 황태자가 사고를?”

엘은 엘레노어 황녀가 이쪽의 반응을 살피는 걸 눈치채고는 동요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황태자께서 휩쓸린 마차 사고에 배후가 있는 것으로 보고 황국 기사단이 조사 중이다.”

엘레노어는 태연하고 느긋한 어조로 말을 잇는 엘을 보고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그 정도만 해도 다들 어쩌다 사고에 휩쓸렸는지보다, 배후가 누구일지에 대해 떠들겠는데요?”

“황태자가 즉위 전 잠시 황국을 벗어난 시점에서, 정적들이 기회를 노렸다.”

엘의 답이 만족스러웠던 엘레노어가 시종장을 향해 눈짓하자 시종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 난 네가 내 동생이면 좋겠어.”

저 멍청이 말고. 엘레노어의 말에 엘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여자는 눈을 반달처럼 접어 웃었다. 그러나, 그 속내는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 밑에 둔 주먹을 꽉 쥔 채로 숨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목에 매인 붉은 루비가 금으로 된 기둥에 의해 유난히 반짝였다.

***

“자, 지젤 님. 조심히 드세요.”

지젤은 스푼도 제 손으로 못 들게 하는 미아를 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미아, 내가 왼손으로 먹을 수 있으니 그만해줄래?”

처음 하루 이틀이야 놀란 마음에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미아는 점점 정도가 심해졌다. 이렇게 끼니때마다 본인이 다 먹이려 하는 건 물론이고, 행동에 제약까지 두려 했다. 책은 손목에 무리가 가서 안 된다. 창가에 앉아 바람을 쐬는 건 감기에 걸릴지 모른다. 그러면서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핑계로 그녀를 이 방에 가둬놓고 있었다.

“지젤 님, 아직 손을 너무 많이 쓰시면 안 돼요. 그리고 계속 왼손만 쓰시다 보면-”

“미아.”

지젤은 이런저런 핑계로 계속 기어오르는 미아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먹을 수 있다잖아. 왜 그러는 거야?”

“아니에요, 지젤 님. 몸이 많이 놀랐을 텐데-”

“속이 안 좋아. 안 먹을 테니 치워줄래? 대신 책을 좀 가져다줘.”

“그것도 손목에 무리가 가세요. 앉아 계시려면 허리도 아플 테고요.”

“가져와 줘, 아무 책이나 편하게 읽을 만한 걸로.”

벌써 열흘을 이러고 있잖아. 지젤의 말에 미아는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양송이수프가 담긴 그릇을 내려다본 미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지젤 님, 그냥 한동안만이라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가만히 쉬세요. 사냥대회도 사실 나가실 필요 없었잖아요. 제가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귀담아듣지 않으셔서 다치신 거잖아요.”

실제로 미아가 그런 걱정을 했었나 싶었던 지젤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미아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저 정말 너무 걱정했어요. 지젤 님 그러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줄 알고-. 물론, 아닐 거라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요. 그러니, 제 말대로 쉬세요.”

지젤은 답답한 마음에 깊게 한숨을 쉬고는 미아의 걱정을 어느 정도 받아주기로 했다.

“그래, 손목 무리 안 할 테니까 비앙카 좀 불러줘.”

비앙카가 이 방에 들어오는 걸 계속 막고 있던 미아는 지젤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필요하신데요? 제가 해드릴게요.”

내가 말하는 걸 다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면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것 같은데. 지젤은 그 이상의 짜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슬슬 마차 사고에 대해 알아오라 시켜야 했고, 달리아 백작과도 연락해야 했다.

근데 사고 이후에 후작이 저택을 나가질 않고 있고, 이쪽은 저택 밖으로 나가질 못하니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인데, 미아마저 왜 이러는 걸까. 가뜩이나 황태자가 계속 어른거리고 걱정돼서 심란한 와중이었기에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내가 산책도 할 겸 나가서 비앙카를 부르면 되겠구나.”

지젤이 침대 밖으로 다리를 빼내고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생각보다 걸을 만해서 그녀가 그대로 방문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미아가 그런 지젤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지젤 님, 아직 산책은. 다음 주쯤부터 저택 안을 걸으시면 어떨까요?”

“미아, 왜 이러는 거야?”

드물게 지젤이 미아에게 화를 내며 그녀를 밀어내자 미아가 고개를 가로 내저었다.

“방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시면, 다치실 일이 없으시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미아가 한 말을 곱씹은 지젤은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깜빡였다.

“뭐라고?”

“여기 계시면서 저한테 시키시면 되는데. 왜 밖으로 나가려고 하시고 다른 걸 하려고 하세요? 그냥 여기 앉아서 전부 저한테 말씀만 하시면 되잖아요. 저는 다 해드리잖아요.”

지젤은 눈시울까지 붉히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미아가 조금 무서워졌다.

“밖으로 나가셔서 다치시는 거예요. 그래서 위험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지젤 님은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여기 계시면 돼요.”

“미아, 나 너한테 화를 낼 것 같아.”

