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내가 할 테니 줘.”
이안은 서슴없이 바지를 찢은 지젤에게서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은 지젤을 의식하는데, 지젤은 전혀 그러지 않는 것 같았다. 이안은 지젤에게서 천 조각을 받아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바지를 뜯어낸 지젤의 왼쪽 다리는 무릎의 한참 위인 허벅지 중간까지 드러나있었다.
“추울 텐데.”
“저하께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돌아가시는 것보다는, 제가 추운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그녀의 냉정한 말이 딱히 틀린 건 없어서, 이안은 그녀에게서 아쉽게 몸을 떼어냈다. 그는 허벅지 안쪽을 단단하게 힘줘 묶었다. 언제 수색대가 올지도 모르는데,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허벅지에 박힌 나무 조각을 단숨에 빼냈다. 억눌린 신음을 뱉어내는 그를 보며 지젤이 덩달아 썩은 치즈를 문 표정을 지었다. 피가 울컥 솟아오르는 광경이 그녀를 무섭게 만들었다. 맙소사, 너무 아프겠다. 그리고는 상처를 묶을 천이 또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반대쪽 바지를 찢으려 했다.
“그만. 헐벗고 있을 생각이야?”
이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제지하자, 지젤은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아파, 온몸이 아픈데 그렇게 잡지 마.
“그럼 과다 출혈로 돌아가시려고요?”
날카롭게 쏘아붙인 그녀는 이안이 더 말릴 새도 없이 바지를 찢어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걸 순순히 받아 들어 상처를 지혈한 그가 가쁜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은 채 고통을 삼켜냈다.
“대체 왜 뛰어내리신 거예요.”
상황이 조금 정리되고 급한 걸 해결하자, 지젤은 가장 묻고 싶던 말을 꺼냈다. 떨어지기 전에 봤던 그 절박한 표정이 그녀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뭐 하나 쉬운 게 없고 헷갈리지 않는 게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등에 날개라도 달려서 같이 뛰어내린 줄 알았겠다.
“진정 미치신 줄 알았습니다.”
지젤의 말에 이안이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다가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갈비뼈 어디도 하나 나간 것 같았다.
“내 생각에도 그래.”
이안이 툭 지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인정했다.
“난 미친 게 맞아.”
이안이 달뜬 숨을 내뱉으며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 그를 보며 지젤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너 뭐야. 너한테 나는 대체 뭐야. 정말 묻고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굴면 안 된다는 걸 곱씹으며 그의 얼굴을 밀어내기 위해 손을 들었다.
“저하?”
열? 지젤은 그제야 황태자의 몸이 뜨겁다 못해 들끓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안이 힘없이 축 늘어지는 걸 본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혀를 깨물었다. 이윽고 이안이 쌕쌕거리는 숨을 내뱉는 걸 확인한 지젤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모든 게 다 무서웠다.
***
“후작님!”
한센은 자정을 넘긴 새벽에도 수색을 강행하는, 아니 제일 앞서서 숲의 안쪽으로 뛰어들고 있는 다이한을 만류했다.
“밤은 위험합니다. 내일 해가 뜨자마자 기사단을 전부 투입해 찾아내기로 했습니다.”
귀족가의 온 기사들이 다 모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모두가 결집해 실종자 찾기를 도우려 했다. 후작 부인이든, 황태자든 시체라도 찾으면 이득이었다. 황가든, 후작가든 감사를 표할 테니 말이다.
“그게 맞습니다. 제가 다이한 님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가 아니지만-.”
한센은 지젤이 황태자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만 12시간이 넘도록 찾지 못하고 있었다. 운이 좋아 추락한 뒤 살아남았다 해도 분명 어딘가는 다쳤을 테고, 기온이 떨어진 지금 살아남아 있을 리 없었다.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다치고, 피를 많이 흘리면 죽는다. 이런 간단한 논리에서 나온 생각들이었다.
모두가 지젤의 죽음을 슬퍼하지는 않았다. 공작 부인인 리안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대로 기절해 저택으로 돌아갔다. 어떤 귀족들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삶을 산 비운의 후작 부인이라 떠들었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반, 저주받은 삶이라 진저리 치는 사람이 반이었다.
다만 모두들 공통되게 황태자가 왜 지젤을 따라 죽었는가 수군거렸다.
“다이한 님, 제발 일단 주변 정리부터 하심이 옳습니다.”
그리고 다이한은 그 모든 게 눈에 들어오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떨어지는 지젤을 가까이에서 보지도 못했다. 마차가 둔탁하고 커다란 소음을 내며 그대로 절벽으로 굴러떨어지는 게 잔상처럼 남았을 뿐이었다.
“제발, 후작님.”
한센이 이쪽 말을 전혀 듣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걷는 다이한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의 후작은 지금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굴었다.
“죽지 않았어.”
다이한은 지젤이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그렇게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던 사람이 지금은 죽음을 믿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의 배를 갈라 심장을 칼로 저며내도 이것보다는 덜 아플 것 같았다. 차라리 자신도 그 멍청한 황태자처럼 같이 뛰어내려 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그러지도 못했다. 그게 그를 갈기갈기 찢어냈다. 넌 끝까지 그 정도밖에 되지 못한, 한심한 새끼라 비웃는 것 같았다.
