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45)화 (45/135)

45.

손목에 멍이 들겠다고 생각할 때쯤 다이한은 입술을 떼어냈다. 맞닿았던 살덩이가 떨어지자마자 지젤은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 마요.”

지젤이 으르렁거리듯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걸 들은 다이한이 마찬가지로 살벌한 분노를 담아 비아냥거렸다.

“왜? 마음이 변했나?”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지금 여기서는 싫어요.”

지젤이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데, 다이한이 그런 그녀의 턱을 아프게 잡아 쥐어 누르며 화를 냈다.

“황태자가 있어서 싫다.”

“뭐요?”

“이 꼴 보여주기가 부끄럽기라도 한가 본데.”

지젤은 자비 없이 힘을 쓰는 다이한이 새삼 역겨웠다. 원래 이런 사람인데 그간 너무 조용하고 신사적이어서 내가 착각했지. 다이한은 자신을 향한 혐오를 숨기지 않는 지젤을 보며 그녀에게 현실을 일러줬다.

“넌 내 아내야.”

다이한은 절박했다. 이딴 게 아니면 그녀를 붙들어 놓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지젤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가 계속 떠올랐다. 혐오와 경계 어린 표정, 이쪽에 닿기도 싫어하는 거리감.

“넌 다니엘 후작 부인이라고.”

그는 그녀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너무 잘못 시작해서, 이미 다 망쳐버려서 이거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 지옥이 다시 반복되더라도 다이한은 그녀를 놓아줄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충분히 괴로웠다. 지젤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는 공간이 커질수록.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지젤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처절하게 와닿았다. 후회가 좀먹은 자리에는 애정을 갈구하는 이기적인 욕망이 자라났다. 희망이, 언젠가는 다 잊을지도 몰라. 넌 다정한 사람이니까 무지한 나를 이해해주고 남을지도 몰라. 그런 미약한 희망에, 그게 거짓인 걸 알면서도.

“후작님,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다이한이 일깨워주는 말을 들으면서, 지젤은 소리 내 웃었다. 동시에 그녀의 푸른 눈에서 주르륵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그건 본 다이한은 자신의 목까지 물이 차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슬픔을 눈앞에서 목도하니 명치가 아리고, 목이 졸려왔다.

“내 이름 뒤에 붙은 다니엘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요. 나도 알아요. 내가 지젤 다니엘인 걸.”

5년 전 그날 이후로 지젤이 처음 서럽게 우는 걸 보면서, 다이한은 그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나 스스로도 너무 잘 알아요.”

그는 말없이 지젤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지젤을 감싸 안고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널 이렇게 망쳤고, 돌이킬 수 없으니 이대로 평생 네게 죗값을 갚아가며 함께하면 안 될까. 정말 이기적이고 몹쓸 생각이었다.

***

한센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게 분명한 자신의 주군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가 그리 어려운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해서, 어쩌면 또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해서 옆에 뒀는데 뭐가 그렇게 항상 부족하신 걸까? 그는 단단한 사람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가 여자 하나에 휩쓸려서 고달프게 사는 걸 이해하기 힘들었다.

“조지 콜튼은 아직까지 큰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언제 돌아가는 거지?”

다이한은 이 모든 게 이안만 돌아가면 끝나리라 확신했다. 그럼, 한동안은 좀 힘들어하겠지만 지젤은 다시 안정을 찾을 테고.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황국 쪽 소식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다만, 황태자가 공적인 용무가 아닌 개인적인 의지로 여기 남으려는 것 같습니다.”

다이한은 고요하게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매만졌다.

“호위기사들에게 지젤과 조금도 떨어지지 말라고 해. 황태자랑 둘이 두지 말라고.”

“근데, 왕자님과 함께 계실 때는 왕궁 기사단과 황궁 기사단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저희 기사들이 거리를 두고 호위하는 편이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한센은 다이한의 말에 두 번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게 여태 다이한과 가장 오래 합을 맞춰온 그 나름대로의 비결이었다.

***

이안은 조나단을 보러온 지젤의 눈이 퉁퉁 부은 걸 가만 보면서 의심의 싹이 트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갑자기 기억을 찾은 건가? 아니면, 애초에-.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그렇게 뛰쳐나갈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그런 이안의 눈을 눈치챈 지젤은 애써 밝게 조나단에게 말을 걸었다.

“내일은 저희 밖으로 나갈까요? 왕자님 좋아하시는 타르트도 먹고?”

지젤과 이안 사이에 껴서 나란히 정원을 거닐던 조나단이 신나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니엘 부인도 같이 갈 거야? 좋아, 갈래!”

“왕비님께서 허락하시도록 조나단 님이 말씀 잘 해주세요.”

지젤은 조나단이 떼를 쓰면 어쩔 수 없이 허락할 마가렛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본인이 나갈 수는 없으니 마냥 반대하지는 않을 터였다. 벌써부터 신이 난 조나단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목이 긴 그녀의 장갑이 손등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정말 순식간이었지만 하얀 손목에 퍼렇게 남은 멍을 본 이안이 그대로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뭐야.”

“네?”

