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의원이 죽기 직전 만난 사람이 지젤이다?”
“예, 지젤 님이 방문한 날 죽었습니다. 자살은 아닙니다. 목에 남은 자국을 보면, 밧줄을 뒤로 매 목을 조른 타살흔입니다.”
자살흔이라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만 밧줄 자국이 남아요. 제인에 세심하게 이안에게 설명했다. 이안은 그런 제인의 말에 놀라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젤이 의원을 죽일 이유가 있나?”
제인은 지젤이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데도 덤덤한 그를 보며 살짝 실망했다. 그럴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말이지. 놀라는 시늉이라도 해주지. 아마 이안은 지젤이 그를 찔러도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 하며 지젤을 위로할 것 같았다.
“계속해서 정기검진을 받고 있었으니, 뭔가 숨기려 하셨다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어떤 걸 숨기려고.”
이안이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리는 말에 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좀 더 알아봐야 했다.
“지젤 님이 가까이 두는 하녀 중에 한 명이 약초상을 거의 매일 만나고 있습니다. 심신 안정을 위한 찻잎을 구매하는 거라는데, 그것도 좀 수상해서 약초상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제인이 도널드가 알아본 일들과 자신이 직접 움직인 것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바르한 자작과 따로 연락하는 사이신 것 같습니다. 물론, 투자 건 때문일 수도 있지만- 바르한 자작이 원래 귀족가 태생은 아닙니다. 작곡을 하는 사람이었고, 아이 없는 자작가의 양자로 들어갔다더군요.”
제인의 설명을 들은 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번에 테라스로 불러들이던 그놈인가?
“저하.”
제인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지젤이 뭔가 거대한 걸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지젤 님은 계속해서 은밀히 달리아 백작과 접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달리아 안나 왕비의 친부?”
제인의 말에 이안은 그대로 어깨를 굳혔다. 지젤이 기억을 잃었다면 출생에 관해서도 알지 못할 텐데? 후작이 절대 이야기해줬을 리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왕비와의 문제로 귀찮아지기만 했다. 제인은 그런 이안을 살피며 우려를 표했다.
“이상하게 지젤 님과 관련된 일들은 어그러지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어색한 점들이 많습니다.”
도널드의 말에 의하면 후작 부인은 저택 뒤에 묘를 만들어놓고 슬퍼할 정도로 가족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만약에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지젤이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걸 위해 움직이고 있다면.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기억을 잃은 척할 수도 있었다.
“그럼 날 알고도 모른 척한다?”
그걸 빠르게 알아들은 이안은 차라리 지젤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길 진심으로 빌었다. 눈앞에 빤히 두고도 외면하는 거라면, 그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정말로 그는 두 번이나 외면받고 견딜 자신이 없었다.
***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가을 사냥대회 참석에 있어 지젤은 고심하다가 참석하기로 했다. 후작과 황태자의 갈등이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는 만큼 예의 주시하는 편이 나았다. 괜히 가서 그 많은 귀족들과 왕비 앞에서 싸움이라도 하면 추문에 곤혹스러워지는 건 이쪽이었다.
“이건?”
그러나, 황태자가 입을 옷까지 고르게 될 줄은 몰랐던 지젤은 대놓고 하품을 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조나단도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졸리단 말이야.”
“쉿, 그래도 예의상 어울린다 박수는 치셔야죠.”
제인 경이 지젤 대신 대답하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조나단이 착하게도 짝 소리가 나게, 딱 한 번 박수 치고는 다시 졸리다며 눈을 끔뻑거렸다. 지젤은 잠투정을 부리는 조나단의 눈가를 부드럽게 닦아주며 제인을 올려다봤다.
“황태자 저하께서는 뒤끝이 기십니다.”
제인이 일러주는 말에 지젤은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흰색 정복을 입고 있는 이안을 쭉 훑었다. 잘 어울렸다. 잘 생기고 훤칠하고 몸이 좋다 보니 뭘 입어도 잘 어울렸다.
“그래서, 저희를 앉혀놓고 고문하시는 이유가 뭐라고요?”
“그 사냥터에서 네 눈을 사로잡을 사람이 나 이외에 있어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저보고 고르게 한다고요?”
“네 취향은 확고하잖아.”
내 취향이 확고한가? 지젤은 아까부터 묘하게 이쪽을 살피는 이안의 시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물끄러미 보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이상했다. 마치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사냥 직전 맹수처럼 이상하게 고양된 어떤 감정도 보였다. 그건 제인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흰색 옷 입는 걸 좋아하잖아.”
