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비앙카는 지젤이 시킨 대로 미하엘이라는 평민에 대해 조사해보려 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일단, 지젤이 짚어준 마을에는 황국에서 왔다는 상인 가족이 드나든 걸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겨울만 이곳에 왔다니 별장이 있나 싶어 그쪽으로도 알아봤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비앙카는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수도 구석 시장까지 가야 했다.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시장 한복판 작은 과일 가게를 찾은 비앙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하엘이라는 남자에 대해 알아봤어?”
“안타깝게도 이 땅 위에 미하엘이라는 남자는 많아.”
문제는 나이도 안 맞고, 생김새도 달라. 지젤과 마찬가지로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호감형인 청년은 손님인 척 적당히 진열된 사과 중 한 알을 집고는 웃으며 말했다.
“조금 더 알아보고 서신 넣어줄게. 이름보다는 생김새랑 겨울마다 왔다는 걸 집중해서 찾으려고.”
“최대한 빨리 찾아줘,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건 그렇고 돈을 많이 지불하고는 있지만, 이런 잡일까지 날 시키는 건 곤란해.”
이것저것 시키는 거, 정말 엄청 피곤하단 말이지. 비앙카는 자신이 소속된 길드의 단장이 투덜거리는 걸 들으며 눈을 감았다.
“거금을 냈으니, 우린 그 몫을 해야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비앙카.”
청년이 비앙카라는 이름을 대놓고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몫이나 잘해. 황국 기사단들이 약초상을 찾고 있는 건 알아?”
비앙카가 그의 말에 인상을 확 구기자, 청년이 손에 쥐고 있던 사과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네가 그 사람 안쓰러워하는 건 너무 잘 아는데, 적당히 하고 빠져.”
나랑 똑같이 붉은 머리라 정이 가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며 그가 사과를 와삭 씹었다.
“물론, 애초에 약초상 따위는 없으니 찾을 수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네가 약초를 구해온다는 걸 눈치챌 거야.”
“곧 끝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고, 슬슬 어느 쪽이든 움직일 테니 우리 같은 피라미는 빠져야지. 설마, 우리한테 의리를 바라지는 않을 거 아니야? 형이 말하면 좀 들어.”
비앙카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부정도 하지 않은 비앙카는 그대로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
“지젤 님, 어떠세요?”
지젤은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묶어준 미아를 향해 미소 지었다.
“좋아.”
반듯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있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지젤은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불안할 때마다 피어오르는 자학적인 생각과 과거의 잔재들은 그녀를 항상 힘들게 했다.
“이번에 새로 사신 루비가 정말 예뻐요.”
미아가 신이 나서 칭찬을 하고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빗질했다.
“사냥대회 같은 건 위험하기만 하고, 재미도 없으실 텐데. 안 가시면 안 되나요?”
지젤은 미아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심호흡을 했다. 왕궁 의원에 입김이 닿지를 않으니, 왕비가 얼마만큼 중독되었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왕비가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지젤은 조나단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도 결정 내리지 못했다. 생각과 생각이 혼란스럽다 못해 어지럽게 엮였다.
‘황태자는 즉위식 때문에라도 금방 돌아갈 겁니다. 평판이 나쁘기는 하지만, 크게 특별한 점은 없더군요. 황제가 되고 나면 한동안 바쁠 테니 왕국 쪽으로는 크게 관심 두지 않을 겁니다.’
황궁에 대해서도 알아온 달리아 백작은 모든 걸 지젤의 뜻대로 해줄 것처럼 굴었다. 지젤이 약속했던 대로 후작과 왕비, 그리고 왕자를 처리하고 사라진다면. 백작으로서는 그보다 완벽할 수가 없을 거였다. 그러나, 황태자가 계속 머무는 동안에는 곤란했다.
“미아, 찬물 좀 가져다줄래?”
미아는 오늘 아침부터 어딘지 차갑게만 구는 지젤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주방으로 향했다. 초조해 보이는 미아의 표정을 미처 보지 못한 지젤은 홀로 화장대 앞에 앉아 작게 소곤거렸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어쩌지.”
혹시, 만약에. 미하엘과 이안이 겹쳐 보이는 게 그녀가 미친 탓이 아니고. 정말로 황태자가 미하엘이라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거울 속에 비친 지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우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지젤의 덧없는 질문은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고 그대로 허공에 흩어졌다.
***
“넌 뭘 하고 싶어?”
나무에 기댄 채로 미하엘의 옆에 앉아있던 지젤은 뜬금없는 그의 물음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노래를 계속 부르고 싶은 거야?”
미하엘은 당황스러운지 입을 꼭 다물고 고민하는 지젤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계속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아버지가 반대하실 거야. 지금도 집에서는 노래를 못 부르잖아.”
“네가 하고 싶을 걸 얘기해.”
그의 말에 지젤은 깊고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하고 싶은 건, 노래를 부르는 건데.
