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지젤은 저번에 미하엘이 이마에 입 맞춘 이후로 연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어떤 기회냐면, 이쪽도 입술을 한번 비벼볼 기회? 지젤은 연신 자신의 입술 상태를 확인했다. 내가 기분 좋았던 만큼 좋아해야 할 텐데. 어떤 타이밍에 해야 하는 걸까? 저번에 미하엘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데 너무 어렵다. 그렇지만 받는 사람이 그렇게 행복하다는 걸 미하엘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네 애정만큼 나도 널 정말 좋아해. 그게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지젤!”
그녀의 걱정이 점점 커지는 사이 미하엘이 양손에 쿠키 박스를 조심스레 들고 나타났다. 지젤은 종이 박스를 애지중지 들고 오는 미하엘의 무릎에 흙먼지가 묻어있는 걸 보고 쪼르르 그에게 달려갔다.
“너 무릎이 왜 그래?”
꼭 내 동생 이엘리야가 어디서 엎어지고 온 다음 같잖아. 지젤의 말에 미하엘이 전혀 부끄러움 없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양손에 들고 조심히 오다가 나무뿌리에 걸려서, 근데 쿠키는 무사해.”
“아니, 미하엘. 너 곧 있으면 스무 살인데 쿠키 때문에 넘어졌다고?”
흰 옷이 엉망이 되었잖아.
“넌 흰색 옷 입은 게 제일 예쁜데.”
지젤이 심각하게 미하엘의 정신연령에 대해 생각해보는데, 미하엘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말했다.
“너 많이 먹으라고.”
초코쿠키 좋아하잖아. 그의 말에 지젤은 아까 고민하고 연습했던 모든 걸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렸다. 그녀는 양손이 쿠키에게 잡혀있는 미하엘의 얼굴을 끌어 내리고는 그의 뺨에 꾹 입술 도장을 찍었다. 정말 살짝 자국이 남았다가 사라질 정도로 세게 입 맞춘 지젤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되게 민망하구나.
미하엘은 갑자기 공격당한 자신의 뺨에 남은 감촉이 흩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젤을 내려다봤다.
“초코쿠키 많이 가져와서?”
이러면 주방장이 하루 종일 쿠키만 구워야 할 텐데. 나는 쿠키를 수레로 끌고 와야 할 테고. 그가 부끄러움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지젤의 시선을 집요하게 쫓으며 말했다. 그 요점을 못 잡는 말에 지젤이 발끈했다.
“아이씨, 너 바보야?”
뭐 때문에? 내가 나이가 이제 열아홉 살인데, 초코쿠키 때문에 뽀뽀하겠냐?
“내가 그럼 그깟 과자나 몇 개 주면 아무한테나 뽀뽀해주는 줄 알아? 어?”
“그럼 왜?”
지젤은 순진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민망한 걸 물어보는 미하엘을 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걸 꼭 물어봐야 해? 너 진짜 바보지.”
손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채로 투덜거리는 지젤을 보며 미하엘은 소리 내 크게 웃었다.
“바보 소리 듣고도 이렇게 행복한 걸 보니.”
지젤은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예쁘게 접히는 게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 다 꼬실 생각이야? 얼굴을 가리고 다니든가 해야지.
“나 진짜 바보 돼버렸네.”
미하엘이 지젤을 향해 양팔을 벌리자 반사적으로 지젤이 그를 마주 안았다. 반복된 행동에 학습한 습관이었는데, 그가 그녀의 귀에 작게 소곤거리자 그녀는 곧바로 안긴 것을 후회했다.
“책임져.”
“이-.”
귀에서부터 올라온 소름이 오스스 피부를 타고 올라와서 지젤은 눈을 꾹 감았다가 퍼뜩 든 생각에 덥석 미하엘의 멱살을 잡았다.
“너 이런 식으로 다른 여자도 꼬시는 건 아니지?”
아주 쓸데없이 능숙해? 그녀의 추궁에 미하엘이 눈을 감고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맹세하건대, 다른 사람들은 내게 의미가 없어.”
올곧게 자신을 마주하는 검은 눈이 주는 무한한 신뢰에 지젤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어쩐지 너무 기뻐서 눈에 눈물이 고여왔다. 그게 낯설고 껄끄러워서 지젤은 미하엘의 품에 파고들었다.
***
주방에서 당근 껍질을 까던 도널드는 서신으로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헐레벌떡 달렸다. 뭐든 똑같이 해주겠다고 했어? 그럼 합방 다음 날은 어떻게 되는 거지? 미친놈은 진짜 뭐든 할 것 같은데! 원래는 발 들이면 안 되는 후원을 통해 가로질러 저택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여야 했다.
“요즘 날씨가 좋아요.”
후원 안쪽에서 들리는 말소리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더 안쪽의 안쪽으로 들어서던 도널드는 이내 몸을 바짝 움츠렸다. 소리의 근원지를 지켜보고 있는 후작 때문이었다. 다이한의 찢어진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본 그는 아주 신중하게 고개만 틀어 움직였다. 명백하게 후작은 슬퍼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황태자한테 물어뜯겼다는 게 진짜인가 봐.
“정말 이엘리야, 네가 너무 좋아하던 날씨야. 구름도 없이 푸른 하늘 있잖아?”
도널드는 마치 정신 놓은 사람처럼 나무 밑에서 허공에 대고 떠드는 후작 부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그리고 그는 나무 밑에 봉긋한 흙더미들을 발견하고 작게 탄식했다.
