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선을 넘지 마시라 경고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이한의 단호한 말에 마가렛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그 계집이 뭐라고. 이상한 집착부터 지금까지 내보이는 독점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그래봤자, 콜튼이 어제부로 해결하겠다고 했으니 괜찮았다. 후작을 공격했던 괴한을 잡지 못했으니, 어쩌면 후작 부부에게 원한이 있는 누군가가 행한 살인으로 자연스럽게 마무리될 수도 있었다.
마가렛은 다이한이 막상 지젤을 잃고 나면 덤덤할 것이라 예상했다. 지금은 단지 체면 차리느라 본인 부인을 챙기는 거지. 당장 지젤이 없어지고 나면,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이라 믿었다.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단언하나 봅시다. 분명 후작은 그년 때문에 후회할 날이 올 거예요.”
마가렛이 다이한을 노려보고 등을 돌리자, 다이한이 옆에 서있던 자신의 기사 한센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한센이 단박에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무슨 일을 꾸미나 알아보겠다는 뜻이었다. 한센이 보기에도 원래도 살짝 뒤틀려있던 왕비는 지금 정신을 놓은 사람 같았다.
그리고 왕비가 그의 집무실을 나가자마자, 기다리고 서 있던 기사가 급하게 들어와 다이한에게 고했다.
“지젤 님께서 입궁하셔서, 지금 왕비님을 뵙겠다고 하십니다.”
그 말에 다이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쩌면 뭔가 벌써 놓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조지 콜튼은 멀쩡하게 살아서 얼굴을 들이민 지젤을 보며 입가를 바르르 떨었다. 그걸 본 지젤이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재잘거렸다.
“정말이지, 제가 너무 늦었죠?”
진작에 마가렛 님을 찾아뵙고 괜찮으신지 살폈어야 하는 건데. 장례식 끝나고 난 다음에는 저도 정신이 없어서요. 밝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은 지젤이 손에 든 빨간 선물 상자를 흔들었다.
“예의에 맞게, 왕비님 드릴 선물도 가지고 왔답니다.”
바로 버리실 것 같기는 하지만요. 이윽고 왕비의 서재 앞에 도착한 지젤은 시종들에 의해 문이 열리는 걸 가만히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재촉하시기 전에 빨리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하는 건데.”
“재촉이라 하시면?”
“아시면서 뭘 묻습니까.”
지젤은 얼빠진 기사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서재 중앙의 소파에 몸을 기대앉은 마가렛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지젤은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 마가렛을 보며 콧잔등까지 구기며 인상 쓰듯 웃었다.
“그다지 반갑지 않으신가 봅니다.”
마가렛은 지젤이 반들거리는 바퀴벌레 같다는 생각을 하며 벽난로로 고개를 휙 돌렸다. 타오르는 불길을 보는 게 차라리 속이 편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 마가렛이 손짓하자, 시종들과 시녀들이 나가고 콜튼이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지젤은 말없이 콜튼이 마가렛의 뒤에 자리 잡고 서는 것까지 웃으며 지켜봤다.
“여기 온 이유가 뭐지? 살아있다 자랑이라도 하려는 건가?”
“마마, 많이 우울해 보이십니다. 제가 조나단 님의 대모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털썩-. 마가렛의 맞은편에 앉은 지젤이 손에 든 선물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손을 움직였다. 고급스러운 흰색 리본을 사르륵 풀어 헤친 지젤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조잡한 방법이기는 했지만, 시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제가 불면증이 있지 않았더라면 땅 밑에 누워있었을 테니 상심하지 마세요.”
“이제 보니 네년이 되도 않은 소리로 날 모함하러 왔구나.”
“후작 부인, 왕비님께 언행을 조심하세요.”
콜튼의 뻔뻔한 경고에 지젤은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리본을 다 풀어 헤친 상자를 양손에 쥔 채로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모함이 아니라 경고를 하러 왔습니다.”
“뭐?”
지젤의 말에 마가렛이 고개를 확 돌리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마가렛 님, 멍청한 방법으로 절 죽이려 하지 마세요. 그런 조악한 짓은 제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네년이 정녕 미쳤구나? 누가 누굴 죽여. 감히 네가 이 나라의 왕비를 상대로 얄팍한 혀를 놀려-”
“제가 왜 후작님께 고하지 않고 제 손에서 처리했겠습니까?”
처리했다는 말에 콜튼이 미간을 찡그림과 동시에 지젤이 아까부터 만지작거리던 선물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잘린 손을 본 왕비와 콜튼은 숨을 멈췄다. 거미 문신이 새겨진 차갑게 식은 손목의 주인을 콜튼은 알고 있었다.
“이따위 것으로는 절 죽일 수 없을 겁니다.”
말 그대로 지젤은 경고하러 온 것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쓸데없는 자객이 붙으면 피곤했다. 비앙카는 귀찮고 피곤한 일에 약한 아이였으며, 지젤은 시답잖은 장난에 힘 빼기가 싫었다. 지젤은 푸른 눈을 날카롭게 뜨고 왕비를 노려봤다. 마가렛은 그 독기 어린 눈을 보며 진저리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오만한 년! 누가 누굴 죽이려고 했다고 누명을 씌워!”
콜튼 또한 발뺌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지젤을 몰아붙이기 위해 언성을 높였다.
“지금 시신을 가져와 왕비님을 겁박하시는 겁니까? 지금 이건, 후작 부인께서 사람을 살해했다고 봐도 되는 겁니까?”
