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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44)화 (44/135)

44.

갑자기 열린 만찬은 황태자가 개최했다는 것치고는 조용했다. 아무래도 왕의 죽음을 슬퍼하고 위로하는 게 목적이라 그런가. 제일 이상한 건 황태자의 태도였는데, 이안은 평소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이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닌 듯하지만,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과 묘한 거리 두기에 지젤은 찝찝했다. 다이한은 뭐가 그리 바쁜지 공작과 달리아 백작과 함께 얘기를 나누느라 이쪽과 멀어졌다. 아마 왕위계승 문제 때문일 것이다. 왕비가 몸이 나아진다면 다행이겠지만.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지젤은 바르한 자작이 능글거리며 다가오는 걸 보면서, 적당히 미소 지었다.

“자작님께서도 오늘 멋지시네요.”

드문 칭찬에 바르한은 눈을 휘어 웃어 보이고는 그녀에게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지젤이 그의 주위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스텔라 님은 무슨 일이 있나요? 요 근래 보질 못해서요.”

“그게 여기서는-.”

바르한이 어딘지 곤란한 듯 입을 꾹 다물고는 그녀를 향해 눈짓했다. 그걸 단숨에 이해한 지젤은 살짝 어지럽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는 바람 좀 쐐야겠네요. 어지러워서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듯 찍어낸 그녀는 그걸 그대로 샴페인과 함께 테이블에 올려놓고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에 들어서서는 살짝 커튼을 걷어놓은 지젤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스텔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자작이 들어오길 기다리면서 하늘을 보고 있던 그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저하.”

“속상하게, 꽤나 실망한 눈치인데.”

지젤은 공격적으로 이쪽을 살피며 눈을 가늘게 뜨는 훤칠한 황태자를 보고 고개를 떨궜다.

“바쁘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봅니다.”

“하.”

어이없다는 듯 웃음은 이안은 지젤이 일부러 테이블에 올려놓고 온 흰색 손수건을 허공에 흔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에 거칠게 쥐여주며 오른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미리 말해둘게.”

지젤은 손에 덩그러니 남은 구겨진 손수건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 지겹다는 태도에도 굴하지 않은 이안이 분노가 담긴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내가 후작과 네 사이를 잘 참고 있어서,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내 질투는 고약해.”

상상보다, 생각보다 더럽고 귀찮을 거야. 앞뒤를 안 가리거든. 이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섬세하게 넘겨줬다.

“그러니 다른 남자를 테라스로 불러들이는 일은 안 하는 게 좋아.”

지젤이 정확하게 뭘 하는 건지 멀리서 객관적으로 지켜보려던 시도에 처참하게 실패한 이안이 얄미운 그녀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경고했다.

“다음 날 아침에 눈 떠서 변사체 얘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지.”

이안의 검은 눈이 어둠 속에서도 이채를 띠며 빛났다. 그걸 가만히 올려다본 지젤은 손수건을 곱게 챙겨 넣으며 입을 다물었다. 대체 황태자가 왜 질투를 하는지 물으려다가, 또 좋아하느니 어쩌니 소리 하면 곤란해서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진짜 맞고만 있었던 거야? 마가렛이 뺨을 치면, 넌 칼을 들어야지.”

이안이 지젤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억제해뒀던 걱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붓지는 않았는데, 워낙 말라서 알 수가 있나.”

얼마나 세게 맞은 건데? 이안의 얼굴이 안타까움에 일그러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쪽이 마가렛의 뺨을 연달아 후려쳐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을 위한 복수지, 지젤을 위한 복수가 아니었다.

“왕비님께 칼을 들면 전 사형당할 겁니다.”

지젤이 조목조목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데, 이안은 짐짓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욱하는 성격 참지 못해, 마가렛을 죽여도 괜찮아.”

“그게 어떻게 괜찮아요?”

“내가 널 가방에 넣어서 도망갈 거니까.”

그녀는 이안의 말에 오류를 2개 발견했다. 지젤은 욱하지 않았다. 한 번도 자신이 욱하는 성격이라 생각해본 적 없었기에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 큰 성인인 절 어떻게 가방에 넣으시려고요?”

“곱게 침구에 감싸서.”

“절 열 살짜리 어린애로 보시는 거예요? 가방에 어떻게 들어간다는 건데요.”

뭐 토막이라도 내시게요? 지젤이 정말 이상한 정신세계를 가졌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이안은 여전히 진지했다.

“이렇게 말라서는 충분히 들어가.”

지젤은 저번부터 자신을 말라깽이 취급하는 이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식사를 잘 못 해서 마른 편이기는 했지만, 가방에 넣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를 뼈다귀쯤으로 보는 건가? 눈에 문제가 있나? 그래서 이렇게 좋다고 쫓아다니는 거 아니야?

“발목은.”

그녀가 이안의 안구 건강에 대해 걱정하는데 이안이 그녀의 발목 상태를 물어왔다.

“이제 괜찮아요.”