지젤은 그가 뭘 묻는 건지 알면서도 급하게 장갑을 끌어 올리는 데 집중했다. 이안은 두 번은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이미 눈으로 본 게 뭔지 확실하게 결론 내린 그는 그제야 짙은 화장으로 가린 지젤의 얼굴을 확인했다. 입꼬리가 찢어지고 턱 밑에 든 푸른 멍이 그의 이성을 갉아 먹어치웠다. 멍청하게 그걸 지금 눈치채?

“오늘은 내가.”

초점이 나간 이안의 표정을 보면서 제인은 급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왜? 뭐가 문제였는데? 나 못 봤어.

“급한 볼일이 있으니, 내일 보지.”

이안이 정말 급한 볼일인지 거칠게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사라지는 걸 보면서 지젤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젤은 이제 이안에게 더욱 견고하게 벽을 쌓기로 마음먹었다. 다이한의 말처럼 그녀는 그의 아내였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복수의 불씨를 꺼트리지 말아야 했다.

우울하게 미소 짓는 지젤을 확인한 제인은 급하게 씩씩거리는 황태자를 쫓아가며 다른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뭔데? 그러나, 그들도 이유를 알지 못해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

“이 무슨 횡포입니까!”

한센 경이 다짜고짜 저택에 들이닥친 황태자에게 큰소리를 치며 가로막았지만 제인은 그 꼴을 두고 보지 않았다. 우리 또라이님, 욕을 해도 내가 했다.

“일개 기사 따위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허면, 황태자면 왕국의 후작저를 이리 헤집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무표정한 제인과 황국 기사단들이 검을 빼 들고 큰소리를 내는 한센과 후작 기사단을 위협했다.

“윗분들 말씀 나누시는 자리에, 이런 잡음이 들어가면 쓰나.”

그녀가 한센의 목을 겨눈 채로 고개를 까딱이자, 한센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수틀리면 베어버릴 것 같은 태도에 기가 죽었다. 그도 보통 밀리지 않는 기사 중 하나였는데, 눈앞의 여자는 어딘지 범상치 않은 광기가 느껴져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이안은 그따위 것들에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다이한이 있는 집무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름 묵직한 나무 문짝이 너덜거리며 열렸다. 다이한이 인상을 확 찡그린 채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이안이 더 빨랐다. 이안은 단숨에 책상을 넘어서 의자에 앉아있는 다이한을 그대로 바닥에 엎어트렸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인지, 황태자께서는 설명을 좀 하셔야겠는데.”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간 다이한이 이안을 노려보자, 이안이 팔로 그의 목을 짓누르며 소리 내 웃었다.

“설명은 네가 해야겠는데?”

다이한이 힘으로 이안을 엎어뜨리려 했으나, 광기가 희번덕이는 눈으로 왼손에 단검을 꺼낸 이안이 그의 목을 눌렀다. 날카로운 쇠붙이 끝이 살을 파고드는 익숙한 감촉에 다이한은 움직임을 멈췄다.

“똑바로 잘 들어.”

다이한이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오른팔로 그의 목을 조이며 이안이 왼손을 움직였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단검 손잡이로 다이한의 오른 손목을 내리찍었다.

쿵-!

“윽-.”

다이한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신음이 터져 나갔다. 그러자, 이안이 아직 멀었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 광인 같아서 다이한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젤을 아프게 해?”

말을 뱉은 이안은 정말로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서 잘 보이지 않았기에, 의식적으로 눈을 크게 뜨려 노력해야 했다.

“앞으로 그 몸에 함부로 손댈 생각 하지 마.”

그가 단검을 여전히 쥔 채로 다이한의 턱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가 지젤에게 손대면 말이야.”

제인은 후작가의 기사들을 제압한 상태에서 이안의 다음 말이 궁금해서 몸을 기울였다. 드디어 죽이고 끝내나요? 그녀의 개인적인 염원이 담겨있는 바람이었다.

“죽이시게?”

다이한이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눈을 까딱이자 이안이 크게 소리 내 웃다가 얼굴에서 표정을 싹 지워냈다.

“아니, 내가 너한테 똑같이 해줄 거야.”

그의 말을 모두가 이해하기도 전에 이안이 다이한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말 그대로 아랫입술이 피가 나고 너덜거리도록 물어뜯었다. 우득거리는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릿한 피 내음이 둘의 코끝에 퍼졌다. 이 역겨운 상황을 파악한 다이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이안은 더럽다는 듯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그에게 설명했다.

“못 할 것 같아? 아니, 난 똑같이 할 거야.”

제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미친놈은 진짜 그대로 갚아주고도 남을 놈이었다. 순식간에 턱이 피범벅이 된 다이한을 내려다본 이안이 한 번 더 못 박았다.

“그러니, 함부로. 감히 네 마음대로 아프게 하지 마.”

어차피 넌 죽어도 곱게 못 죽을 테니.

“살아생전 더러운 꼴 덜 봐야 하지 않겠어?”

이안이 다이한의 목을 한 번 더 세게 조르는 걸 뒤에서 지켜보던 제인은 한센이 놀라서 숨도 못 쉬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보통 우리 미친놈 처음 보면 반응이 이렇지. 제인은 어쩐지 한센이 조금 짠해서 그의 어깨를 검으로 토닥여줬다. 답지 않은 동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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