이 정도는 예상했지만, 너무 지루한 방향으로 흘러가네. 지젤이 권태로움을 숨기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인자라 하고 싶으시면 조사하세요. 내가 죽이지도 않았지만, 내 침실에 기어들어 왔으니 나는 정당방위가 아닌가? 뭐, 이 괴한이 왜 내 침실로 들어왔는지 밝히는 것도 재밌겠네요.”
지젤이 기꺼이 손목이 든 선물 상자를 마가렛의 앞으로 쭉 밀어내며 말했다.
“저는 든든한 제 편인 다이한 후작님이 계셔서, 이런 일에 무척 자신 있습니다.”
왕비님은 뭐. 지젤이 가늠하듯 콜튼을 위아래로 훑었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마가렛이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들어 지젤을 향해 흩뿌렸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라.”
다행스럽게도 식은 찻물을 뒤집어쓴 지젤은 얼굴에 묻은 갈색 액체가 뚝뚝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말을 이었다.
“왕비님께서 그에 일조하셨잖습니까.”
이제 와 후회하셔 봤자지요. 오른손을 들어 올린 지젤은 얼굴을 닦지 않고 그대로 선물 상자에 든 손목을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활활 타오르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손목을 집어삼킨 불을 가만히 보던 지젤은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그러고는 그 밑에 깔린 초콜릿이 담긴 납작한 유리병을 꺼내 마가렛의 앞에 내밀었다.
“어서 쾌차하셔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셔야죠. 너무 빨리 가시면 제가 아쉽습니다?”
콜튼은 지젤이 해맑게 웃는 게 이질적이다 못해 괴이해서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게 왕비와 후작이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몸을 경직시켰다.
“저는 아직 제대로 못 갚아드린 터라.”
“네가 아주 내 머리 위에 올라탔다는 듯이 시건방지구나.”
지젤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저 비웃듯 마가렛을 내려다본 지젤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조금 찍어낸 후 화사하게 웃으며 그대로 등을 돌렸다. 이대로 나가면 누가 봐도 왕비의 패악질에 시달린 불쌍한 후작 부인처럼 보일 터였다.
***
지젤이 입궁했다가 왕비에게 뺨을 얻어맞고 후작저로 돌아갔다는 소문은 하루 만에 수도에 퍼져나갔다. 다들 멍청하게 또 왕비를 찾아가서 혼이 난 후작 부인의 고집에 동정을 표하며,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행태가 점점 모나지는 왕비를 헐뜯었다. 그걸 전해 들은 이안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자 제인은 쓸데없이 긴장되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내가 마음이 앞서서는.”
이안은 본인의 실수와 어리석음을 쉽게 인정했다.
“주변 정리를 전혀 못 하고 있었구나.”
“그럼, 왕비와 후작의 소문에 대해서도 좀 자세히 알아볼까요?”
제인은 어제 들은 아주 막장스러운 얘기에 대해 파헤치고 싶은 마음에 몸을 움찔거렸다. 후작과 왕비가 이런저런 사이였다는 소문이 아주 궁금했다. 이안은 그런 제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지젤이 뭘 하는지 알아와.”
“네?”
제인이 반사적으로 되묻고는 또 핀트가 어긋난 자신의 주군을 바로잡기 위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지금 지젤 님 스토킹 할 때가 아닙니다? 후작과 왕비의 관계도 알아봐야 하고, 의원의 죽음이랑. 왕비가 콜튼이랑 같이 지젤 님에게 무슨 짓을 하고 싶어 하는지도 파헤쳐야 합니다. 저번에 조지 콜튼이 감시하고 있던 걸 떠올리면 말이죠. 범상치가 않다고요.”
“제인.”
이안은 멍청하게 말을 늘어놓는 자신의 기사를 보며 깊게 한숨 쉬었다.
“우리 지젤은 일방적으로 얻어맞고만 있을 바보가 아니야.”
걔는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줘야 발 뻗고 자는 애라고.
“근데, 찾아가서 맞고만 온다고?”
황태자의 말에 제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정도면 병이 아닐까? 뭐가 그렇게 예쁘고, 뭐가 저렇게 똑똑해 보일까. 안경을 맞춰줘야 하나.
“예, 그러시겠죠. 가련한 후작 부인께서 참으로 영악하게 구시겠습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병문안 갔다가 화풀이 맞으신 겁니다.”
그러니까 계속 아프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뤘던 거지. 왕비가 자길 얼마나 미워하는지 잘 아니까. 지젤이 결혼식 이후에 질투심이 폭발한 왕비에게 뺨이 터지도록 맞았었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자세하게 알아와. 지젤이 가까이 두는 측근이 누군지, 정확하게 뭘 하고 있는지.”
처음 왕국에 와서 만났을 때 지젤의 처세와 사교계 내의 위치를 보자면 지젤은 절대로 바보가 아니었다. 단순한 구설수에 오르고 남들 심심풀이가 될 일을 빤히 알면서 행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뺨을 맞았다는 지젤이 걱정되고 감히 그녀를 때렸다는 마가렛에 대한 분노로 그는 주먹 쥔 손을 움찔움찔 떨었다.
“그리고 왕의 죽음을 위로하는 만찬을 개최해. 지젤이 저택 밖으로 나오도록.”
정말로 이안은 이 모든 게 하루빨리 끝나서 아무 생각 없이 지젤을 품에 안을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