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급하게 왕의 침실로 들어선 다이한 후작을 보며 다른 귀족이 어미 새를 쫓듯 그 뒤를 따랐다.
“몇 년 전부터 오늘내일하시기는 했지만, 어찌 지금 이렇게 가셨는지.”
“전조도 없었다고 하니, 정말 명이 다하신 모양입니다.”
“후작님, 어찌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왕자님께서 왕좌에 오르시기에는 나이가-”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법적으로 당장 왕위에 오르셔야 옳으니. 세례 때 대부를 선임하기가- 예법에 안 맞습니다.”
다이한은 옆에서 빠르게 조잘거리며 ‘어쩌지?’만 반복하는 귀족들에게 관심 주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곱게 누워있는 시체를 확인하고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저하께서 승하하셨는데, 왕자님의 후견인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하군. 게다가 왕비님께서도 아직 건재하시네.”
그가 적당히 선을 그으며 눈치를 주자, 귀족들 모두 입을 다물었다. 왕비도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후작의 말이 옳았다. 당장은 왕비가 살아있으니, 실질적인 왕권은 그녀가 쥐고 있었다.
다이한은 왕의 시체를 꼼꼼히 살피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중독이 되었다든가 하는 증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왕비 짓이니. 다이한은 피로함을 숨기지 못하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말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
갑작스러운 왕의 죽음으로 열린 장례식의 분위기는 덤덤했다. 그 누구도 울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병으로 누워있던 늙은 왕은 이미 그들에게서 죽은 사람이 된 지 오래였다. 친왕국파인 달리아 백작마저 왕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걸 확신한 뒤로는 발걸음을 끊었었다.
“쉿, 왕자님.”
“으응, 다리 아파.”
지젤은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는 조나단을 슬쩍 살폈다. 시녀가 어르고 달래지만, 칭얼거림을 숨길 수는 없었다. 아이도 그렇게 슬퍼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지젤 또한 슬프지 않았다. 자신의 친부이니 조금은 서럽거나 안쓰러울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에 원망이 슬금슬금 퍼져나갔다.
무능하고 힘없는 왕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고, 그 대가는 가족들이 나눠 가져야 했다. 그건 죄였다. 매정하다 욕을 먹을지언정 적어도 지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놓고 자신만 편안해지는 건 비겁했다.
다이한은 옆에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서있는 지젤을 연신 살폈다. 그는 어쩌면 지젤이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몸이 좋지 않으면 말해.”
“얼마 서있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짧게 답한 지젤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왕비 뒤에 서있는 조지 콜튼과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감시하는 시선에 지젤은 웃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이제 본인의 차례라는 생각이 들어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와중에 주변 시야로 계속 황태자가 들어와서 그녀는 한참을 생각 정리에 집중하지 못하고 방해받아야 했다.
***
뒤숭숭한 왕궁 분위기에 지젤은 또다시 조나단을 보러 가지 못했다. 다이한은 왕궁에 불려가 간단하게 귀족들과 의견을 나누고 업무를 정리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길게는 2일씩도 안 들어오는 일이 이어지면서 2주가 지났다.
그사이 황태자가 후작저를 찾아왔지만, 지젤은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그의 방문을 거절했다. 그녀는 부러 창밖도 내다보지 않았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의 방문을 허락할 것 같았다. 후작이 예민하게 구는 이상 후작저에 황태자를 들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보다 왕비가 빠르게 움직인 탓에 정신이 확 들었다. 내가 지금 과거 회상에 빠져서 달콤한 시간을 즐길 때가 아니지.
지젤은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놓고는 가만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산책도 사교모임도 나가지 않고, 멍하니 앉은 그녀를 미아는 걱정했다. 그럼에도 지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평소처럼 밤이 되어 보름달이 크게 뜬 하늘을 보던 지젤은 침대 옆의 촛불을 단숨에 불어 꺼버렸다. 그렇게 어둠 속에 한참을 앉아있던 지젤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작저에 강도라니, 굉장히 작위적인 선택이네요.”
칼 든 괴한이 대뜸 침실로 들어와 귀부인만 찔러 죽인다니. 지젤이 소리 없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고 권태로운 듯 심드렁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니면, 강도 외에 다른 시나리오가 있나요?”
“올 걸 알고 있었다?”
복면을 쓴 남자가 지젤을 위아래로 훑으며 의문을 표했다. 후작 부인이 검술에 능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소리를 지르지도, 놀라지도 않은 듯한 태도에 오히려 이쪽이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어렴풋이 예상은 했는데, 정말 이렇게 조잡할 줄은 몰랐네요. 새삼스럽게 후작저 경비가 엉망이라는 생각도 들고.”
“곧 죽을 년이 말이 많구나.”