“집시들처럼 자유롭게 떠돌면서 노래만 부르는 것도 해보고 싶고.”
음, 음.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이제 돌아다니기 힘들 테고. 아버지도 모셔야 하고 이엘리야 얼굴도 자주 봐야 하니까. 지젤이 꽤나 구체적으로 노후 계획을 늘어놓았다.
“나이 들면 지금처럼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고 싶어.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곳에서 하고 싶은 만큼 노래를 부르고 싶어.”
미하엘은 그녀의 재능을 썩히기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지젤이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젤은 자신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는 미하엘의 손길에 눈을 감았다.
“그럼, 그렇게 하자.”
애정이 넘치는 손길이 그녀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이러면 진짜 무슨 다람쥐라도 된 것 같잖아.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에 미소 지은 지젤이 그의 손에 뺨을 문지르며 물었다.
“너는?”
“나?”
“너는 뭘 하고 싶은데?”
미하엘은 지젤의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나는 너랑 같이 있고 싶어.”
“그래도 너도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야.”
지젤이 그를 재촉하며 고개를 기울이자, 미하엘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고개를 내저었다.
“있지, 지젤.”
“응?”
“나는 네가 행복해하는 게 좋아.”
지젤은 미하엘이 진중하게 내뱉는 문장을 들으며 그의 검은 눈을 마주 봤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긴장한 지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네가 웃고 즐거워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미하엘은 지젤이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걸 보면서 소리 내 웃었다. 지젤은 표정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감정에 충실한 그녀가, 그를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고 있자면 충만해졌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그를 안정되게 했다.
“네가 행복하다는 얼굴로 날 올려다보면,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아.”
오롯하게 내 자신이 되는 것 같아. 그렇게,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된다고 착각하고는 해. 누구와 비교되는 황태자도 아닌, 천성부터 까칠하고 못돼 먹은 황제의 아들이 아닌.
“널 사랑할 수 있는 내가 좋아. 네 덕분에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좋아졌어.”
“너 진짜.”
지젤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오르자 미하엘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나이 먹을수록 못하는 말이 없어지는구나.”
대체 어디서 배워오는 거야? 지젤이 얼굴을 감추기 쉽게 품을 내어준 그는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혀를 짓씹어 웃음을 참았다.
지젤은 그런 그의 품에 파고들어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듯 몸을 숨겼다. 미하엘은 그런 지젤을 놀리고 싶은 충동을 조용히 참아냈다. 지젤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를 설레게 만들었다. 내 사랑스러운 지젤. 감정에 솔직하고, 용감한 내 사람.
그는 그래서 지젤을 황궁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거기서 그녀를 남들 기준대로 깎아내리고, 다듬어 세워놓고 싶지 않았다. 거기서 지젤은 상처받을 게 분명했고, 그를 원망할 터였다. 아니, 착한 그녀는 그가 아니라 스스로를 원망하다 메말라갈지도 몰랐다.
해서 그는 그깟 황좌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으며, 잊을 수 있었다. 지젤은 그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
평소와 같은 새벽, 서재에 앉은 다이한은 맞은편 지젤의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고 손에 쥔 서신을 내려놓았다. 그는 지젤이 멍하니 책을 바라보기만 하는 걸 보면서, 찻잔을 들었다. 찻잔을 들어 씁쓰름한 차를 머금어 삼켜낸 그는 지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힘들면 쉬어.”
그의 권유에 정신을 차린 지젤이 고개를 작게 젓더니 책장을 넘겼다. 그녀의 붉은 머리가 살랑거렸다.
“책 내용이 어려워서 잠깐 생각을 좀 한다는 게-.”
“하루 정도 쉰다고 이상한 일 아니야.”
다이한이 다시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지젤을 보고 눈썹을 까딱였다.
“아무도 너에게 책 읽기를 강요한 적 없으니 쉬어.”
“괜찮아요, 잠깐 한눈판 거예요.”
그렇게 말한 지젤이 눈을 부릅뜨고 책에 얼굴을 파묻는데, 초점이 묘하게 엇나가있었다. 그걸 본 다이한은 울컥 솟아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누구 생각을 하기에. 유치한 분노를 삼킨 그가 다 비운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까딱였다. 지젤이 그걸 무시하고 책에 집중하자 그는 결국 손을 뻗었다.
“아-.”
지젤의 오른팔을 훅 잡아당긴 다이한은 근래 더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마저도 본인의 탓인 것 같았다.
“가서 잠을 좀 자.”
지젤은 평소보다 힘을 주지 않고 있는 다이한의 손을 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그가 재차 말했다.
“푹 자면서, 사냥대회 때 쓸 체력을 비축해.”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해. 그의 말을 들은 지젤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을 덮고 그대로 서재를 나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지젤을 끝까지 바라보던 다이한은 문이 닫히자 한숨을 뱉었다. 혼자 남은 그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그와 그녀의 관계는 너무 엉킨 나머지 이제는 풀 수 없는 실타래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