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52)화 (52/135)

52.

산 밑에는 귀족들이 연합한 수색대 천막이 급하게 꾸려졌다. 그곳에 앉은 제인 경이 도피 생활과 이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엘레노어 황녀님이 자신을 죽일 게 분명했다. 웃으며 반겨주다가 등 뒤에서 칼을 들이밀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제인은 서신에 구구절절 이야기를 쓰다가 이내 펜을 집어 던졌다.

“내가 씨, 절벽에 뛰어내릴 줄 알았냐고.”

일곱 살짜리 어린애도 그런 짓은 안 해요. 씩씩거린 제인은 이내,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냈다. 빌어먹을 호위의 기본인데, 귀찮다고 멀어지는 걸 내버려 뒀었다. 허튼짓하면 바로 막을 수 있게 옆에 있어야 했는데. 이건 기사로서의 무능이었다. 제인의 기분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그 시점에 기사 한 명이 슬쩍 천막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단장님.”

“왜.”

“그-, 상황에 안 맞기는 한데. 그때 말씀하신 하녀를 찾았는데 어찌할까요.”

기사가 난감하다는 듯 하는 말에, 제인은 땅에 떨어진 펜을 발로 짓밟았다. 콱콱 과격한 행동을 하는 제인을 보며 기사가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하녀?”

“그 후작저에서 일했다는. 아니면 오늘은 그냥 가라고 할까요?”

“데려와.”

제인의 말에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갈색 머리를 가진 여자를 천막으로 밀어 넣었다. 어딘지 겁을 잔뜩 먹은 여자를 보며 제인은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다. 간이 테이블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래, 이름이. 뭐랬더라?”

“샤론, 샤론이요.”

샤론은 후작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면, 돈을 준다는 말에 여기까지 온 걸 후회했다. 눈앞의 여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어딘지 이미 화가 나있어 보였다.

“네가 후작 부인이 처음 후작가에 발 들였을 때부터 있었다고?”

제인은 이제 이 짓거리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후작 부인이 기억을 잃은 게 맞나?”

깔끔하게 본론만 꺼낸 제인의 물음에 잠깐 주춤하던 샤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은 그렇게 말했어요.”

어차피 후작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었다. 실상 저택에서 조금만 지젤에게 적의를 보여도, 후작은 그걸 귀신처럼 눈치채 정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뒤에서 엿들은 미아가 하나하나 고해바친 것 같았다. 그때 당시에 일했던 사용인들이 거한 퇴직금을 받고 입을 다문 게 아니라, 땅 밑에 묻혔기에 침묵을 지킬 수 있었다는 걸 그녀는 알았다.

왕비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왕비의 편인 게 분명한 황태자의 기사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직감했다. 그 얄미운 후작 부인이 드디어 몰락하는구나. 이제는 죽었다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기에 샤론은 더 기쁜 마음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걸, 후작은 어떻게 확신했지?”

“당시에 의원이 확인해줬습니다. 그리고,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어요. 불쌍하다느니 어쩐다느니.”

“불쌍?”

“가족들도 죽고- 후작님이 워낙 과격하게 굴다 보니. 그, 근데 그렇게 불쌍하지는 않았어요.”

제인은 주절주절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샤론을 가만히 바라봤다.

“좋은 옷에 비싼 음식 먹고, 후작님이 돈 씀씀이에 크게 관여도 안 하고. 처음에야 좀 사이가 안 좋았지만, 나중에는 후작님께 살랑거려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제인은 갑자기 입 안이 써져서 테이블 위에 늘어진 담배를 집어 들었다. 그러네, 후작 부인 거 기구한 인생 살다 가셨네.

“아픈 걸 방패 삼아 문란하게 사는 여자였어요.”

“문란하다니.”

불쾌한 단어 선택에 제인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가 본 지젤은 우아하고, 교양 있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제가 보고 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후작님이 절 내쫓으려고 하셨지만 제가 눈치 빠르게 도망친 거예요.”

“자세하게 어떤 걸 보고 들었는지 말해봐.”

제인이 툭 테이블에 금화 다섯 개를 쌓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걸 보면서 침을 꿀꺽 삼킨 샤론이 입을 열었다.

“무슨 작곡가라는 남자도 만나고, 나이 먹은 백작하고도 계속 연락을 했어요. 미아라는 하녀가 그런 편지를 전달해주는 걸 제가 봤습니다. 그래서 그걸 후작님께 고했는데, 후작님께서 오히려 절 죽이려 하셨어요.”

“백작?”

나이 든 백작. 달리아 백작? 후작이 자신의 부인과 달리아 백작이 연락하는 걸 알고 있었다고? 근데 그걸 지금까지 그냥 두는 이유가 뭐지. 정적이나 다름이 없는데.

“애처롭게 굴면서 온갖 남자를 다 만나고 다니는 여자였어요.”

“그래.”

작곡가야 바르한 자작일 테고, 백작도 누군지 아는 뻔한 얘기의 반복이었다. 제인은 재미가 없어져서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 선 기사에게 눈짓했다. 그걸 눈치챈 샤론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저거 먹고 떨어질 수는 없었다.

“툭하면 수도를 나돌아 다니며 온갖 남자들 다 만나고, 옷과 보석에 돈을 펑펑 쓰는 여자였어요. 후작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다른 남자로 갈아탈 생각이었던 게 분명해요.”