“후작님.”
한센은 안타까움에 함부로 입을 열지도 못하고, 말을 아꼈다.
“내가 안일하게 굴어서.”
품에 가둬놓고, 시선을 떼지 말아야 했었다. 다이한은 짤막하게 후회를 내비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센은 다이한이 지젤의 시신을 확인한 다음을 걱정하며 끄응 앓았다.
***
끔찍한 마차 사고로 사냥대회가 중지되었다는 소식에 후작저는 한바탕 뒤집어졌다. 모두들 정말로 후작 부인이 죽었는지에 대해 토론했다.
“아니, 거기서 떨어지면 당연히 죽지!”
“그게 그렇게 높지가 않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마차가 말이지-”
“이 양반, 참 답답한 소리 하네. 자네가 뛰어내려 봤어?”
“뭐 말을 또 그렇게 해? 아, 이게 마차가 떨어지면서-”
“거, 목숨 아홉 개 가진 고양이도 떨어지면 죽는 높이라니까 그러네.”
“쉿!”
혼란스러움이 가중되는 와중에 언성이 높아지자, 하녀 중 하나가 눈치를 줬다. 그녀는 넋이 나간 미아를 눈짓하며 혀를 찼다.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바라야지, 죽었니 살았니. 이 아저씨들이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미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러 큰소리를 냈다. 미아가 울지도 못하고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지젤 님이 죽었다고?
“그러실 리가 없어. 돌아오시면, 나랑 같이 후작님 옷에 자수를 놓기로 하셨단 말이야.”
지젤 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야. 미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한 번도 약속 어기신 적이 없는 분이니, 돌아오실 거야.”
소란스러웠던 저택 안이 미아의 말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들 찬물을 뒤집어쓴 듯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데, 도널드는 그곳을 벗어났다. 이안 님이 죽었다고? 마차 사고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흐를 것 같은 그 남자가, 겨우 사고로 죽었다니. 그가 당장 복귀하려고 저택 뒤의 마구간으로 달렸다. 일단, 제인 경에게 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어딜 가는지 물어봤자 답하지 않을 테니.”
도널드는 마구간에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말고삐를 내미는 비앙카를 보고 몸을 굳혔다. 당장에라도 탈 수 있도록 말을 꺼내놓은 비앙카가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
“뭐?”
비앙카가 얼빠진 그의 손에 말고삐를 쥐여주며, 마구간 뒤쪽을 눈짓했다. 도널드는 자신의 손에 고삐를 넘기는 작은 손이 하녀치고 투박하다는 생각을 하고 탄식했다.
“후작 부인의 마차를 정비한 마부 중 한 명이 사라졌어. 남은 짐이랄 것도 없고, 집사에게 말도 없이 갑자기 그만둔 건 이상하지.”
도널드는 하녀복 차림새를 하고 있는 비앙카를 세심하게 뜯어봤다. 비앙카는 의심이 가득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일러줬다.
“사냥대회가 시작하자마자 사라졌다니, 마차 사고가 무서워 도망쳤다기에는 시간이 안 맞아.”
“너 뭐야?”
도널드는 자신보다 작은 비앙카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에도 범상치가 않아서 평범한 하녀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제 보니까 아예 하녀가 아닌 것 같았다. 비앙카는 그런 도널드는 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네가 누군지 안 궁금해.”
언제부터 이쪽을 눈치챘던 걸까. 도널드가 자신이 얼마나 연기를 못했는지, 혹은 허점이 많았는지 고민하는데 비앙카가 그를 상념에서 꺼내줬다.
“마부에 대해 알아봐.”
슬슬 답답함에 짜증이 나기 시작한 비앙카가 그대로 그를 지나쳐 마구간을 나가려 했다. 도널드가 그런 비앙카의 왼손을 다급하게 잡아채려 했으나, 비앙카가 몸을 뒤로 빼는 게 더 빨랐다.
“마차 사고와 연관이 있다는 건가?”
“사고가 난 당일 아침에 남은 급료도 받지 않고 사라진 마부가 흔할까?”
비앙카는 이 고지식한 남자가 누군지 대충 알고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이야기는 안 했다. 그는 저런 부류들과 잘 맞지 않았다. 의리와 정의감으로 굴러가는 기사단은 성격에 안 맞았다.
“우리 같은 부류는 그쪽이랑 달라서 돈으로만 움직이거든.”
후작 부인이 실종된 마당에 여길 지키고 있을 의리는 없지만, 그녀가 죽은 걸 확실하게 확인한 것도 아닌데 떠날 수는 없었다. 비앙카는 그만큼의 기다림은 할 수 있는 돈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마부에 대해 알아보는 건 의뢰를 받지도, 결제가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이었다.
“기사님께서는 어서 진실을 쫓으셔야지.”
멍한 도널드를 향해 비아냥거린 비앙카는 훌쩍 그곳을 떠났다. 잠깐 멍하게 서있던 도널드는 일단 마부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그게 비앙카에 휘말리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마차 사고가 고의적인 것이라면, 그 배후에 누가 있든. 그건 황태자를 살해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