그녀가 겁을 먹어 혀가 길어졌다고 생각한 괴한이 오른손에 든 단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오른 손등에 새겨진 검은 거미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불쌍히 여겨, 아프지 않게 보내주마.”
지젤이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사람이 몸이 아프면 판단력이 흐려지나 봅니다.”
지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툭 튀어나온 비앙카가 순식간에 괴한의 목을 베어냈다.
“사고로 위장하는 성의조차 보이기 힘들 정도로 조급하다니.”
눈 깜빡할 새에 일어난 일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목을 움켜쥔 괴한이 비앙카를 힘으로 제압하려 했지만 비앙카가 한 수 위였다. 역으로 그를 땅에 내리꽂아 버린 비앙카의 얼굴이 검붉은 피로 얼룩졌다. 지젤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런 비앙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줬다.
“깜짝 선물을 어떻게 돌려드려야 좋을까?”
지젤이 말을 마치며 죽어가는 괴한의 오른손을 빤히 내려다보자 비앙카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웠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비앙카가 예뻐서 한 번 더 소리 내 웃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었다.
***
저택의 본관 건물 앞에 선 도널드의 눈매가 절로 날카로워졌다. 지긋지긋한 감자에 이어 양파를 포대째로 옮기던 그는 저택 옆 나무의 가지가 부러진 것과 창가에 남은 끌린 자국을 보고 손을 움찔 떨었다. 이건 분명 누가 창문을 타고 올라간 거였다.
“누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도널드는 이걸 제인에게 알리려면, 누가 왜 후작 부인의 침실 창문을 타고 올랐는지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주시하는 비앙카를 발견하고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아니, 요즘 후작 부인께서 도통 침실 밖으로 나오질 않으시니 걱정돼서 말이지.”
비앙카는 도널드가 자신과 결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지나치게 정직했다. 거짓말을 할 때 손을 가만두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너무 관심을 보이시면, 후작님에 의해 쫓겨나실 거예요.”
“아, 쫓겨나? 그래서 너랑 미아만 지젤 님 곁에 있는 거야?”
“지젤 님이 워낙 매력적이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다 꼬여서요.”
“독점욕이 강하신가 보네?”
도널드가 떠보듯 연이어 묻는 말에 비앙카는 조용히 손을 들어 찢어진 검은 복면을 보여줬다. 저게 뭐지? 도널드가 그걸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걸 확인한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편은 아닌가 보네. 나름의 심사를 거친 비앙카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것들을 내쫓는 일을 하는 건, 후작님뿐만이 아닙니다.”
그 말에 도널드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들었다. 경고인가? 그가 비앙카의 얼굴 세심하게 살피려는데 비앙카가 그의 뒤를 향해 손짓했다.
“혼나겠다.”
“뭐?”
누가? 도널드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는데 어느새 그의 뒤에 다가온 주방장이 그의 귀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아니, 양파를 밭에서 뽑아오나. 신입이 대체 여기서 무슨 농땡이를 치고 있는 거야!”
“으아! 고막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답답해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양파 가지고 오라니까, 비앙카 꼬시고 있는 거야? 말세다! 이놈아! 네 나이를 생각해!”
“아니, 저 스물두 살입니다? 아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꼬시기는 누가 누구를!”
“아니기는, 척 봐도 흑심에 말이나 한번 붙여보려고 애가 달았구만.”
도널드는 강하게 부정을 하기 위해 비앙카를 바라봤다가, 입을 다물었다. 예쁘기는 한데. 약간 도도하게 생긴 살짝 선이 짙은-. 아니, 쓸데없는 생각 그만해.
“관심 없습니다. 안 좋아합니다! 안 좋아해요! 그리고 비앙카가 먼저 말 걸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비앙카는 도널드가 연신 뒷목을 긁어대며 소리치는 걸 보면서 정말 거짓말을 꽤나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다이한, 우리 우정을 생각한다면 왕자를 지켜줘야 합니다.”
후작은 아픈 몸을 이끌고 온 티를 팍팍 내며 그에게 애달프게 구는 마가렛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우정이 있던가. 그는 가감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럼 전하를 그렇게 보내시면 안 되었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이제 저는 왕자님의 후견인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랬다가는 지젤 그년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내 그 꼴은 죽어서도 못 봅니다.”
왕비가 숨을 헐떡이며 하는 말에 다이한은 대놓고 짜증스러운 한숨만 쉴 뿐 답하지 않았다. 정신을 놓기 시작한 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이렇게 왕국에 와 있을 때, 그때 우리 왕자에게 힘을 실어줘야 해요. 후작이 조금만 힘써주고 뒤에 서있어준다면-”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다이한이 지겹다는 듯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같이 부들부들 떠는 마가렛을 보며 말했다.
“지젤은 내 아내고, 나는 내 아내와 함께합니다. 그걸 못 받아들이시겠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