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49)화 (49/135)

49.

“후작님이 귀부인들에게 마차를 선물했다며.”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공식적인 사냥대회의 시작에서 누군가 소란스럽게 떠드는 말에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정말로 귀부인들에게 마차를 한 대씩 선물한 후작의 씀씀이에 놀랐다. 쉬엄쉬엄 말을 타면 괜찮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마차를 고집해서 태워 보내는 심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젤 님.”

비앙카가 지젤이 탄 마차 쪽으로 다가서다가, 성큼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다이한을 발견하고는 물러섰다. 깔끔하게 금색 실로 장식된 검은 정복을 차려입은 그를 보며 지젤은 고개를 숙였다.

“후작님께서 신경 써주셔서 저만 이렇게 편하게 가게 되어서는, 민망하네요.”

다이한은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지젤을 보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녀의 푸른 눈보다는 살짝 짙은 남색 승마복을 입은 모습이 낯설었다. 그는 몸이 좋지 못해 참석하지 않은 왕비 대신 선두에 자리해야 했기에 한센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한센이 단박에 알아듣고 지젤의 마차 옆에 섰다.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한센 경에게 말해.”

대회의 시작은 산 밑에서부터였지만, 다 같이 줄지어 올라가기 때문에 엄연히 따지자면 산의 중턱에 도착해야 진정한 사냥대회의 시작이었다.

“적어도 3시간은 올라가야 하니까.”

“네, 감사해요.”

그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도 뭔가 더 이야기하려다가, 이내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지젤은 다이한이 떠나고 한센이 말을 정비하는 걸 보면서 비앙카에게 눈짓했다. 비앙카가 물이 든 컵을 지젤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지역에서, 몇 년 동안 꾸준히 겨울마다 왕국을 방문한 자들을 찾았습니다.”

방문한 사람들? 지젤은 비앙카가 가져다준 물을 입에 머금고 억지로 삼켜냈다. 해독제가 섞인 씁쓸한 물이 입 안에 퍼지는 걸 느끼면서 지젤은 비앙카의 다음 말을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 영지에 별장을 두고 겨울마다 돌아오던 사람들은, 황태자 일행밖에는 없었습니다.”

비앙카는 자신이 소속된 길드 단장이 어렵게 알아낸 사실을 조용히 고하고는 지젤의 손에서 물잔을 받아냈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질 뻔한 물잔을 받아 든 비앙카를 칭찬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달달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기 위해 가쁘게 숨을 내뱉었다.

“확실한 거니?”

“황녀가 소유한 별장에서 일하다가 실종된 시종의 이름이 미하엘인데. 흑발에 검은 눈을 가졌지만, 나이가 맞지 않습니다. 지젤 님보다 6살 어립니다.”

그러니 지젤이 찾는 미하엘은 그 아이가 아니었다. 지젤은 출발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비앙카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녀는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마차의 바닥만 내려다봤다. 그러면, 내가 아는 미하엘은.

“살아있었구나.”

그때 죽은 게 아니었어. 나 때문에 죽은 게 아니고, 후작에 의해 살해당한 게 아니고. 거기까지 생각한 지젤이 숨을 겨우 토해내고는 연이어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참아냈다. 내 주제에 감히 할 말은 아니지만.

“이런 거짓말쟁이.”

지젤이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토해내며 일그러지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 긴 세월 동안 날 속인 거야? 결혼까지 하자며 속이고. 정말 평민인 것처럼 날 기만하며 가지고 놀았어. 정말 너랑 결혼할 수 있을 줄 알고.

“나는.”

그녀가 표정을 제대로 갈무리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시선을 내던졌다. 그녀는 단숨에 저 멀리 서 있는 이안을 찾을 수 있었다. 갈색 말에 올라탄 채로 고삐를 쥔 하얀 정복 차림의 이안을 보며 그녀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래, 어린 여자애 데리고 그만큼 놀았으면 된 거지, 왜 넌 지금 여기 왜 있는 거야? 그때,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마음대로 가지고 놀지 못한 게, 결혼 전 생각해보니 분하고 원통해서 복수하려고 온 건가?

“나는 감히 널 진심으로 좋아했는데.”

지젤은 저절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가리기 위해 마차의 창문에 달린 커튼을 닫았다. 일순, 지젤을 확인하다가 그걸 본 이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가 뭔가 하기도 전에 사냥대회가 시작되었다. 지젤은 이 모든 게 바보 같아서, 그저 숨죽여 울었다. 그게 그녀가 부당함과 억울함에 맞닿았을 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사냥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조지 콜튼은 산 밑에서 산의 정상을 올려다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과거에 했던 불쾌한 일을 반복하는 건, 썩 즐겁지 못했다.

“그래서 마차는 손보았고?”

콜튼 경이 던지는 금화 주머니를 받아 든 중년의 마부가 냅다 고개를 끄덕이며 신나서 답했다.

“예, 예. 제가 확실하게 풀어놨습니다. 도착하기 전에 사고가 날 겁니다요.”

