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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53)화 (53/135)

53.

다이한은 지젤을 처음 만났던 게 몇 살 때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그걸 만났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노래를 훔쳐 듣기 시작한 게 언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전쟁에 나가기 몇 년 전쯤이라 생각했다.

우연히 산에 올랐던 그는 처음 듣는 음색에 한참을 쭈그려 앉아있어야 했다. 맑은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노래의 가사는 매번 달라졌다.

[나 홀로 남은 자리에, 맴도는 네 숨결과-.]

기껏해야 두 달 조금 넘게 엿들은 노래들은 빠르게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온전한 나를 만들어내는 네 미소가.]

가끔 그는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때로는 잔인하게 나를 찢어내다가도-]

다이한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 소녀가 부르는 가사들은 상대를 원망하다가도 결국 다시 사랑을 고백하고는 했다. 아이는 묻고 싶었다. 그게 대체 뭔데?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 힘들어야 해.

[네 잔상이, 결국 무너진 날 다시 끌어내.]

그래도, 그는 노래를 부르는 소녀 앞에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앞에 서기에는 너무 가진 게 없어서 위축되었기 때문이었다.

***

“네 이름은 다이한이야.”

이름도, 재산도 없는 자작가의 사생아는 그렇게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 그의 모친은 아이를 자작에게 주고 본인의 남은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떠났다. 꼴 보기 싫은 사생아가 하루빨리 죽길 바라며 자작 부인이 죽음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여줬지만, 아쉽게도 그는 죽지 않았다.

“에휴, 또 갈 곳 없어 여기 앉아있네.”

누군가 지나가며 그를 향해 혀를 찼다. 안타까움과 짜증이 공존하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본처인 자작 부인은 다이한을 더 미워했다. 어떤 날은 그저 앉아있는 게 보기 싫다고 의자를 빼앗기도 하고, 어떤 날은 눈이 소름 끼친다고 복면을 씌워버리기도 했다.

“남자애가 예쁘장하게 생긴 게 어미 닮았으니, 삶이 고달프겠어.”

어린 다이한을 보면 다들 한마디씩 보태고는 했다. 좀 걷기 시작한 아이는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자작가 밖에서 생활했다. 어차피 안이나 밖이나 아무도 곁에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끼니도 적당히 주방에서 훔쳐 먹거나, 길에서 얻어먹어야 했다. 들어주는 이가 없다 보니, 자연스레 말수가 줄어든 조용한 사생아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얘, 너 심부름 좀 할래?”

골목에 앉아있던 다이한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남자의 차림새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중년 남자의 깔끔하고 귀티가 나는 옷과 장신구를 본 다이한은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 안에 귀한 보석 든 거 보이지?”

남자의 말처럼 고급스러운 박스 안에는 붉은 루비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옆의 작은 쪽지와 함께.

“이것 좀 저기 저 바로 앞 마차 안에 넣어주고 오겠니?”

“백작님, 조급해하지 마세요. 이따가 밤에 제가 왕궁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누군가 달리아 백작을 만류하며 다이한을 흘끔 내려다봤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차림새의 아이가 소매치기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값비싼 걸 맡길 수는 없었다.

“자, 여기 금화 주마.”

그런 수하의 시선을 무시한 백작이 다이한의 작은 손에 금화 3개를 쥐여주고는 설명했다.

“뭘 물어도 답하지 말고 가서 조용히 건네주고 오렴.”

말을 마친 그는 다이한의 옷 안쪽에 손바닥만 한 박스를 넣어줬다. 다이한은 그걸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해 터덜터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마차까지 걸었다. 사람이 많고 복잡한 그 거리에서 흰색으로 환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마차는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뒤로 물러서.”

기사들 중 하나가 왕비의 마차 가까이 선 다이한을 발로 툭 막아섰다. 다이한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두어 발자국 앞에 있는 마차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걸 본 기사가 인상을 팍 쓰고 언성을 높였다.

“뒤로 물러서래도!”

아까보다 과격하게 다이한을 발로 차버렸고, 다섯 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는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무슨 일이지?”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나긋한 목소리에 기사가 당황한 듯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아니, 비렁뱅이가-. 그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자, 마차 문이 열리며 그 안에 앉아있던 왕비가 넘어진 다이한을 확인하고는 손짓했다.

“내버려두게. 어린아이가 아닌가.”

“그래도- 이런 거 하나하나 신경 써주시면 온갖 거지들이 다 모입니다.”

“이리 오렴.”

붉은 머리카락이 돋보이는 왕비가 다이한을 향해 손을 내밀자, 다이한은 바닥에서 일어서서 그대로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자.”

왕비가 손목에 차고 있던 가는 금팔찌를 다이한에게 건네줬다. 그걸 본 기사들은 혹여 다른 이들이 보고 저도 달라며 쫓아올까 몸으로 그 광경을 가렸다. 다이한이 한 발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여자를 보며 다이한은 옷 안에 든 박스를 내밀었다.