“요즘 들어 너무 보고 싶어. 볼 수만 있어도, 아니 살아만 있어도. 만나지 못해도 위안이 되고 숨통이 트였을 텐데.”
지젤이 나무에 폭 얼굴을 기댄 채로 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젤은 다이한이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 계속 진심을 섞어 말을 내뱉었다.
“계속 꿈을 꿔, 보고 나면 너무 마음이 아파서 보고 싶지 않은데.”
도널드는 조용히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여동생과 아버지 무덤을 후작저 뒤에 마련해 놓았을 줄이야. 보통 귀족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다이한이 절망스러운 표정을 한 채 숨을 들이마시다가, 손으로 얼굴을 덮는 걸 보면서 덩달아 얼굴을 구겼다.
“근데 왜 무덤이 3개지?”
누가 또 죽었었나. 하여튼, 이 저택은 모든 게 다 이상했다.
***
답답한 마음에 디저트 가게에 앉은 스텔라는 자신의 남편이 벌인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울상을 지었다. 그다지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결혼했는데, 이러다 같이 처벌받게 생겼다. 그녀는 타르트를 씹어 먹으며 한탄처럼 한숨을 쉬었다.
바르한 자작은 이중장부를 써 채권을 사들이고, 무역을 핑계로 자금을 세탁해 가명계좌로 집어넣고 있었다. 후작은 자작가를 멸문시킬 게 분명했다. 차라리 먼저 왕궁에 가서 고발하거나- 대체 어째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스텔라?”
자신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휙 든 스텔라는 조나단의 손을 잡고 있는 지젤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고급스러운 초록색 드레스가 붉은 머리와 조화롭게 얽혀 그녀를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언뜻 보면 이십 대 초반 같기도 했다.
“아, 지젤 님.”
“왕자님께서 타르트를 드시고 싶다 하셔서 왔는데, 어쩜 이렇게도 만나네요. 약속이 있나요?”
“그건 아니고-, 제가 그저 혼자.”
스텔라는 더듬더듬 다음 말을 고르지 못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엘로이 백작부터 소귀족들도 목돈을 투자한 마당에 그들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 남편은 사기꾼이랍니다. 훌쩍,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그녀가 서럽게 울상 짓자 지젤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저거!”
조나단이 지젤의 손을 놓고 진열된 타르트를 향해 달려가자 기사들이 줄줄이 그 뒤를 쫓았다. 후작가의 기사들만이 지젤의 뒤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호위들이 떨어지지 않는구나. 지젤은 이안이 저택에 와서 다이한에게 패악질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시 후작과의 신뢰 쌓기에 집중해야 하는 지금, 그건 그녀에게 패악질밖에 되지 않았다. 그의 분노 밑에 깔린 다정한 면모를 모를 수는 없어서 지젤은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이안은 어쩐 이유에선지 진심으로 이쪽을 걱정하고 있었다. 계속 미하엘과 이안이 겹칠수록 그녀 안의 의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둘이 같은 사람이 아닐까? 근데, 그게 가능해? 어쩌면 내가 정말로 미쳐서 그렇게 생각하고 위로하는 게 아닐까. 비겁하게 마무리를 앞두고 본능적으로 도망치려는 거 아니야? 감정적으로 한계가 온 지젤은 제일 손쉽게 자학부터 시작했다. 내가 문제가 있어서 이 모든 상황이 꼬이기 시작한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어.
“지젤 님-.”
스텔라가 그런 지젤을 어두운 상념에서 꺼내줬다.
“스텔라, 무슨 일이 있나요?”
“그게, 지젤 님. 저는 말이죠-. 정말로 몰랐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그럴 머리도 못 되고 겁도 많아요.”
지젤은 덥석 테이블에 올린 자신의 손을 간절하게 붙잡는 스텔라를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인데요? 쉬, 괜찮아요?”
“맙소사, 지젤 님. 사업 말인데요-. 그게, 정말로 저는 억울합니다. 진심으로 아무것도 몰랐어요.”
스텔라는 계속해서 자신이 상인의 딸로 숫자를 조금 볼 줄은 알지만, 그런 건 꿈에도 꾼 적이 없다. 감히 그런 계획은 짜거나 실행에 옮길 배포도 되지 못한다고 반복했다. 그걸 가만히 듣던 지젤이 주위를 슬쩍 살피며 말을 정리했다. 결론은 사업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스텔라, 이렇게 고민할 게 아니고 우리 자작님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봐요. 어찌 되었든 스텔라가 본 게 있다는 거잖아요?”
“제가 얘기했다가 괜히-”
스텔라가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동요하는 걸 보면서 지젤은 그녀의 손등을 토닥여줬다.
“우리 같이 가서 이야기해봐요. 나는 자작님과 스텔라 둘 다 정말 믿고 있어요. 둘 중 한 사람이 거짓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정말로- 감사해요. 저 혼자서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한참을 끙끙 앓았는데-.”
“당장은 사냥대회 준비로 어렵고 날짜를 정해서 내가 자작가에 가도록 할게요.”
스켈라는 구원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지젤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래, 차라리 이대로 후작 부인이 나서준다면 혹여 정말 일이 잘못되더라도 이쪽은 피해자라는 걸 입증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모든 게 다 자신의 오해라면 정말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 이중장부들은 가짜일 수가 없었다.
“괜히 증거도 없이 이야기했다가 제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까 걱정했는데. 어쩜, 지젤 님이 절 이렇게 믿어주시니 너무 감사해요.”
“나는 스텔라 말이 거짓말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지젤은 눈물을 글썽이는 스텔라를 마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로 가식 없이 진심으로 지젤은 스텔라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