이안의 말에 지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빤히 보던 이안은 슬금슬금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하엘이 흰색 옷을 입는 걸 좋아했었다. 고급스러운 흰색 옷감이 흑발과 잘 어울리는 게 아름답다고 떠들고는 했었다.
“아닌가? 저번에 정복 입은 걸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젤이 이안을 향해 답하고는 조나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안은 그녀의 손가락에 검은 머리카락이 감기는 걸 보면서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아니겠지, 내가 눈앞에 있는데 네가 계속 외면할 리가 없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지.
이대로 우리는 다시 사랑에 빠져서, 황국으로 손잡고 돌아가면 되는 거야. 그 후작 새끼는 내가 죽여버리면 되니까. 이안은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래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새어 나오는 불신과 원망이 숨겨지지는 않았다.
이안과 지젤 사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
“비앙카, 뭐 하나만 알아오렴.”
“예.”
“5년 전에 죽은 평민인데, 이름은 미하엘이고. 내 친정의 화재에 휩쓸려 죽었어. 아니, 죽은 게 맞는지. 그 가족들은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와.”
비앙카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말을 줄줄이 쏟아내는 후작 부인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곤혹스러워 보였고 입술까지 퍼렇게 질려서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누나가 하나 있고,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졌어. 상인의 아들이었고, 겨울마다 왕국에 왔으며 봄부터 가을까지는 황국에 있었으니.”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며, 지젤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다 느꼈다. 자신이 뭔가 홀리거나 미친 게 아니라면, 이안은 너무나 미하엘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누나 이름이 네 글자였는데-,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 시신은 어디 길가에 버렸다 들어서 본 적이 없는데, 죽은 게 분명하기는 할 거야.”
“지젤 님.”
지젤은 비앙카가 자신을 부르는 걸 들으며 심호흡을 했다. 이건, 자신에게 복수하러 온 미하엘의 동생이 아니고서는-. 아니, 미하엘이 황태자일 수도 있나? 그게 가능한가? 미하엘이 살아있다면 왜 한 번도 날 보러 오지 않았지? 미워서? 근데, 지금은 왜-.
“달리안 백작이 황태자에 대해 알아봐 주겠다고 했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건지 가서 확인해줘.”
지젤은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절로 비명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초면부터 화를 냈던 황태자가 떠올라서 지젤은 축 어깨를 늘어트렸다.
***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저녁이었다. 지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이한은 그런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굉장히 차갑고 딱딱한 저녁 식사 자리였으나, 실상 둘은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냥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다이한이 와인 잔을 들고 지젤에게 묻자, 그녀는 조용히 손에 쥔 식기를 내려놓았다. 너랑 황태자를 감시하러 간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지젤은 그걸 말하지 않았다.
“제가 참가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대는 저택에 남아있는 게 좋겠는데.”
다이한은 지젤이 사냥대회에 참가한다는 게 껄끄러웠다. 그는 지젤에게 피를 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황태자와 마주치는 일을 줄이고 싶었다. 황국에 알아보니 즉위식을 앞둔 황태자는 다이한이 내쫓지 않아도 곧 끌려갈 분위기였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벌면 예전처럼 이 아슬아슬한 일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젤을 기억을 되찾지 않는다면 말이다.
“올해는 공작 부인과 자작 부인까지 참가하는데, 제가 빠지면 비웃습니다. 입상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자리는 지켜야죠.”
“정신없고 소란스러운 대회다 보니 시간만 낭비될 터야.”
“그럼에도 가보고 싶네요.”
지젤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번에 다이한 앞에서 눈물을 보인 다음부터 그는 눈에 띄게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적절하게 이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선을 넘지 않으려 했다. 그에게 냉정하게 굴지도, 차갑고 딱딱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의기소침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는 했다.
“그럼 마차를 끌 말을 새로 사도록 해.”
와인 잔을 내려놓은 다이한이 집사에게 손짓하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마차? 지젤은 다이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산 중간지점까지 올라가야 하니 당연히 말을 타야 할 텐데.
“말을 타는 게 아닌가요?”
“체력적으로 못 버틸 테니, 마차를 재정비하고 말을 두어 마리 더 준비해.”
“귀부인들 중에서도 마차를 타는 사람은 없을 텐데, 저만 너무 유난 떠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그럼 모든 귀부인들에게 마차를 보낼 테니까.”
다이한은 지젤이 또 쓰러지거나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제발 그저 하라는 대로 해.”
정상까지 3일이 걸리는 거대한 산의 중간까지 가려면, 몇 시간을 족히 타야 할 텐데. 지젤은 못 견딜 게 뻔했다. 그는 그녀에게 그런 강행군을 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가 한숨 섞어 하는 말을 들은 지젤은 더 이상 다이한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본인 돈을 땅에 뿌리겠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