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54)화 (54/135)

54.

전쟁이 끝나고 황국에서 작위를 받고, 생전 처음 가본 연회에서 그는 지루함을 숨기지 못했다. 한 번도 후퇴를 해본 적 없는 그의 행적을 황제가 직접 치하한 만큼 모두들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다이한은 어떤 이야기에도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다들 조금씩 흥미를 잃었다. 잘 먹지도 않는 술을 마시며, 연회장 구석에 서있던 그는 중앙 홀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익숙한 가사에 고개를 들었다.

[나 홀로 남은 자리에, 맴도는 네 숨결-. 온전한 나를 만들어내는 네 미소.]

다이한이 홀린 듯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자 쪽으로 다가서자, 공작이 그의 옆에 서서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고전 비극에 나오는 곡 중에 하나지. 뭐더라. 아, 비앙카.”

“비앙카 말입니까?”

“극 이름일세. 내용이 어-. 전쟁에 나간 연인을 기다리는 내용이지.”

다이한은 시선을 내리깔고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릴 적 납득하지 못했던 내용들을 다는 아니지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때로는 기다림이라는 이름으로- 잔인하게 나를 찢어내다가도-]

“결국에 비앙카의 연인은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나. 그럴걸세. 그럼에도, 네 사랑으로 버틴다. 그런 뜻이지.”

여자들이 눈물 찍어내며 보는 그런 내용이지. 공작이 시답지 않다며 부연 설명을 했다. 그러고는 와인을 홀짝이고는 다이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중에 기회 되면 극을 직접 보라고. 자네가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용 자체가 슬프기는 해.”

[네 잔상이, 결국 무너진 날 다시 끌어내.]

다이한은 답지 않게, 꽤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가만히 굳어 서있었다.

***

지젤은 식은땀을 흘리는 이안을 보며 이제는 정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일이 넘어가고 있는데. 일부러 안 찾는 건 아닐 테고,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머리로는 산이 워낙 크고 그 숲이 넓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품 안에서 바짝 말라가는 이안을 보자니 그녀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사람이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몰라 더 무서웠다.

“지젤.”

“응.”

이따금씩 이안은 제정신이 아닌 듯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게 그녀가 옆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이안 나름의 방법이었지만, 그걸 알 길이 없는 지젤의 걱정이 커졌다.

“얼굴 만져줘.”

지젤이 퉁퉁 부은 오른팔 대신 왼손을 들어 이안의 뺨을 매만졌다.

“네 손 시원해.”

이안이 작게 중얼거리며 옅게 미소 지었다. 네가 뜨거운 거야. 지금 대체 열이 얼마나 오른 건지. 진짜 안 되겠다. 그녀가 손을 떼어내고 상체를 일으키자, 이안의 눈썹을 찡그렸다.

“만져줘.”

“다녀올게, 기다려.”

지젤이 그런 그를 달래듯 이안의 관자놀이에 입 맞추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동굴 밖에 나가자마자 지젤은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바로 앞 조각난 마차의 파편 앞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있던 다이한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아.”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부서진 마차 앞에 굳어 서있던 다이한의 고개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옆으로 돌아갔다.

“후작님.”

지젤이 그를 부르자마자 다이한은 굳은 다리를 움직여 단숨에 그녀를 껴안았다.

“윽-.”

부러진 오른팔 때문에 지젤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튀어 나갔다. 숨이 막히도록 꽉 그녀를 덮쳐 안은 다이한을 밀어내기도 전에, 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 님!”

다이한에 의해 시야가 가려진 지젤은 볼 수가 없었다. 지젤은 설명하려 했다. 이안이 어디가 아프고, 어떻게 다쳤으며 어떤 상태라고.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것들이 빨리 안 움직여! 뛰어!”

제인이 포효하듯 소리를 지르며 동굴로 들어가자, 지젤은 입을 그대로 다물었다. 다이한이 그런 지젤을 꽉 끌어안고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가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처음 보는 후작의 모습이 낯설었다. 지젤은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떨고 있는 다이한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다이한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너무 오래 걸려서-.”

지젤은 다이한이 변명을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한 번도 변호한 적이 없었다.

입을 다문 지젤은 주변 소리로 이안이 기사들에 의해 옮겨지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래, 다행이다.

그녀는 다이한의 커다란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쓰게 웃었다. 이안과 그녀가 돌아가야 할 자리는 따로 있었다.

***

간단하게 응급조치를 받고 마차에 오른 지젤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다이한을 슬쩍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의문을 바로 해소해줬다.

“흔들리면 아플 테니, 옆에서 잡아줄게.”

저택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둘은 말이 없었다. 다만 지젤은 다이한이 자신의 손을 꽉 잡고 있는 걸 외면했다. 이안은 무사히 잘 왕궁에 가서 치료를 받겠지. 언뜻 듣기로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라고 했으니. 후작 부부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다 뛰쳐나와서는 반겼다.

