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50)화 (50/135)

50.

이안은 산을 오른 뒤 1시간쯤 지나서야, 지젤과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젤의 인위적인 표정이 뭔가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걸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없었다. 후작이 또 뭔가 해서, 겁을 먹고 그러나? 그는 시야에서 보이지도 않는 다이한이 있는 앞을 향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새끼가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산을 깎아 인위적으로 만든 원만한 오르막길을 오르며 이안은 답답한 마음에 시선을 멀리 던졌다. 오르막길 옆 가파른 절벽에 모두들 산 쪽으로 붙어서 걷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안이 지젤의 마차 가까이 다시 말을 몰며 입을 열었다.

덜컹-!

그와 동시에 이질적인 소음이 크게 울렸다. 동시에 말과 지젤이 탄 마차를 연결시킨 부위가 완전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안이 말을 멈추고 다급하게 지젤을 부르기도 전에 마차가 그대로 바퀴에서 떨어져 땅에 곤두박질쳤다.

“지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에 이안은 고함을 질렀다.

“후작 부인!”

히이잉! 놀란 말들이 앞발을 들고, 걸음을 멈춰 순식간에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대로 한 바퀴를 굴러서 뒤로 떨어지던 마차가 무게를 못 이기고 기울어지다가 그대로 절벽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쾅!

이안은 땅에 크게 부딪히며 열린 마차 문 사이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지젤을 발견했다. 이미 두어 번 구른 마차 안에서 이리저리 쏠린 듯 몸을 웅크리고 있는 지젤을 보며 이안이 다급하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지젤!”

“저하, 위험합니다!”

상식적으로 내리막길에서 마차가 굴러떨어지는 걸 사람이 맨손으로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으악!”

“거기 조심해!”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지젤과 부서진 마차는 말 한 마리와 부딪혀 그대로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허공에 붕 뜬 마차와 그 안의 지젤을 본 이안이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싫어, 이제는 안 돼.”

두 번은 바보같이 혼자 보내지 않아. 지젤을 데려가는 게 뭐든 간에,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원래도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었다지만, 그녀가 없는 사이 이안의 마음은 병들었다. 그녀만큼 그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그녀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건 상황에 적당히 맞춰서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지젤을 또다시 놓칠 수 없었다. 그는 공중에 흩날리는 지젤의 붉은 머리카락이 멀어지는 걸 보며 발을 움직였다.

“저하!”

제인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빠르게 이안을 향해 뛰어갔지만, 황태자가 더 빨랐다. 이안은 떨어지는 마차 안으로 그대로 뛰어들었다.

지젤은 죽음을 직감할 수 있는 그 상황 속에서 공포감보다 의문과 황당함을 더 크게 느꼈다. 지금 뛰어내리는 거야? 그녀는 따지고 싶었다. 네가 바보도 아니고,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그러나 몸이 추락하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아찔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는 게 전부였다.

“이 미친놈아!”

그런 지젤의 마음을 대변하듯 제인이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들이 놓친 마차는 절벽에 연이어 부딪히는가 싶더니 산 밑으로 떨어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제인과 한센이 동시에 눈을 마주치고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엘레노어 님께서-.”

날 죽이실 거야. 제인이 숨을 헐떡이며 황태자가 자살한 건에 대해 뭐라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한센은 고개를 들어 사색이 된 채 달려오는 다이한을 바라봤다. 아마 그는 제인보다 먼저 갈 것 같았다.

***

지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에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다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오른팔이랑 왼 다리가 부러지거나 으스러진 것 같았다. 살아있는 건 맞나?

“윽-!”

고통 어린 숨을 토해낸 지젤은 지금이 해가 진 밤이라는 걸 깨달았다. 잠시 멍하니 누워서 상황을 파악하던 그녀는 자신이 천장이 날아간 마차 안에 누워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행스럽게 엄청 높지는 않았나? 정신을 잃었었나 본데. 질긴 목숨줄 같으니라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 지젤은 자신의 바로 옆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더듬더듬 매만졌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게 사람이라는 걸 알아챈 지젤은 어깨를 경직시켰다.

“누구-?”

물음을 꺼냈던 지젤은 그게 황태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떨어지기 직전 자신과 같이 뛰어내린 황태자를 보며 그녀는 인상을 확 구겼다. 급하게 얼굴을 더듬어 미약하게나마 그가 숨을 쉬고 있는 걸 확인한 지젤은 짧게 혀를 찼다.

“죽으려고 작정을 했나.”

실제로 지금 살아있는 건 기적이었다. 생각보다 높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마차가 튼튼했던 건지. 하여간에 일단 수색대는 꾸려졌을 테고. 지젤은 아릿한 통증에 신음을 내뱉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오른팔은 부러진 것 같은데, 왼 다리는 생각보다 덜 심각한 것 같았다. 수색대가 밤중에라도 우릴 찾아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 같았다.