“들키거나 눈치챈 이는 없겠지.”

“예, 그럼요. 제가 은밀하게 움직이느라 얼마나 진땀 뺐는지 모릅니다.”

마부가 탐욕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주머니를 열어 금화 개수를 확인하는 걸 보며 콜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으니 편히 쉬게.”

“네, 네. 그저 감사-”

왕궁 기사단이 콜튼의 고갯짓을 신호로 순식간에 마부의 목을 베어냈다.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목이 날아간 마부를 보며 콜튼은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는 더 꺼내 던져줬다.

“이건 지옥 가는 길 뱃삯 하게나.”

간단하게 볼일을 끝낸 그들은 그대로 그곳을 벗어났다. 오늘로써 마가렛 님과 후작 부인의 지긋지긋한 인연은 끝났다. 콜튼은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끈질긴 악연이었다.

***

“저하, 계속 그러시면 행렬이 무너집니다.”

그런 걸 저희는 민폐라 부릅니다. 제인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후작 부인의 마차 가까이 가기 위해 제 마음대로 말을 모는 이안에게 경고했다.

“애초에 선두에 서시라는 걸, 굳이 여길 고집하셨잖습니까. 그럼 돋보이는 일은 자중하셔야죠.”

그러나, 이안은 그런 제인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주위 사람이 모두 수군거릴 정도로 과격하게 말을 몰아 지젤의 마차 옆에 자리했다.

“지젤.”

이안이 말고삐를 움켜잡고 그녀를 부르는데도, 마차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또 어디가 안 좋은가. 몸도 약한데, 무리를 하는 거 아니야?

“지젤.”

똑똑-.

그가 답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마차의 창문 옆을 툭툭 치며 다시 그녀를 불렀다.

“지젤.”

“예, 저하.”

이안은 커튼을 걷으며, 얼굴을 내보인 지젤이 차분하게 미소 짓는 걸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지젤은 그런 그를 향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다 못해 문드러진 기분에도 그녀는 웃었다.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었고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결론 지어야 버틸 수 있었다. 이제 와 뭐 어쩌겠다고, 이제 와 뭘 듣겠다고 따져 묻는단 말인가.

“어디가 안 좋아?”

지젤은 그 가증스러운 걱정을 들으며, 눈을 휘어 웃었다. 어찌나 밝고 예쁘게 웃는지 옆에 있던 한센 경이 작게 탄식할 정도였다. 근데, 이안은 그런 그녀의 미소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후작님께서 신경 써주셔서 불편한 곳이 없습니다. 저하께서 걱정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난 너에게 흔들렸었다. 지젤은 쉽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했다. 그녀가 사랑했던 미하엘의 얼굴에 동요했었다. 바보같이 어리석게도 네 걱정이 진심인 줄 알았고, 내 부은 발목에 속상해하는 걸 믿었었다.

한 걸음만 떨어져 생각해보면, 황태자가 그녀를 진심으로 아낄 리가 없음에도. 어쩌면 5년 동안 너무 힘들어서 그런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을지도. 근데 애초에 내 미하엘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 다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관계였다. 사랑 놀음에 속은 어린 여자의 슬픔은 길가에 치일 정도로 흔하디흔했다. 한 번 바보짓 했던 사람이, 두 번 바보짓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젤이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왜-.”

이안은 지젤의 웃음소리를 듣고 그대로 입을 벌렸다. 뭔가 이상했는데, 그게 뭔지 짚어낼 수가 없어서 그는 그대로 어깨를 경직시킨 채로 지젤을 살폈다.

“나한테 화가 난 건가?”

“저하.”

지젤은 담담한 어조로 나직하게 그를 부르고는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눈에 열이 몰려서 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제가 어찌 감히 황태자 저하께 화를 내겠습니까. 불경스러운 말씀 거둬주세요.”

“그럼 왜.”

왜 그런 표정을 해. 이안이 말고삐를 꽉 힘줘 잡아 쥐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한센 경이 그런 이안과 지젤 사이의 침묵을 깨고 끼어들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귀족들 다 모인 자리에서 황태자가 후작 부인에게 너무 바짝 붙어 있으면, 추문이 돌았다. 그의 여러 걱정을 담은 질문에 이안보다 지젤이 더 빠르게 대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한센 경.”

정말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지젤은 이쪽을 가만히 살피는 이안을 무시하고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설레서 잠을 설쳤더니 피로해서 이상하게 보이시나 보네요.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럼, 지젤 님. 쉬시다가 문제가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한센 경이 슬쩍 이안의 동태를 살피며 지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지젤은 계속해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다시 커튼을 내렸다. 마차 안이 완전하게 어두워지자, 지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걸 방패 삼아 그녀는 툭 튀어나온 원망 한마디를 조용히 뱉어냈다.

“다 거짓말이었으면서.”

왜 그런 표정을 하고 걱정스럽게 살피는 걸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눈물이 계속 흘렀다. 같이 산에 가서 살자고? 하긴, 황태자가 시골 소녀에게 관심 가지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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