“지젤 님!”

그중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미아가 제일 먼저 지젤을 향해 달려왔지만, 다이한이 그걸 제지했다.

“몸이 안 좋으니, 푹 쉴 수 있게 다들 조용히 해.”

척 봐도 예민해 보이는 다이한이 낮게 경고하자, 다들 목소리를 죽이고 지젤에게서 한 발씩 멀어졌다. 모두들 절벽에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건 기적이라고 소곤거렸다.

집사가 미리 불러놓은 의원은 삼십 대 초반 정도 돼 보였는데, 진료를 받으면서 지젤은 그 전의 의원이 진찰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어쩌다가 절벽으로 굴렀냐고, 다신 그러지 말라 혼부터 냈을 게 뻔해서 지젤은 옅게 미소 지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참-. 신께서 도우셨습니다.”

젊은 의원이 천만다행으로 왼 다리는 멀쩡하고 팔 하나만 부러졌다며 놀라워했다.

“다리는 인대가 늘어난 정도로 그쳤고, 팔도 부러진 건 아닙니다. 정말로 신기하네요.”

“신기?”

지젤의 옆에 앉아있던 다이한이 고요하게 의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예?”

“신기하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뱉는 경솔한 입을 함부로 놀리는가. 그러고도 편하게 숨 쉬는 걸 보니, 목숨을 두어 개 정도 가지고 있나 본데.”

“후작님, 전 괜찮아요.”

다이한이 그 ‘다행’이라는 단어에 꽤나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지젤의 만류로 의원은 진료를 무사히 끝냈다. 지젤은 답지 않게 크게 흥분하고 민감하게 구는 다이한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편히 쉬지도 못하셨을 테니, 후작님께서도 이제는 쉬세요.”

다이한은 그런 지젤의 옆에 조금 더 앉아있겠다고 하려다, 그가 있으면 쉬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젤은 그런 다이한이 침실을 나서며, 푹 쉬도록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는 걸 들었다. 저도 사람이라고 놀랐는지, 과민하게 구네.

“살아서 여기로 다시 돌아왔구나.”

지젤은 문이 닫히는 틈새로 이쪽을 보는 비앙카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또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

대리석과 금으로 꾸며진 황궁 서재에 앉은 엘레노어는 제인이 보낸 전갈을 읽으며 소리 내 웃었다. 정말 아주 크게 소리 내 웃는 그녀를 보며 주변에 있던 시종들은 바짝 몸을 움츠렸다. 그런 황녀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말없이 엘레노어 앞에 있던 찻주전자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엘, 어떤 멍청이가 산 중턱 절벽에서 뛰어내리는지 아니?”

엘레노어의 손에 쥐어진 종이가 구겨지는 걸 보면서, 엘이라 불린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바로 내 동생이란다.”

화를 참듯 고개를 한 번 까딱였던 엘레노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벽에 집어 던졌다.

쨍그랑-!

유리가 조각나는 맑고도 소름 끼치는 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그 빌어먹을 멍청한 새끼가 내 동생이라고.”

엘레노어는 이딴 게 어떻게 같은 배에서 튀어나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이를 악물었다. 서신을 전달한 기사가 그런 황녀를 향해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어제 새벽 저하의 신변을 확보했고, 생명에 지장이 없으시답니다.”

“왜 숨을 쉬고 있지? 죽으려고 뛰어내렸으면 죽어야지.”

즉위식을 앞두고 자살을 시도한 황태자는 뜯어 먹기 아주 좋은 소재였다. 이 중요한 시점에 이런 일을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데 머저리가 일을 만들어?

“허튼 말들이 나가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소문을 퍼트려야겠으니, 오늘 저녁에 연회를 열어.”

엘레노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시종장에게 말하자, 시종장이 얼른 말을 보탰다.

“황궁 시녀들 중심으로 먼저 말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살을 좀 덧붙여서, 황태자가 뛰어내린 게 아니고 사고에 휩쓸린 거다. 그리고 그 뒤에.”

엘레노어가 고심하며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내리쳤다. 그러고는 말없이 본인의 찻잔을 채워 다시 엘레노어에게 내미는 붉은 머리 여자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엘은 엘레노어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닌 걸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제인 경이 보낸 구겨진 서신을 반듯하게 펴서 꼼꼼히 읽었다. 본인의 억울함과 충실함을 피력하며 자잘한 하소연을 적은 그 글을 읽던 그녀는 중간에 한 부분을 검지로 짚었다.

“예상 못 한 마차 사고. 대회 시작 전 정비까지 마친 다니엘 후작가의 마차가-”

엘이라 불린 여자의 푸른 눈이 다니엘 후작이라는 것에서 멈췄다. 후작 부인을 태운 마차가 절벽으로 떨어졌다는 걸 읽은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을 뿐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보이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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