그녀는 일단 어두운 걸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황태자가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는 걸 상기시켰다. 정확하게는 무슨 약초를 태운 거라고 했지만, 어쨌든 그의 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녀는 손쉽게 성냥을 찾아냈다. 그리고, 어색한 왼손으로 불을 켜기 위해 끙끙거렸다. 어렵사리 불이 붙자 그녀는 미리 모아둔 부러진 나뭇가지들에 불을 지폈다. 환해진 시야와 옷이 거의 다 찢어진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그녀는 곧바로 이안에게로 눈을 돌렸다가 몸을 굳혔다.

“무슨!”

그의 오른 허벅지에 박힌 손바닥만 한 나무 파편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지젤은 침착하려 애썼다. 자세히 보니 살에 조각이 박혀있기는 하지만 이제 피는 멈춘 것 같았다. 근데, 지금 저 조각을 뽑고 나면 다시 지혈하기 힘든 상태가 될 것 같았다.

더 다친 곳은 없나?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수색대가 오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가늠하려면, 여기가 어딘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걸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부서진 마차 위로 널브러진 황태자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한 지젤은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한가을 해가 지자 날씨는 추웠고, 밤의 산에는 어떤 짐승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마차가 갑자기 왜.”

지젤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기면서도 생각을 정리했다. 고의적이지. 이건 고의성이 다분한 사고야. 멀쩡한 마차가, 그것도 정비도 마친 마차가 갑자기 이렇게 될 수는 없었다. 주위를 살피다가 부서진 마차 바로 옆 작은 동굴을 발견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옮기자.

자신보다 거대한 황태자를 이렇게 고장 난 몸으로 옮기는 건 큰 모험이었기에 지젤은 모든 일을 한 번에 처리하려고 애썼다. 동굴에 불을 지피고, 낙엽을 모아 바닥에 깔았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나무 조각을 주워 마차의 파편 중 의자였던 부분에서 천을 뜯어냈다. 그렇게 낙엽 위에 천까지 깔아서, 환자를 눕힐만한 환경을 만들어낸 지젤은 심호흡을 하고 이안을 불렀다.

“저하.”

의식이 있어서 걸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당장 저 허벅지에 박힌 걸 빼내야 하는 건지 그대로 둬야 하는 건지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답이 없이 쌕쌕거리기만 하는 이안을 보며 지젤은 덜컥 무서워졌다. 네가 죽으면 어쩌지? 또 나 때문에 죽으면-. 두 번은 그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미하엘.”

공포에 질린 지젤이 숨을 몰아쉬며 그를 흔들자, 이안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횃불이 희미하게 주황빛으로 밝혀주는 어둠 속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 이안은 엉망이기는 하지만, 살아있는 지젤을 보고 탄식과도 같이 속삭였다.

“다행이다.”

“하나도 다행스럽지 않습니다. 지금 많이 다치셨고 저희는 고립되었어요.”

이안은 지젤의 지적에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러고는 다리에 박혀있는 나무 조각을 확인하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높지는 않았던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깊이 박힌 게 아니라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놀라지는 않았고?”

“저하,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세요. 일단,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그녀는 이안이 일어서는 것을 돕기 위해 손을 뻗었다. 흙이 잔뜩 묻어 지저분한 하얀 손을 보던 이안은 그걸 바로 잡을 수가 없었다. 재회한 뒤로 맨손을 잡아본 적이 없어서. 물론, 이쪽과는 다르게 지젤은 당장의 급박한 상황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저기 저 동굴로 몸을 피하시죠. 상처를 지혈할 만한 걸 찾아볼게요.”

이안은 지젤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의지해 완전히 일어설 수 있었다.

“팔 이리 주세요.”

“응.”

지젤은 이안의 팔을 끌어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그를 부축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큰 덩치를 감당하기 위해 숨을 참고 버텨 서야 했다. 조금 휘청이기는 했지만 서로에게 의지해 한 걸음씩 내디딘 둘은 동굴에 도착하자마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언제 불까지 피운 거야?”

“한밤중의 숲은 위험하니까요. 상처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안은 그녀가 깔아놓은 일종의 간이침대 위에 앉았지만, 그녀의 어깨에 걸친 팔을 풀어내지는 않았다. 지금 이걸 입 밖으로 꺼내면 지젤은 화를 내겠지만, 다른 의미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맞닿은 온기가 너무 따스하고 소중해서, 이안은 뛰어내려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지젤이 알았으면 뺨을 때렸을 일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지혈이 힘들 것 같은데.”

지젤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의 허벅지에 박힌 나무 조각을 살폈다. 그러고는 이미 너덜거리고 있는 자신의 승마복 바지를 쭈욱 찢어냈다. 이 정도 길이면 얼추 그의 굵은 허벅지 굵기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걸로 지혈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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