“돈을 다 썼다.”

귀부인이 후작이 망할까 걱정되어, 다른 예비책을 찾는 것치고는 방향이 이상한데. 제인은 왕비인 마가렛이 계속 얘기했던 대로 지젤이 연기를 하는 중이라는 게, 그래서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게 더 그럴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그럼 왜 황태자님을 못 알아본 거냐는 난제가 남았는데. 못 알아보는 척할 정도로 연기를 잘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나.

“그- 결혼 전에도 평민을 하나 만나서 도망가려고 했다고도 들었어요!”

평민? 제인이 다시 샤론을 내려다보며 계속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평민이 무슨 사고인가 아니면 화재 사건에 휘말렸었나. 하여튼 죽어서, 자기도 죽겠다고 패악질을 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저도 화풀이로 맞고는 했어요! 후작님께도 몹쓸 짓을 하고 말입니다.”

제인은 거기까지만 듣고는 기사에게 손짓해 샤론을 끌어냈다. 샤론이 무언가 더 바라는 듯 그녀를 올려다봤지만, 제인은 그걸 보지 못하고 털썩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의 금화를 집어 든 기사가 샤론을 재촉해 끌고 나가자 천막은 조용해졌다.

“후작과 왕비에게 복수를 하려고, 달리아 백작을 만나고 자작과 계획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자신의 가설을 중얼거리며 미간을 구겼다.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헷갈렸는데 이렇게 보니 후작 부인에게는 확실한 동기와 계획이 있었다.

“그럼 후작 부인은 이안 님이 죽었다고 확신을 해서, 똑같이 생겨도 못 알아본 거야?”

제인은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제3자 입장에서는 차라리 연기를 해서 이안을 모른 척하고 속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정말 황태자가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와 너무 닮았다고 생각하며 눈앞에 두고 괴로워하기만 했더라면. 그럼, 죽은 지젤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냥 얘기하지. 내가 네가 버린 미하엘이었다고. 쓸데없는 데서 저돌적인 이 미친놈아.”

그녀는 황태자가 바보같이 빙빙 돌기만 했다는 게 우스워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왕국에 온 뒤로 제일 마음 찝찝하고 기분이 더러운 날이었다.

***

지젤은 열이 들끓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이안을 보며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만 하루가 지났는데도 수색대는커녕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색을 포기한 건가? 황태자 때문이라도 그럴 리가 없는데. 그녀의 옆에 누운 이안은 많이 아픈지 이따금씩 고통을 참는 듯 끙끙거렸다. 어쩌지. 이러면 차라리 이쪽에서 움직여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지젤이 몸을 일으켰다.

“저 다녀올게요. 아무래도 제가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요.”

열감이 돌아 선홍색으로 물든 이안의 얼굴을 안쓰럽게 쳐다본 지젤이 짧게 혀를 찼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날 것 같아. 이안은 그런 지젤의 말에 힘들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는 지젤의 손목을 잡았다.

“가지 마.”

“저하, 상태가 너무 안 좋으세요. 이렇게 시간만 끌면-”

이안이 그런 지젤을 쭉 잡아당기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대로 죽어도 좋으니까,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어투와는 다르게 애절한 표정을 보면서, 지젤은 차마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괜히 나섰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이라도 잊으면 큰일이었다. 지젤은 다시 눈을 감는 이안에게 덮어줄 만할 것을 찾다가 포기했다. 따듯하게 해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한이 드는지 퍼렇게 질린 입술을 바르르 떠는 걸 보면서 지젤은 그의 옆에 누웠다. 그러고는 그를 조용히 감싸 안았다. 아픈 팔을 애써 크게 벌려 옆으로 누운 그를 감쌌지만, 그래도 품에 다 들어오지 못했다. 그녀보다 큰 체격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안이 그런 지젤의 품에 파고들며 한숨처럼 말했다.

“지젤.”

지젤은 왼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숨을 가다듬었다. 흙이 묻어 더러워진 흑발이 그녀의 하얀 손가락에 감겨들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가 아는 이름을 한 번 더 입에 담았다.

“미하엘.”

그 이름에 대답이라도 하듯 이안이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지젤은 눈을 감고 터져 나오는 가련한 울음을 삼켰다. 네가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뭐든 하겠다 했었는데. 간사하게도 내가 원망부터 쏟아냈으니 용서해. 설령 네가 날 진짜 기만했더라도, 지금 이렇게 같이 죽겠다 뛰어든 마음조차 거짓된 것이더라도. 그저 네가 이렇게 살아 있음을 감사히 여겨.

“내가 미안해.”

지젤은 이안을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네가 그때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해.”

이안이 힘없이 눈을 뜨고 시선을 들어 지젤을 올려다봤다. 그가 지젤이 작게 속삭이는 걸 들은 건지, 아니면 끓어오르는 열과 귀를 찢는 이명에 듣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잠깐 멍하니 울상이 된 지젤의 얼굴을 보다가 그 뺨에 입 맞췄다. 아주 짧고도 뜨거운 위로였다.

“울지 마.”

나 속상해. 지젤은 와중에도 자신을 위하는 이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울게. 안 울 거야.”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그녀는 참아냈던 울분과 슬픔을 다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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