왕비는 조금 놀란 듯 다이한을 보다가 그걸 받아 들었다. 친황국파에 의해 폐위 이야기가 강하게 나오자 걱정 많은 아버지가 보낸 선물인 것 같았다.

“아기.”

다이한이 손을 꼬물거리며 왕비의 품에 안긴 포대기를 가리키자 그녀는 미소 지으며 자신의 딸을 그에게 보여줬다.

“그래, 예쁘니? 내 눈에는 너무 예쁘단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다며 아이를 꼭 끌어안는 걸 보면서 다이한은 아기를 빤히 바라봤다. 살덩이에 눈 코 입을 가져다 붙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퉁퉁 부은 아이를 본 다이한은 고개를 내젓고 그대로 마차에서 뛰어나왔다. 그 광경이 어쩐지 껄끄러워서 아이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다이한은 얼마 뒤에 그때 그 왕비가 사고로 죽었다고 어른들이 떠드는 걸 엿들었다.

***

“우리 아들이 가서 고생 좀 해줘야겠구나.”

황국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귀족 가문에서 아들을 한 명씩 차출해 내놓고 있는 상황이 되어서야 그는 처음으로 아들이라 불렸다.

“다이한. 우리 가문의 명예를 바로 세워라.”

홀대하던 막내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행태를 모두들 욕했지만, 다이한은 무섭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다만 몇 달 전부터 산에 올라 듣기 시작한 노래를 못 듣는 건 좀 아쉽게 느껴졌다.

막상 도착한 전쟁터는 그가 살던 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라는 대로 움직이고, 사생아의 아들이라고 여전히 무시당했다. 그는 귀족 자제들과는 달리 자원입대한 평민 소년병들과 함께해야 했다. 차별과 멸시는 여전했으나, 조금 다른 점은 사람을 죽인다는 거였다.

“후퇴하라!”

지휘관 중 하나가 수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는 소리를 질렀다. 지금 여기서 굳이 병력을 내어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말 머리를 돌리던 그는 아직 선두에 서있는 금발 청년을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자세히 보니 덩치만 크지 아직 소년 같았다.

다른 이들의 후퇴를 돕는가 했지만, 그것도 아니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이야?”

금발 소년의 검이 허공을 찢어내듯 가르는 게 힘 있는 검술이었다. 조용히 썩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잠깐 멍하니 서있던 지휘관은 급하게 적들 사이에 홀로 선 다이한을 향해 달렸다. 정면에서 둘을 상대하고 있는 다이한의 등에 검이 꼽히기 직전, 그가 그걸 쳐내며 다이한을 한 손으로 낚아채 말에 던지듯 태웠다.

“미친 건가! 후퇴 명령을 못 들었어? 이거 명령 불복종이네!”

그가 빠르게 말을 몰아 그곳을 벗어나며 소리쳤는데, 다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딱히 물러서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전쟁터라는 곳에 있다 보면 언젠간 죽을 것이었고, 그는 아마 평생을 이곳에 있어야 할 게 뻔했다. 그러니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다이한을 보며 지휘관은 진저리를 쳤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연녹색 눈이 공허해 보였다.

“죽는 게 무섭지도 않아? 도망칠 때는 도망을 쳐야지!”

“죽는 게 왜 무서워야 합니까.”

그 말에 지휘관은 정말 이상한 새끼라는 생각을 하며 얼굴을 구겼다. 그렇게 진영에 도착해서 다이한을 내동댕이치고 군을 재정비한 그는 다이한이 계속 떠올라 잠을 못 이뤘다. 잘만 다듬으면 정말 써먹기 좋은 칼이 될 터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상관에게 다이한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각하, 이거 태생부터 괴물입니다. 후퇴를 안 합니다.”

어린 게 울거나 도망치는 법이 없어요. 지휘관 중에 누군가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다이한의 금발 머리를 툭 검집으로 치며 말했다.

“넌 나이도 어린 게, 죽는 것도 안 무섭고 사람 죽이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아?”

주요 지휘부인 황국의 공작이 다이한을 눈여겨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울어야 합니까.”

“보통은 너처럼은 안 굴지.”

그 말을 들은 다이한은 주위를 둘러봤다가 빠르게 수긍했다. 주위의 또래들 중 온전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울거나, 정신을 놓거나 지쳐서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이한은 적어도 겉으로는 자신이 제일 멀쩡하다 느꼈기에 입을 열었다.

“전 어딘가 고장 나 있습니다.”

다이한이 덤덤하게 하는 말을 들은 공작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또 그런 것들 참 좋아하네. 남들은 없는 독특한 것들.”

공작은 이번 전쟁에 유용하게 쓰일 장기말을 찾았다 생각했다. 그는 다음 날부터 다이한을 옆에 데리고 다녔다.

전쟁 내내 다이한은 후퇴 없는 기사로 이름을 떨쳤다. 북쪽 사람들은 자비와 동정 없는 다이한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고는 했다. 그는 적국의 기사들을 살려두지 않기로 유명했기에, 어떤 이들은 다이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도망을 쳤다. 그는 그 정도로 무감각하고, 기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행했다.

어느 순간 다이한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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