미아가 하는 말들이 백치처럼, 화병에 꽂힌 꽃처럼 숨만 쉬고 살라는 소리로 들려서 지젤은 입꼬리를 어그러트렸다. 진심으로 미아에게 언성을 높일 것 같아서 그녀는 등을 돌렸다.

“나가있을 테니, 넌 여기서 생각 좀 정리해.”

그런 지젤을 본 미아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코를 훌쩍였다. 미아는 본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지젤이 저택 안에만 있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지젤은 그러지 않았다.

“제가 얼마나 무섭고, 걱정했는지 지젤 님은 모르세요. 지젤 님도 저희 언니처럼-.”

지젤은 미아가 너무 겁먹은 나머지 이상한 고집을 피운다 생각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미아.”

지젤이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꼼꼼하게 닦아줬다. 아직은 어르고 달래서라도 데리고 갈 필요가 있지.

“네가 너무 놀라서 그런 거야,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난 멀쩡하고 앞으로도 멀쩡할 거야.”

미아가 서럽게 눈물을 닦아내며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지젤은 그런 미아를 반나절이나 달래주고 나서야 산책을 핑계로 밖에 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미아를 조금 빨리 내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정원에 앉아서 노란 튤립을 보고 있는 달리아 백작의 뒤로 비앙카가 다가섰다.

“벌써 왔는가.”

후작 부인이 조금 더 쉰 다음에 움직일 줄 알았더니, 뭐가 그리 급하신가. 백작은 비앙카가 먼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건강이 최고인 것을.”

“백작님.”

“알지, 결단을 내려야지. 움직여야지- 하면서도 어디 늙은이가 그게 쉬운가. 나이 들어 엉덩이가 무거워져서는.”

“지젤 님께서는 당장 내일부터 복용량을 늘리실 계획입니다.”

비앙카의 말에 백작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던 백작이 숨을 들이마셨다.

“사실 정권이니, 명목이니 다 핑계였네.”

그는 지젤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이라 생각했다. 비앙카는 덤덤히 노인의 푸념과도 같은 말을 들어줬다.

“불쌍한 내 딸 사고로 죽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 왜 없었을까. 그저 힘이 없으니 묻고 살았지.”

“다들 그렇게 사니, 특별한 일은 아니지요.”

백작은 비앙카의 냉한 위로에 작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모두를 용서했다 믿고 살았는데. 난데없이 자신을 이용하라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이미는 지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기회가 있으면 딸을 죽음으로 내몬 왕비를 죽이고 싶었다. 후작 부인을 진짜 손녀라고 믿은 적은 없었다.

“근데 내가 얼마 전부터 잠을 못 자.”

후작 부인이 자신의 딸과 똑같이 마차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왜 잠들지 못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을 잇던 백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흉포해졌다.

“분하여서. 분해서 내가 잠을 못 자니.”

비앙카는 주름진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지는 걸 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백작은 그 이상 말이 없었고, 비앙카는 그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움직이신다 전하겠습니다.”

이제 비앙카는 곧 떠나야 했다. 애초에 끝까지는 함께하지 않는 걸로 협의된 관계였다.

***

제인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이안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열흘이 넘었는데, 지금 뭐 하세요.

“황녀님이 오실지도 모르는데, 주군께서 이러고 계시면 저 혼자 맞아야 하지 않습니까.”

너는 쏙 빠지고. 혹시 그걸 노리고 아직 안 일어나는 거 아니야? 제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눈초리로 이안을 바라봤다. 이따금씩 미간을 찡그리고 아파하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사실, 제정신 못 차리고 약이랑 물이나 좀 받아먹다가 잠드는 걸 보면 정말 아픈 게 맞았다.

“단장님, 저 뭐 하나 여쭤도 됩니까?”

“아니.”

제인은 슬쩍 말을 붙여오는 도널드를 보며 말했다. 도널드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터라 굴하거나 기죽지 않았다. 신입 때는 나만 미워한다며 눈물을 찔끔 흘리고는 했지만, 지금은 제인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저런다는 걸 알았다.

“저 다시 후작저로 갑니까?”

그의 질문에 제인은 대답 없이 도널드를 바라봤다. 가기 싫어서 말 나오는 것도 무서워해야 하지 않나. 가서 감자랑 당근 깎는다며.

“너 말이야. 되게 수상하다.”

“저요?”

“사고가 터지자마자 마부가 실종된 걸 보고해서 꽤 일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아직 그 마부는 못 찾은 상태지만. 제인이 날카롭게 그를 바라보자 이안은 찔끔 몸을 움츠렸다.

“너 거기에 뭐 있니?”

“아니, 있기는 뭐가 있습니까.”

도널드가 벅벅 목 뒤를 긁으며 한 발 물러섰다. 뭐가 있기는, 비앙카라는 사람이 좀 궁금해서 그렇지. 아니, 궁금한 게 아니고 이제 뭐 하는 인간인지 알아봐야겠다, 이런 거지. 우물쭈물하던 그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근데 단장님, 왜 이렇게 후작 부인 일에 적극적이십니까? 귀찮고 복잡한 거 싫어하시는 분이 아직까지 의원의 죽음에 관해서도 고민하시고.”

제인은 그 말에 입을 삐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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