지젤은 이안과는 대화할수록 묘하게 엉겨서, 티격태격하게 된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휙 돌렸다. 이안이 그런 지젤을 보며 테라스 테이블에 놓인 치즈와 짭짤한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배는 안 고파?”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저만 보면 그렇게 밥을 챙기세요?”

“내 앞에서 뭘 제대로 먹은 적이 없어서 불안해.”

이슬만 먹고 사는 요정일까 봐. 그게 거짓이 아닌지 음울한 표정을 하는 이안을 올려다본 지젤은 왜 항상 이렇게 휩쓸리는지 의문을 가지며 그가 내민 접시의 쿠키를 집어 들었다. 단순히 저딴 소리를 그만 듣고 싶은 걸까 싶기는 한데. 미하엘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 생각하니 뭐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황태자는 미하엘이 아닌데.

“마실 것 좀 가져다줄까?”

“어차피 술 많이 먹지도 못해서 괜찮아요.”

이안은 기계적으로 쿠키를 씹는 지젤의 뺨을 검지로 툭 치며 미소 지었다.

“오물거리는 게 도토리 잔뜩 찾은 다람쥐가 따로 없어.”

그의 말에 지젤은 그대로 숨을 멈추고, 굳어버린 목을 애써 움직였다.

“뭐라고요?”

“뭘 먹을 때면, 볼이 오동통해지는 게 다람쥐 같다고.”

지젤은 본인이 다람쥐 상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거울만 봐도 그러했고, 아무도 그녀에게 다람쥐 비슷한 청설모 얘기도 한 적이 없었다. 갑자기 목이 턱 막히고, 시야가 흐려져서 지젤은 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기가 어려워졌다. 장담하건대, 당장 허리만 숙이면 속에 있는 모든 걸 게워낼 수 있었다.

“지젤?”

왜 하필? 지젤은 입에 든 밀가루와 설탕 반죽이 역겹게 느껴져서 구겨진 손수건에 그걸 뱉어냈다. 먹고 싶지 않았다.

‘귀여운 내 다람쥐.’

“아니, 싫어요. 오지 마.”

“왜? 괜찮아?”

이안이 걱정스레 뻗어오는 손이 두려워져서 그녀는 목을 거칠게 뒤로 빼냈다. 그때 산에서 느꼈던 선선한 바람과 다정한 눈빛, 감미로운 목소리와 부드러운 감촉들이 생생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 되도 않은 유치한 애칭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해줬었는지를 알게 해서, 근데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게 숨 막혀서 지젤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지젤,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야, 잠깐만-. 가까이 오지 마요. 이제 다 끝났는데 이러면-.”

이안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지젤의 표정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 여기 와서 처음 보는 절박한 표정에 그는 감히 다가설 수가 없었다. 지젤이 그런 이안을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아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뜰 수가 없었다. 왜 우는지 알 수도 없어서, 지젤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 도망쳤다.

***

연회장을 달려 빠져나온 지젤은 왕궁 중앙의 분수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왜? 일부러 벌을 주는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한 지젤은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연신 훔쳐내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헉헉거렸다. 사실, 정말 별거 아닌 말이었다. 평소라면, 다람쥐라니 웃기다며 넘어갔을 일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지젤이 스스로를 다독이며 오른손으로 눈을 가렸다. 시야가 아예 어두워지자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분수대 주위 흰색 대리석 기둥에 이마를 기대고 선 지젤이 연신 중얼거렸다.

“다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더 참으면-.”

그녀가 그렇게 본인을 안심시키려 애쓰는데, 누군가 힘으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놀란 지젤의 입에서 헉-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이내, 그녀는 자신을 쫓아 나온 게 이안이 아니고 다이한이라는 사실에 안도해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왜.”

다이한이 잇새로 짧은 단어를 내뱉고는 혀를 짓씹었다.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안심하는 표정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지만, 전부 할 수가 없는 말들이었다.

“별일 아니에요.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 거기 있을 수가 없었어요.”

지젤이 억지로 웃음을 머금으며 변명하는데, 다이한은 그걸 보자 그녀가 아닌 본인이 토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지젤은 그에게 진실된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았다. 황태자를 대할 때와 태도가 다른 것도 그래서였다.

“테라스에서 황태자랑 무슨 짓을 했기에.”

지젤은 자신이 뛰쳐나오고, 뒤따라 나왔을 이안을 생각하고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변명조차 못 하고 침묵이 흐르는 그 잠깐, 다이한의 이성의 끈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뱉고는 끊어졌다. 그는 단숨에 한 손으로 지젤의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입을 맞췄다. 지젤이 놀라서 몸을 뒤로 물리는데 다이한은 그걸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힘으로 그녀의 턱과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싶었고, 마찬가지로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의 굳게 다물린 입술 사이를 그의 혀는 거침없이 비집고 들어섰다. 엇갈린 마음이 서로를 향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지젤이 양손으로 온 힘을 다해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러나, 애정 아닌 분노를 표출하는 다이한은 그녀의 미약한 힘으로는 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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